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07 1987. 12. 1 (화)
금년 마지막 달의 첫날이다.
일어난 새벽은 싸늘하다.
목욕한 상쾌함으로 앉아서 마태복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까지의 장엄한 드라마.
어제 PD성 대리로부터 늦은밤 전화.
일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육체적인 격돌이 있을것인지 참으로 걱정이다.
모든 주모세력들이 내 직속의 선각반에 몰려들 있으니, 과장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회유하고,다독거리고, 혹은 호통을 처 겁을 주어야 하나?
기도.
이끄소서. 함께 계셔 주소서.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이사야 6장-
우리주 나사렛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밤>
불안불안하며 위태위태한 듯 하였지만 무사무사한 하루.
그러나 녀석들은 끊임없이 신경을 쓰이게 하고 있다.
현장에 온 후로 내게 사색은 없어졌다.
독서량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은 현실과의 갈등뿐이다.
의식하는 절망은 의식치 못하는 절망보다 훨씬 건강한 것이다.
의식하는 절망쪽이 내 취향에 들어맞는 것이다.
길게 의식할수 있다는 것, 대하소설적으로 삶을 의식할수 있다는 것은 짧게, 하루단위의 엽편소설적으로 삶을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
나는 지금 엽편소설적인 절망을 노냥 의식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사색하라. 깊이 묵상하라.
그 사색으로 오늘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
하나님 내 아버지를 언제나 생각하는 것.
14908 1987. 12. 2 (수)
새벽기상.
몹씨 추운 날씨.
유리창에 성에가 가득 끼어있다.
면도기 소제, 발톱깎기, 구두닦기.. 찬송가 들으며.
목욕후 마태복음.
예수 부활하시다.
<마태 28장 16-20>
이것이 주님의 The Great Commission (지상명령) 이라면,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 16장 16절-
이것은 주님께 대한 The Great Confession (위대한 고백)이다.
6시. 짧은 기도드리고 출근준비 서두르자.
회사여. 회사여. 너 싫은 대상이여.
<밤>
현장은 거의 안정권의 분위기로 들어간 듯.
단순하기 그지없는 근로자들.
16인 대표를 향한 P이사의 서너시간에 걸친 호소가 작용한바 크다.
P이사의 헌신적인 노력은 너무나 튀는 것일지라도 평가절하 하여서는 안된다.
내일 기본공작반 교육시간에 나는 그들을 멋지게 설득하리라.
8월 분규의 추악함과 관리자들의 곤혹스러움을. 책임의 한계와 관용의 한계를.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회사라는 존재의미의 유물론적 당위성을.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하는 유물론적인 허무감을.
나는 선동가는 되지 못하지만 논리가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에 이르는 병'
진지한 철학가 키에르케고르.
실존적인 절망.
어느 세월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을 완독할수 있을까?
나의 시간. 나의 시간.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회사가 싫습니다.
그곳은 타인의 현장이지 결코 나의 현장이 아니올습니다.
내일 새벽 경건있으리라.
14909 1987. 12. 3 (목)
늦은 밤.
俊이는 아빠와 방을 같이 쓴다.
俊이 방이다.
俊이 방에는 책이 있다. 아빠가 읽던 책.
俊이 방에는 기도가 있다. 아빠가 드렸던 기도.
俊이 방에는 음악이 있다. 아빠가 들었던 음악.
俊이 방에는 졸음이 있다. 아빠가 잠들었던 아, 그 졸음.
그리고 俊이 방에는, 그래 꼭 소주 한잔이 있지.
그리고 지금말야. 俊이 방에는 俊이가 턴테이블에 걸어준 그 드볼작이 울리고 있지. 볼륨을 작게 해서 말야.
그러면서 저는 공문수학을 하는척 하지. 코딱지를 후비고 있는데 몇문제나 풀었을까?
꼭 있어야하는 소주 한잔.
꼭 있어야하는 俊이의 DJ.
