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네플류도프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 대심원이 재판소의 판결을 인정했으므로, 시베리아로 떠날 채비를 해야한다는 슬픈 소식을 마슬로바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감옥의 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변호사가 써 준 황제 앞으로의 청원서를 지금 마슬로바이의 서명을 받기 위해 감옥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었으나, 그는 별로 희망을 걸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지금에 와서는 그 청원이 허용되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시베리아로 가서 유형수나 징역수들과 함께 생활할 것만을 생각했고, 만일 마슬로바가 석방된다면 자기의 생활과 마슬로바의 생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는 미국 작가 도로우의 말을 상기했다. 미국에 아직도 농노제가 존재하고 있을 무렵, 그는 농노제가 합법화되고 보호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정직한 시민이 몸을 의탁할 유일한 안식처는 오직 감옥뿐이라고 말했었다. 네플류도프는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본 후부터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정직한 사람들이 몸을 의탁할 유일한 장소는 감옥뿐이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내 마차가 감옥 가까이 가서 그 구내로 들어서자, 그는 이것을 직접 체험했다.
병원 수위는 그가 네플류도프임을 알자, 마슬로바는 이미 병원에 있지 않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 어디로 갔소?"
"다시 감옥으로 갔습니다."
"왜 돌아갔죠?"하고 네플류도프가 물었다.
"그런 여자야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하고 수위는 경멸하 듯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조수와 붙여다녔기 때문에 병원장이 돌려 보낸거죠."
네플류도프는 마슬로바와 그녀의 정신 상태가 그토록 자기와 거리가 먼 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참으로 괴로웠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치솟았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정신 상태가 차차 갈라져 간다고 적이 기꺼워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자기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그 말도, 비난도, 눈물도...비교될 수 있는 한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여자의 교활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 바로 잡을 수 없는 타락의 징조를 그녀 속에서 보았던 것을 이제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병원을 나왔을 때,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아직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은 것일까? 그녀의 이러한 행동으로써 나는 이제 해방된 것이 아닐까?'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자기가 해방된 기분으로 그녀를 버린다면, 자기가 벌을 주려는 그녀는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벌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두려웠다.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의 계획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결심을 굳게 할 따른이다. 그녀는 마음내키는대로 결심을 하라고 내버려 두자. 조수와 밀통하건 말건 상관할 것 없다. 내가 할일은 내 양심의 명령에 따라하는 것뿐이다.'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양심은 내가 범한 죄의 속죄를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상으로나마 결혼을 하고 그녀가 어디로 추방되든지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나의 결심은 변경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고집을 부리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네플류도프는 병원을 나와 단호한 걸음걸이로 감옥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감옥 문에 다가서자, 그는 마슬로바를 면회하러 왔다고 소장에게 전해달라고 담당 간수에게 부탁했다. 간수는 네플류도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숙한 사람들 대하듯 감옥 안에서 일어난 중대한 새소식을 알려주었다. 전에 있던 소장은 이미 파면되었고, 그 후임으로 엄격한 다른 소장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래 요즘은 굉장히 엄격해져서 곤란하답니다."하고 간수는 말했다. "마침 소장님이 계시니까, 곧 전하긴 하겠습니다만."
소장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곧 네플류도프가 있는 데로 왔다. 새로 온 소장은 키가 크고 광대뼈가 툭 불거진, 동작이 몹시 느리고 침울한 사람이었다.
"면회는 지정된 날, 면회소 안에서만 허용됩니다." 그는 네플류도프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제에게 올릴 청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왔습니다."
"제게 그것을 맡기십시오."
"본인을 직접 만나고 싶습니다. 전에는 언제든지 만나 볼 수 있었는데요."
"전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플류도프를 힐끗 보면서 소장은 말했다.
"현지사의 허가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수첩을 꺼내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보여 주십시오." 여전히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않고 소장은 말했다. 넷째손가락에 금반지를 낀, 길고 하얀 손으로 네플류도프가 내놓은 서루를 받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럼 사무실로 오십시오." 소장은 말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장은 자신도 면회에 입회할 작정인 듯 테이블 앞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치범 보고두호프스카야를 면회할 수 있느냐고 네플류도프가 물어보자, 소장은 간단히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범과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서류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보고두호프스카야에게 전할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던 네플류도프는 계획했던 범죄가 발각되어 실패한 사람과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슬로바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소장은 고개를 들어 마슬로바와 네플류도프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자, 면회하십시오."하고 말이 확인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플류도프는 종전과 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싶었으나, 마음먹은대로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난 당신의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소." 그는 손을 내밀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대심원에서 그만 기각되고 말았소."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는 숨이 찬 듯한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전과 같으면 네플류도프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을뿐더러 그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져갔다.
