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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네플류도프는 자기 침실로 마련된 사무실에 이부자리가 두툼하게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털요 위에 베개 둘이 포개져 있었고, 정성들여 꽃무늬 수가 놓여졌고 풀이 빳빳한 두꺼운 2인용 새빨간 비단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관리인의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관리인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네플류도프에게 권했으나, 그가 사양하자 변변치 않은 음식과 부족한 설비를 사과하면서 네플류도프를 홀로 남겨 두고 나가 버렸다.
농부들의 거절은 조금도 네플류도프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쿠즈민스코예에서는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이 곳에서는 불신과 적의까지 표시되었는데도 어쩐지 그는 마음이 침착하고 흐뭇하기만 했다. 사무실은 무덥고 더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밖으로 나가서 정원으로 갈까 하다가 그 날 밤의 일, 하녀방의 그 창문과 뒷문의 계단에 생각이 미치자, 죄스런 추억으로 더럽혀진 그 장소를 거닐기가 싫어졌다. 그는 다시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서 새파란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의 짙은 향기와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랫동안 어두워 가는 정원을 바라보기도 하며, 물방아 소리와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계단 바로 앞 숲속에서 단조롭게 울어 대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관리인 방의 창문에는 불이 꺼졌다. 헛간 뒤의 동쪽에서 달빛이 환하게 비쳐왔다. 멀리서 번갯불이 밝아지더니 정원에 만발한 꽃들과 다 쓰러져 가는 집을 환히 비춰 주었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려오고 곧 하늘의 3분의 1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휘파람새와 다른 새들도 울기를 멈추었다. 요란스러운 물방아 소리와 꽥꽥거리는 거위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관리인의 뜰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닭이란 놈은 무덥고 천둥이 치는 날에는 다른 날보다 일찍 울어 대는 법이지만, 닭이 일찍 우는 밤이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다. 네플류도프에게는 즐겁다기보다 그 이상 가는 밤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밤이었다. 그의 상상은 그에게 있어서 순진한 청년이었을 때 이 곳에서 지낸 행복했던 여름의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상기했을 분만 아니라, 그가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진리를 계시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던 일과,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어머니의 곁을 떠나게 되면 자기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결코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어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던 시절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니콜레니카 이르체테프와 함께 서로 도와서 언제나 선량한 생활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맹세했던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쿠즈민스코예에서 유혹에 사로잡혀 집과 삼림과 농장, 그리고 토지 등이 모두 아깝게 생각되었던 것을 상기하고, 지금도 그렇게 아까우냐고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 어째서 그런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오늘 목격한 것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남편이 지주인 네플류도프의 삼림에서 나무를 도벌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남편도 없이 여러 아이들을 거느리고 고생하는 여자며, 자기네와 같은 신분의 비천한 여자들은 주인 나리에게 몸을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아니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내뱉고 있는 무서운 마트료나를 생각했다. 또 그는 아이들에 대한 그 여자의 태도며, 어린애들을 육아원으로 보내는 방법이며, 먹지 못해 영양 실조로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차양이 없는 누더기 모자를 쓰고 연방 생글거리고만 있던 늙어 보이는 불쌍한 그 갓난애의 일 등을 상기하고, 또 힘겨운 노동에 지친 나머지 굶주린 자기네 소를 잘 보지 못한 벌로 네플류도프를 위해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허약한 만삭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감옥이며, 머리를 빡빡 깎은 머리며, 감방이며, 구역질나는 악취며 쇠사슬 등이 생각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시해서 도시에서 사는 귀족 계급들 전체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밝은 달이 헛간 뒤에서 떠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뜰을 가리고, 무너져 가는 집의 함석 지붕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자, 이 달빛을 그대로 놓쳐 버리기가 아쉬운 듯이 멎었던 휘파람새가 뜰 구석에서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쿠즈민스코예에서의 자기 행동을 신중히 생각해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해결하려 했을 때 무척 망설여졌고, 또 해결하지 못한 일과,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를 자문 자답해 본 결과 모든 문제가 너무도 간단히 해결되는 데에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간단해졌느냐 하면, 지금은 자기 한 몸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문제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되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명확한 답이 나왔다.
이제 그는 토지를 이대로 계속해서 갖는다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추샤를 버리지 않음은 물론 그녀를 돕고 그녀에 대한 자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의견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는 재판과 형벌에 관한 모든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천명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밖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굳은 신념은 그를 기쁨에 넘치게 했다.
먹구름은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고, 번개도 먼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서 번쩍이며 넓은 뜰과 현관과 함께 낡아빠져 곧 허물어지게 된 집을 환히 비추었다. 천둥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새들이 우는 소리는 멎었으나, 그 대신 나뭇잎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네플류도프가 앉아 있는 현관 계단까지 몰려와 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는가 싶더니 승아와 함석 지붕을 후두둑 때리기 시작했으며, 온 하늘이 번쩍 타오르자 만물은 숨을 죽였다. 네플류도프가 셋까지 세기도 전에 머리 바로 위에서 무엇인지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쿠르릉 하고 하늘을 굴리며 내달았다.
네플류도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 문제의 의의를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 고모들은 살고 있었을까? 왜 니코레니카 이르체네프는 죽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왜 카추샤라는 여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 후의 나의 방종한 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즉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조물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확실히 편안한 마음임을 의심할 수 없다.)
비는 어느새 좍좍 퍼부어서, 지붕에서 홈통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뜰과 저택을 비추는 번갯불이 뜸해졌다. 네플류도프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더러운 벽지가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 빈대가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하고 생각한 그는 자기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그의 걱정은 들어맞았다. 촛불을 끄기가 무섭게 빈대가 물어뜯기 시작했다.
토지를 내 주고 시베리아로 간다면, 벼룩이랑 빈대랑 불결한 것이...... 그러나 견뎌야 한다면 그런 것쯤 견뎌 보는 것이지.'
그러나 제아무리 각오를 했다 해도 빈대만은 견뎌낼 수가 없어서, 활짝 열린 창가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비구름 속에서 또다시 얼굴을 내민 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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