꼭 있어야하는 俊이의 능청스러운 껌벅거림.
저 쪽 방의 엄마와 누나에게는 이제 베토벤을 먹여 줄라우?
베토벤을 엄마랑 누나랑 귀가득히 멕여주는거우.
지금 시나브로 취해가는 아빠의.
소나타 비창, 그 2악장을.
애잔함... 조금의 도시적 감각을... 커무니케이션의 서글픔... 그러다 결국.. 슬픔을...
나이 사십넘으면 어찌해야 한다더라?
에라이, 지천명이 아닌가.
무엇이 진실이냐. 무식한 놈들!
14910 1987. 12. 4 (금)
작취미성의 늦잠.
회사지각.
선각반 교육, 간곡한 연설.
JH수 HS곤 건은 신문과 방송에서 다소 떠들석.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장이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말하면 건설적인 비판이다.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한다면 고집쟁이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이다.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은 녀석이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순간 복잡한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러는거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내 좋은 성격의 한부분이다.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가!"
-인도속담-
14911 1987. 12. 5 (토)
취한 밤이여.
억지로 억지로 맺은 아우성.
아우성은 아우성이다.
많은 사람들의 차출.
노씨의 수영만 집회.
아예 조선공사는 문을 닫아버리고.
"바다로 다시 가련다. 저 호젓한 바다와 하늘을 찾아서.
내 바라는 것은 높직한 돛배하나, 길 가려줄 별 하나.
그리고 파도를 차는 키와 바람소리 펄럭이는 흰 돛.
바다 위의 뽀얀 안개, 먼 동트는 새벽뿐일세.
나는 다시 바다로 가련다. 달리는 바닷물이 부르는 소리.
거역못할 거센 부름. 맑은 목소리 쫓아서.
내 바라는 것은 흰구름 흐르고 바람이는 말.
흩날리는 물보라, 흩어지는 물거품.
그리고 갈매기떼 우짖는 소리뿐일세."
지금 베껴쓰는 이것은 누구의 시냐?
14912 1987. 12. 6 (일)
모처럼 쉬는 일요일.
그런데 아편과 같은 나태에의 함몰, 무위로움은 또한 환락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
여인의 모습.
아, 곤고한 몸이로다.
육체란 것은 어찌해 볼수 없는 덩어리 덩어리 죄덩어리.
지옥의 나락이 거기 있는데.
헤쳐 나올수 없는 늪.
14913 1987. 12. 7 (월)
치열한 대통령 선거전.
결코 두 김씨는 단일화하지 못하는가?
노씨가 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나?
두 김씨는 나정도의, 역사가 만들어 주는 당위성도 읽지 못하고 있다.
회사는 15일 노조 위원장 선거로 골치를 앓고 있다.
전접반의 MC수 가 급진 진보 세력으로서 제일 유력하다.
그의 제1의 공약은 JH수 , HS곤 의 구명이다.
어머니께 전화드리다.
울산 갔다 돌아오는 귀사길의 버스 차창밖으로 펼처진 초저녁의 들녁.
무슨 커다랗고 순한 짐승이 더운 입김을 식식거리며 달음질치는 환상이 보인다.
순하디 순한 짐승 한 마리.
뿜겨지는 그 짐승의 입김의 냄새는,
순하디 순한 냄새.
어머니의 젖냄새.
구수한 흙냄새.
내 조상들이 썩어서 섞인 내 산하의 냄새.
이리 저리 내닫는 짐승.
그 내닫음은 환희의 몸짓인가, 서러움인가.
나의 짐승.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 순해빠진 짐승.
소보다 덩치가 크고, 토끼의 눈보다 더 슬픈, 옛날 정능의 우리 메리보다 더 정다운.
나의 짐승.
황량한 내 영혼의 벌판 그 들녁을 식식거리며 쏘다니고 있다.
14914 1987. 12. 8 (화)
오랜만의 새벽 기도.