소장은 일어서서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이제 마슬로바에 대해서 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대심원의 기각에 대한 유감의 뜻만은 말해야되겠다고 생각했다.
"낙심하지 말아요."하고 그는 말했다. "황제께 청원서를 내면 잘된 테니까. 나도 그것을 기대하고..."
"전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한 사팔눈으로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뭐란 말이오?"
"병원에 들르셨다니까 필시 제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그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네플류도프는 이마를 찌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자, 간신히 가라앉으려던 모욕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난 어엿한 귀족이다. 어느 상류 계급의 처녀라 할지라도 좋아하고 결혼하는 걸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내가, 이런 여자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를 못참아 조수와 밀통을 하다니.'하고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자, 이 청원서에 서명해요." 그는 말하면서 호주머니 속에서 큼직한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스카프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의자에 앉아, 어디다 무엇을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네플류도프가 가르쳐 주자, 그녀가 왼손으로 오른팔 소매를 매만지면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마슬로바의 뒤에 서서 슬픔을 참지 못하여 바들바들 떨며 그녀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선악의 두 가지 감정이 모욕을 당한 긍지와, 고민을 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결국 후자가 이기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앞섰는지 혹은 자기 자신을 깨닫고 지금 자기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 자신의 죄와 추행을 상기해낸 것이 앞섰는지 그것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갑자기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슬로바는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스커트에 문지르며 일어서서 네플류도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어떤 결과가 되었든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소."하고 네플류도프가 말했다.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생각이, 그녀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랑스러운 감정을 더욱 강하게 돋우어 주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나는 말한대로 실행하겠소. 당신이 어디로 유형가든 따라가겠소."
"모두 소용없는 일이예요."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으나 그녀의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다.
"여행중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봐요."
"별로 없어요. 정말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소장이 다가왔으므로 네플류도프는 주의를 받기 전에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쁨과 마음의 평안과 만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맛보면서 밖으로 나왔다. 마슬로바가 어떤 일을 했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변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은 정신의 세계로 승화시켜주었다. 그녀가 조수와 밀통을 했건 말건 그것은 그녀의 자유인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또 신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마슬로바가 병원에서 쫓겨난 원인이며, 네플류도프도 그것을 사실로 믿었던 조수와의 사건이란 이런 것이었다. 마슬로바가 여조수의 심부름으로 탕약을 가지러 복도 끝에 있는 약국으로 가자, 공교롭게도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귀찮게 따라다니던 키 크고 여드름투성이인 조수 우스티노프 한 사람만이 있었다. 마슬로바가 끌어안으려고 덤벼드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힘껏 떼밀자, 조수는 그만 약장에 부딪쳐 그 곳에 있던 약병 두 개가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마침 이때 복도를 지나가던 병원장이 물건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홍당무가 되어서 뛰쳐나오는 마슬로바를 보고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봐, 여기까지 와서 망측한 짓을 하면 내쫓을테야. 대체 왜 야단들이야!"하고 조수 쪽도 번갈아보면서 안경너머로 쏘아보았다.
조수는 쓴웃음을 띠며 변명하기 시작했으나, 병원장은 그의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들고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본 다음 병실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날 중으로 마슬로바 대신에 좀더 얌전한 여자를 보내 달라고 소장에게 말했던 것이다. 마슬로바와 조수와의 관계란 이런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슬로바는 사내와 밀통했다는 누명으로 병원에서 내쫓긴 것이 무척 괴로웠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와 처음 만난 이후부터 오랫동안 진저리가 나는 남자와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판단해서 뭇 사내들이, 더군다나 여드름투성이의 조수 녀석까지도 그녀를 능욕하는 것쯤 당연하게 생각하고, 거절하기만 하면 도리어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뼈저린 모욕감을 느끼게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흐렸다. 방금 네플류도프를 만났을 때도 그녀는 필시 병원에서 들었을 억울한 누명을 변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변명을 시작하면 그는 믿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의심을 깊게 살 것 같아서, 눈물이 솟구쳐 입을 다물어 버렸던 것이다.
마슬로바는 두 번째 면회 때 네플류도프에게 분명하게 말한 것처럼,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으며 미워하고 있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나머지 그가 바라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실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술도 끊고 교태도 부리지 않았으며, 병원의 잡역부가 된 게 아니던가. 네플류도프가 이 모든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플류도프가 희생을 무릅쓰고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꺼낼 적마다 그토록 완강히 거절해 온 것도 사실은 자기가 한번 입 밖에 낸 오만스러운 말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결혼이 그를 불행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희생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다짐은 하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가 옛날의 그녀로 생각하고 멸시하고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괴로웠다. 지금쯤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병원에서 무슨 불미스러운 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유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는 통지보다 더 괴로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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