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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부, 28)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10. 10.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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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네플류도프는 그 날 밤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마리에트와 극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약속한 것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기로 했다.

'그런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을까?'하고 그는 약간 불성실한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마지

막으로 더 시험해보자.'

그는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연중 무휴 상연되는 춘희의 제 2막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극장에 도착했다. 극장에서는 외국에서 온 프랑스 여배우가 폐병을 앓다 죽어가는 장면을 새로운 연출법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바깥 복도에 서 있던 예복을 입은 하인이 마치 친숙한 손님을 대하듯이 머리를 숙인 다음 문을 열어 주었다. 마리에트와 좌석을 묻자, 그는 정중하게 그 좌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 등뒤에 서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잔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대중석에 모여 앉아 있는 허연 머리, 반백의 머리, 대머리, 포마드를 바른 머리, 곱슬머리들... 이런 모든 관객들은 비단과 레이스 의상을 입은 야윈 여배우가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독백을 하고 있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누군가 "쉿!"하고 말했다. 차고 훈훈한 두 갈래의 공기가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스쳐갔다.

거기에는 마리에트 말고도, 붉은 오페라 외투를 입고, 크고 묵직하게 머리를 틀어올린 귀부인과 두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마리에트의 남편이었는데 그는 매부리코의 엄격한 표정을 하고 솜과 염색한 리넨으로 사뭇 군인답게 가슴을 부풀려올린 키가 크고 잘생긴 장군이었다. 또 한 사람은 밝은 안색의 대머리였으며, 멎진 구렛나루를 기르고 턱수염을 말끔히 깎은 턱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아름답고 얌전하고 우아한 마리에트는 목과 어깨를 드러낸 야회복을 입어서 목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간 탐스러운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는 까만 사마귀가 하나 보였다. 그녀는 곧 뒤돌아보더니 네플류도프에게 자기 뒷좌석을 부채로 가리키면서,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듯 의미 심장한 눈길로 방긋 웃었다. 그녀의 남편은 항상 그러듯이 침착한 태도로 네플류도프를 보고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아내와 주고받은 시선 속에는 자기는 이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주인이며 소유자라는 의식이 역력히 보였다.

여배우의 독백이 끝났을 때, 극장 안은 박수 소리로 떠나가는 듯했다. 마리에트는 일어서서 비단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여미며 뒷자리로 와서 남편에게 네플류도프를 소개했다. 장군은 여전히 눈으로 웃으면서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다고 말하고는 또다시 태연하게 속을 알 수 없는 침묵 속으로 잠겨버렸다.

"오늘 떠나지 낳으면 안 되는데, 당신과 약속을 했기에." 마리에트를 마주 보면서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저야 만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저 훌륭한 여배우만은 보셔야 하잖아요?"하고 마리에트는 함축성있게 물으며 말했다. "마지막 장면은 차 좋았어요. 그렇지 않아요?"하고 이번에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도 감격스럽지가 않군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나는 오늘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고 온 탓인지..."

"자, 앉으셔서 이야기나 들려 주세요."

남편은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차츰 비웃는 듯한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구류가 되었다가 겨우 석방된 그 여자의 집에 갔다 왔습니다. 완전히 미쳐버렸더군요."

"바로 내가 말씀드린 그 처녀 이야기예요."하고 마리에트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석방이 되어서 나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하고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면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마리에트가 무슨 말인가 할 것이 있다고 했던 그 말을 꺼내리라 기대하면서 앉아 있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아지 않았고, 또 말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농담조로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연극이 네플류도프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네플류도프는 마리에트가 자기를 초대한 것은 자기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깨와 사마귀를 드러낸, 매혹적인 저녁 화장을 한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이내 알아챘다. 그는 유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전에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매혹의 베일이 지금 네플류도프에게서 완전히 벗겨졌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그 매력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리에트를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반하기는 했으나, 마리에트가 수백, 수천 사람들의 눈물과 목숨을 희생으로 해서 자기의 명예를 쌓아올린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그런 일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어제 말한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었고 또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여하튼 그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그의 마음이 끌리지도 했으나 동시에 불쾌하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몇 번이나 돌아가려고 했으나 모자에 손이 가면서도 망설였다. 그러나 마치내 그녀의 남편이 담배 냄새를 풍기면서 자리로 돌아와서는 네플류도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경멸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네플류도프는 열린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얼른 복도로 나와서 외투를 찾아 가지고 극장을 나셨다.

네프스키 거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네플류도프는 넓은 포장도로를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 키 크고 체격이 좋은, 원색적인 옷차림을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넓은 아스팔트 길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으나 얼굴과 몸집에는 남성을 유혹하는 요염한 매력을 그녀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도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네플류도프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앞질러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짙은 화장을 한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살짝 미소를 던졌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네플류도프는 순간적으로 마리에트의 생각이 났다. 극장에서 느꼈던 애착심과 혐오감을 이 여자에게서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당황하여 그녀를 앞지른 자기 자신을 책망하면서, 모르스키야 거리로 접어들었다. 제방으로 나온 그는 순경이 이상한 얼굴을 하거나 말거나 오르락 내리락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극장에 들어갔을 때, 그 여자도 역시 저런 미소를 던져 주었지.' 그는 생각했다.'

그 미소와 지금의 이 미소는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다른 것이 있다면, 거리에서 본 그 여자는 단적으로 하는 솔직한 데가 있었고, 마리에트는 사뭇 자기는 그런 것 따윈 생각지 않는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고귀하고 세련된 생활을 하고 있는 척하는 것이지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 거리의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지만, 마리에트는 아름답고 더러운 욕정을 장난거리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거리의 여자들은 더럽다기보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악취가 풍기는 구정물 같은 것이지만, 그 극장에 도사리고 있는 여인들은 손아귀에 걸려드는 사람들을 독살해 버리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귀족 회장 부인과의 관계를 상기하자, 수치스러운 추억이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야수성은 증오스러운 것이지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야수성이 그대로의 모습대로 나타날 때, 우리는 정신 생활의 높이에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멸시할 수가 있다. 타락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그것은 본래의 자세이지만, 야수성이 겉치레만의 미적이고 시적인 감정의 껍질을 쓰고 우리들의 존경을 요구하게 되면, 우리는 이 동물적인 것을 신처럼 모시게 되고 매혹되어서, 선악의 구별조차 못하게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 된다.'

이제 네플류도프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지금 눈앞에 궁전과 위병과 성새와 강과 보트와 증권 거래소가 뚜렷이 보이듯이 똑똑해 보였다.

그리고 그 날 밤, 이 지상에는 이미 휴식을 주는 평온한 어둠은 없고, 다만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도 알 수 없는 흐릿하고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운 빛만이 남아 있듯이,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도 이미 휴식을 주는 무지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세상에서 귀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모두 하찮고 더러운 것이며, 눈부신 광채와 사치는 뭇사람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어, 벌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으로 버젓이 장식된 낡은 죄악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네플류도프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었고, 또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페테르부르크를 뒤덮고 있는 빛의 근원을 볼 수 없었듯이 그는 이들 모두를 계시해 준 빛의 근원을 볼 수 없었으며, 또 그 빛은 흐리고 불쾌하고 부자유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는 그 빛에 의해서 계시된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쁘기도 했거니와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