육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그것이 곧 죄의 터라는 것을 느낀다.
육신의 나약함이 죄입니까? 죄에서 비롯된 육신의 나약함입니까?
아내를 인도하소서. 아내를 구원하소서. 채찍을 가하여 아내를 구원하여 구원된 아내의 영혼이 아이들을 감화하고, 내 신앙도 함께 에스컬레이트 되어, 화목과 희락과 감사와 신뢰 넘치는 주님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어머니 살아계신 동안 모자의 관계를 새롭게 하소서. 어머니의 믿음과 기쁨이 되는 아들이게 하소서. 어머니가 신앙의 그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쁨 속에서 여생을 보낼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젊은 날의 어떤 음란한 꿈의 색깔에 짖눌려 온 밤을 회색 수면으로 만들어 버렸다.
불타는듯한 욕정의 엑스터시에 함몰코자하는 것은 고독하여서인가?
더욱 고독하고자 함인가?
영혼의 고독은 더욱 커다란 고통인데.
혼을 마비시켜 외로움을 잊어버리려는 정신적인 자살.
진정 절박한 고독은 바로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며, 향락이 지난후 엄습하는 그 고독이다.
고독이라면 절대 고독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고독을 체험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 분께 가까이 갈수 없을 것이다.
"네가 내 벗이 되려면 지금 네가 너의 고독을 푸는 재료로 삼고있는, 그 무화과 잎으로 엮은 옷들, 부모 처자 친구 재산 재주 권력 청춘 이 모든 것을 전부 벗어버리고 절대 고독의 함정에 까지 들어오라." -강원룡-
"아, 축복받은 나의 고독이여" -성 프란치스코-
14915 1987. 12. 9 (수)
어제의 음주로 인한 피곤한 하루 일과.
모이는 곳마다 선거이야기.
지역감정. 김대중을 지지하는 내게는 부산이라는 고장이 어찌보면 생경스럽기도 하다.
"하루중 좋은 일을 하는데 꾸물거리지 말라.
일은 많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대화 속에서 결코 남에게 불평하지 말라.
남을 비난하지 말고 늘 사랑을 베풀라.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지 말라.
늘 입을 무겁게 갖고 다른 사람에 대해 침묵하라.
자신의 충고나 의견이 무시될 때 불쾌하게 생각지 말라.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특권의식이나 유리한 위치에 놓지 말라.
어려운 사람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
언제나 치밀한 계획과 분석과 평가의식을 가지라.
자기비관, 자기변명, 자기과장을 피하라.
사람을 허물지 말고 세워주라.
비난하지 말고 덮어주라.
분명한 자기소신과 태도를 갖으라.
늘 기도 속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으라."
14916 1987. 12. 10 (목)
회색수면.
英이는 새벽처럼 나간다. 한참을 있어야 밝아질 어둠을 밟으며.
俊이의 몰골은 좋지가 않구나. 아픈 곳은 없다는데 비둘기 새끼마냥 투명해 보인다.
곤하게 잠자고 있는 모습이 가엾어 콧등이 시큰거린다.
俊아 건강해라. 바른 자세로.
잠시의 기도.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열정'이 흐르는 아침.
내게 열정은 있는가?
속물. 형편없는 스노비즘.
정말 내게 열정이 남아 있는가?
슬픈 질문.
14917 1987. 12. 11 (금)
잦은 음주.
뒷꽁무니 하혈.
선거분위기는 뜨겁게 달구어젔다.
첨예하기 그지없는 지역감정들, 폭력의 난무.
단일화는 가망없어 보이고,
노씨에게 패배하면 어찌하려고?
이 시대 이 땅에 지사는 없다.
14918 1987. 12. 12 (토)
새벽기상.
목욕후 불밝혀 책상 앞에 앉다.
소리 내어 갈라디아서 읽다.
기도.
