36
그 날 밤 마슬로바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뜬 채 누워서, 방 안을 왔다갔다 하는 교회 부집사의 딸 때문에 가려지는 문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빨간머리 여자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할린의 징역수 따위와는 결혼하지 않고 관리나 서기, 하다 못 해 간수나 간수보와 라도 살림을 차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지 않도록 해야지, 말라 빠지면 끝장이다.' 그녀는 변호사나 재판장이 뚫어지게 자기를 바라보던 일이며, 또 재판소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자기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줄곧 자기만 바라보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리고 감옥으로 면회와 준 친구 베르타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키타예바 마담의 윤곽에 있을 무렵 카츄샤가 좋아하던 어느 대학생이 유곽으로 찾아와서 여가 가지 소식을 묻고 무척 동정하더라는 말을 전해 준 것이다. 그리고 빨간머리의 여자와 싸우고 난 다음, 오히려 그녀가 가엾어진 생각이며, 흰빵을 하나 덤으로 준 빵장수 생각을 했다. 그녀는 가엾어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지만 네플류도프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소녀 시절이며 처녀 시절이며 더욱이 네플류도프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한 추억은 그녀의 마음속 깊숙한 한 구석에 건드리지 않은 채 간직되어 있었다. 꿈에서도 네플류도프를 본 적이 없었다. 오늘 법정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군인으로서 짧은 콧수염을 길렀을 뿐, 턱수염도 없이 탐스러운 머리칼만 물결치듯 굽이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얼른 보아 청년이라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노숙해졌고 턱수염도 기른 탓이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오히려 지금까지 한번도 그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군대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모네 집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마을을 지나쳐 간 무섭고 캄캄하던 밤에, 네플류도프와의 모든 추억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날 밤까지도 그가 틀림없이 집에 들르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뱃속에 든 어린애를 그렇게 괴롭게 여기지 않았을 뿐더러 몸 속에서 때로는 부드럽기도 하고 때로는 활발한 태동을 느꼈을 때 이상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밤 이후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는 귀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고모들도 네플류도프를 기다리며 반드시 들러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시일이 급해서 빨리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들르지 못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왔다. 이것을 안 카추샤는 역까지 나가 그를 만나 보려고 하였다. 새벽 2시에 기차가 그 곳을 지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카추샤는 두 여주인의 잠자리를 돌봐 주고 요리사의 딸 마샤라는 계집애를 구슬러서 귀가할 때 그 애와 함께 오려고 낡은 부츠에다 머릿수건을 뒤집어쓰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채 역으로 달려갔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가을밤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한 차례 퍼붓고는 뚝 그쳐 버렸다. 들판에서 발끝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도 캄캄했기 때문에 익숙한 길인데도 카추샤는 숲속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그래서 기차가 3 분밖에 정차하지 않은 조그만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번째 벨이 울린 뒤였다. 카추샤는 플랫폼으로 달려가자 곧 1 등칸 차창에서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1등 객차 안은 유달리 휘황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의 장교가 벨벳 안락 의자에 마주 앉아서 트럼프를 하고 있었다. 창가에 보이는 조그만 테이블에는 굵은 양초들이 녹아내리며 타고 있었다. 그는 꽉 끼는 군복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좌석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얼어붙은 손으로 차창을 두드렸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세 번째 벨이 울리고, 기차는 덜커덩하며 뒤로 좀 물러서더니 이윽고 객차와 객차가 부딪치면서 하나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하고 있던 장교가 트럼프를 들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한 번 더 창문을 두드리면서 얼굴을 유리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이 때 그녀가 바싹 붙어 있던 객차도 덜커덩하고 움직이며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장 안을 들여다보면서 따라갔다. 장교가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열리지 않았다. 그 때 네플류도프가 일어나서 그 장교를 밀어젖히고 차장을 열려고 했다. 기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카추샤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만 했다. 기차는 더욱 속도를 더해갔다. 가까스로 창문이 열린 그 순간, 차장이 카추샤를 밀치면서 그 객차에 뛰어올랐다. 이내 플랫폼이 다 지났다. 카추샤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층계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1등칸은 벌써 훨씬 앞에 있었고, 그녀 옆을 2등칸이 달리고 잇달아 3등칸이 더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래도 그녀는 자꾸만 달렸다. 신호등을 단 마지막 객차가 스쳐갔을 때 그녀는 울타리 밖의 급수 탱크 앞까지 와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머리수선을 날려 보내고 한쪽 옷자락이 다리에 휘감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아줌마!" 간신히 그녀 뒤를 따라오던 계집애가 외쳤다. "머릿수건이 날아갔어요!"
카추샤는 그 자리에 섰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느닷없이 계집애를 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이는 휘황찬란한 1등칸 안에서 벨벳 안락 좌석에 걸터앉아 농을 하며 마시고 있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두운 추운 밤에 흙투성이가 되어 모진 비바람을 맞아 가면서 서서 울고 있다.'
"가버렸어!"하고 그녀는 외쳤다.
계집애는 깜짝 놀라서 카추샤의 젖은 옷을 팔로 끌어안았다.
"아줌마, 집으로 가요."
'이번에 기차가 지나가면, 그 밑으로 뛰어들자. 그래, 그러면 도든 게 끝나는 거야.' 카추샤는 계집애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추샤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이 때 흥분이 지난 뒤에는 흔히 그렇듯이 태아가---뱃속에 든 그의 아이가---갑자기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몸을 쭉 뻗었다가는 다시금 가느다랗고 뾰족한 것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 전의 괴롭던 생각도, 그에 대한 증오심도, 죽어서라도 그에게 복수하려던 생각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서서 옷 매무새를 고치고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채 피로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그 결과 지금과 같은 타락의 세계로 빠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무서운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이후, 신도 선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그녀 자신도 신을 믿었고 다른 사람들도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날 밤부터 아무도 신을 믿지 않으며,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또는 신의 계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며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가 사랑했고 또 자기를 사랑했던 네플류도프는(그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그녀를 농락한 후 그녀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그에 못 미쳤다. 그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의 고모들, 그렇게 신앙심이 깊은 노부인들조차도 그녀가 전처럼 일을 잘하지도 못하니까 쫓아내고 말았다. 그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모두 다 그녀를 보고 돈벌이할 궁리만 했고 또한 남자들은, 그 늙은 경찰서장을 비롯해서 감옥의 간수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한낱 육체적 쾌락의 도구로만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들 쾌락만 찾았다. 이러한 확신은 그녀가 자유로운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에 만난 늙은 소설가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그는 모든 행복은 쾌락에 있다고 단언하며, 그것을 소위 시나 미라고 불렀다.
사람은 그 누구나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의 쾌락만을 위해서 살고 있으므로 신이나 선에 관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고민하도록 혼란스럽게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따위의 의문이 생겼을 때는 일체 그런 일은 생각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따분해질 때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아니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남자들과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져 버렸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 부활 (38) -톨스토이- (0) | 2021.08.13 |
---|---|
<R/B> 부활 (37) -톨스토이- (0) | 2021.08.12 |
< R/B> 부활 (35) -톨스토이- (0) | 2021.08.10 |
<R/B> 부활 (34) -톨스토이- (0) | 2021.08.09 |
<R/B> 부활 (33) -톨스토이- (0) | 2021.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