이 불경건한 생활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쫓겨날까하는 두려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전신갑주를 취하여 굳건하게 세상의 시험과 유혹을 뿌리칠수 있는 능력의 간구.
아내의 회심, 내 아이들 바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아비와 어미가 캐리커추어로 뵈지 않기를. 부모의 해독이 있다면 그것에 오염되지 않기를. 어머니,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고결한 기쁨.
쏟아지는 눈물은 통회의 눈물인가.
개선되어야 한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은 내게 무언가, 개선을 위한 무언가, 행위를 시키실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갈 5장-
<밤>
모처럼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와 앉은 토요일 밤이다.
온종일 노동위원회에 제출할 구제신청에 대한 소견서 작성하다.
현업과장으로서 참 별걸 다하는 것이지만, 신랄하게 핵심을 도출시키는 내 문장실력을 인정받음은 꽤 괸찮은 것이다.
기탁이로부터 전화.
피차 적극적인 만남을 주선치 않는 소원함.
14919 1987. 12. 13 (일)
오전 회사나가다.
추운 날씨.
거리의 담벼락엔 온통 벽보의 축제다.
최후의 일전, 죽기살기다.
방관자의 마음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다.
음침하게 숨어서 싸늘하게 웃는 심리.
카오스를 꿈꾸는 병적인 심리상태, 가치의 전도, 기존 권위의 전복, 파국과 혼란의 상황..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서, 모두가 똑같이 벌거벗은채 다시 시작하여 보자는 듯한 심리.
나도 지금 마음 구석 어딘가에 이런 악마를 키우고 있음직하다.
<저녁>
형에게서 전화.
심상치 않은 어투.
다시 그것에 손대는 어머니, 그리고 담석의 병.
어머니... 목욕하며 울다.
형 만나러 가기전 英이 방으로 가져온 성경과 일기.
마음은 혼돈이다.
큰 충격후에 오는 가슴떨림의 혼돈이다.
하나님보다 크지만 하나님보다 작은 내 어머니.
겁내지 말라.
14920 1987. 12. 14 (월)
어머니, 참담한 내 어머니.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이여.
어머니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어머니의 정신을 깨끗케 하소서.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저 푸른 하늘은 암울하기만 하다.
14921 1987. 12. 15 (화)
새벽 기도.
아버지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정신을 마귀의 발톱에서 빼어 내어 주십시오. 어머니가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구원될때까지 어머니에게 생명을 주십시오. 나의 생명을 줄여 어머니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나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구원되었습니다.
눈물. 뜨거운 눈물.
어제밤 누운채 어둠 속에서 J는 흐느끼며 조용히 말하였다.
"어머니를 정말 사랑해."
아내의 잘못이 있다면 이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할수 있다.
이 한마디로 나는 아내의 모든 것을 사랑할수 있다.
아내는 나와 맺어지기까지, 그리고 그후로 줄곧 겪은 숱한 갈등속에서 어느덧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육정보다 더 진한 진실한 이해의 정, 이해한 후에 오는 연민의 정일 것이다.
아내는 어머니의 깊은 곳의 천진함을 볼줄 아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아내인지.
14922 1987. 12. 16 (수)
신임 노조위원장 MC수 의 모친상.
반여동까지 문상, 큰 절은 하지 아니한다.
입 속은 온통 혓바늘, 머릿속은 회색수면의 무거움.
어머니. 어머니를 줄곧 생각한다.
황량한 벌판.
어머니를 지워버린 세상은 황량한 초현실주의의 그림.
필사적으로 온유함과 안정을 유지하려는 마음의 슬픔이여.
무력함을 자꾸자꾸 반추하며 필사적으로 온유를 가장하는 마음의 고통이여.
며칠 전 보았던 환상은.
들녁을 달음질치는 순한 짐승.
식식거리며 뿜어대는 따뜻한 입김, 그 냄새.
슬픈 짐승- 그 짐승은 하늘과 땅까지 꽉 찰만큼 거대하고.
그 짐승은 그러나 이리저리 달음질하는데..
논 바닥에 발을 잠그고 서있은 사람은 행복하다.
어둠에 잠기는 넓은 하늘.
순한 짐승의 입김의 냄새와 더불어 밤을 지새면 내일은.
순한 짐승의 대지가 되는 것이다.
14923 1987. 12. 17 (목)
어제 보생의원 아랫방, 파파할머니 어머니 곁에서 종일 앉아 있다.
어머니의 절망을 조금이라도 엿볼수 있었는가. 자식들아.
어머니의 절망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나누어 같이 절망하여 줄줄 아는 효를 한번이라도 행하였는가. 자식들아.
어머니 곁에 말없이 앉아서 소주를 홀짝이고 돌아오니까.
이제 마음은 안온해 진다.
순한 짐승.
순한 짐승의 입김.
순하고 커다란 슬픈 짐승.
오늘 침례병원 입원키로.
노태우 선두.
양김씨는 역사앞에 책임을 저야한다.
형편없는 소인배들. 개새끼들이다. 두 놈은.
<밤>
어머니 입원하다.
침례병원 456호.
안정되는 듯한 어머니.
웃으시기도 한다.
"얘, 괜히 무섭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귀여운 내 어머니.
형, 형수, J. 함께 형이 사는 갈비 먹는다.
몇잔의 소주와.
우리 가족. 그 코이노니아.
훅훅 뿜어내는, 내 입가에 훅훅 뿜어내는 입김.
그 냄새, 썩지만 썩지 않는.
그 순하디 순한 짐승의 냄새.
내 꿈 속에서 그 짐승은 왜 나타나지 않을까.
그것은 내 내면의 불순함.
내 詩보다 나의 상상은 추악하다.
추악한 나는 예수님을 뵐수 있다.
나는 추악하기 때문에.
14925 1987. 12. 19 (토)
어머니는 한결 편해 보인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요 14장-
<밤>
어머니 입원실에서 돌아 온 늦은 밤.
이제 마음은 그지없이 편안하고, 내 방에는 지금 슈벨트의 피아노가 울리고 있고, 책상위에는 세병의 맥주가 놓여있다.
어머니- 머리는 염색을 하셔서 한결 젊어보이고, 탄력은 잃었지만 고집스러운듯 보이는 볼은 기품이 서려 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눈은 여전하고, 턱의 선과 틀이를 하신 입술근처는 여전히 우아하다.
내 어머니는 그 옛날, 이씨조선의 어느 때, 아니 고려의 어느 때, 아니다 그윽하고 영리함으로 가득찬 기원전의 페르시아의 어느 왕녀였는데, 그만 이 시대 이땅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슈베르트적이 아니다. 베토벤적도 아니다. 쇼팽쯤이 어머니의 아류는 될까?
단순한 아름다움, 남을 편케 해주려는 마음씀이 비록 순간적 기분파적일 뿐이더라도... 허영과 허세도 적당히, 체홉의 여인. 귀여운 여인.
이런 여성다운 속성의 품격은 쉽게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귀족, 어느나라의 왕녀.
그렇지만 어머니의 현실은 그 왕녀의 기억 때문에 가일층 혹독하였는가.
이동우- 나의 아버지, 6.25.. 고독과.. 그 무엇인가.. 어머니의 실존은.. 감히 누구라서 내 어머니의 절망을 이해할수 있을까.. 그것은 그 절망의 커다란 하나의 씨앗인 나로서는 아무리 알려고하여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왕녀의 절망은 왕녀가 아니고서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아는 척하는 까닭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모레 월요일, 09:30 수술예정.
체홉의 여인은 수술이 무섭다.
그래서 혈압이 올랐는가. 150의 90
어머니는 슈베르트적이 아니다. 어머니는 체홉.. 어머니는 그러나 슈베르트다.
이 논리는 가슴으로 알수 있겠는데.. 내 두뇌는 너무나 둔하다.
14926 1987. 12. 20 (일)
아이들과 어머니께.
다소 쓸쓸해 뵈다.
내일 수술이 어머니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모양이다.
媛이 내려오다.
오랜만에 두녀석 데리고 돼지갈비 뜯고.
오랜만에 책을 산다.
한기수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 헤르만 헷세수상집 '모든 삶은 아름다워라' 테드 휴즈 '시작법' 그리고 현대시 모음인 '시창작교실'
내일 09:30
어머니 수술. 초조하신 왕녀.
새벽 기도하리라. 나의 하나님.
새벽 달려가리라. 나의 순한 대지.
14927 1987. 12. 21 (월)
새벽기도.
치솟는 눈물.
모든 것은 유보다.
어머니 건강한 삶을 찾을때까지 모든 것은 일단 유보해 두는 것이다.
어머니는 깨셨겠지.
설레이실까. 아마 어린아이처럼 불안해 하시리라.
<밤>
아버지 나의 하나님은 나의 어머니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9시 15분에 실려가다. 12시 5분에 돌아오다.
70노인의 아름다운 내 엄마.
수술은 매우 성공적.
감사. 나의 나만의 하나님께 감사.
나만의 아내에게 감사.
나만의 형께 감사.
나만의 媛이에게 감사.
나만의 형수께 감사.
나만의 아이들에게 감사.
나만의 조카들에게 감사.
나만의 의사님들게 감사.
나만의 간호워들게 감사.
세상은 긍정이다. 나의 하나님은 내게 대하여 무한의 긍정이시다.
14928 1987. 12. 22 (화)
오늘은 회사 나가다.
어머니. 착한 어머니. 수술경과가 참으로 좋다.
그러나 상처의 통증, 쓸개부터 시작하여 사중의 절개를 하였으니 차라리 난도질이 아닌가?
오죽 아프시면 우실까? 허리는 또 그렇게 아프신 모양.
몇일만, 몇날 몇밤만 견뎌내세요.
하나님은 낫게 하시려고 고통을 주시는 거니까.
어머니 좀 주무세요. 의지로 주무세요.
작은 내 주먹에도 한줌으로 잡히는 어머니의 발.
媛이는 역시 하나 밖에 없는 딸.
주희와 배서방 다녀가다.
14929 1987. 12. 23 (수)
늦잠. 급한 준비.
좀 주무셨는가. 진통제는 끝까지 거부하셨을까. 목의 동맥을 통하여 들어가야 하는 수면제는?
참 부지런치도 못한 아들 놈이다.
아침 일찍 용태를 보고 출근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단 말가?
자기변명, 아, 지긋지긋한 자기합리화.
내가 어머니를 향한 정이란 것의 나약함과 불순물이 있음에 전율한다. 정녕 순수치 못한 내 영혼에 나는 때때로 절망한다.
그러나 어머니.
들판을 달음질하는 순하디 순한 짐승의 입김.
<밤>
어머니. 너무 좋으신 어머니.
어머니의 병상 곁은 이제 희망이 넘실거린다.
가슴으로부터 아랫배까지의 절개부위를 보여주시며 농담을 하는 어머니.
媛이와 웃으며 하라끼리, 셋부꾸 이야기도 하고.
媛아. 너의 애정이 크구나. 너는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의 딸. 네 곁에 있을적에 어머니는 제일 편안해 하시지 않니?
가름이로구나 정의 가름이로구나. 판소리 가락.
어머니. 媛아. 네가 고맙다. 네 영혼이 고맙다.
14930 1987. 12. 24 (목)
성탄전야.
어머니 너무 좋으시다.
누우셨지만 기분도 만점. 점심 저녁 미음도 잘 드시고.
크리스마스 이브.
날씨도 온화하다.
형.
어머니의 상처를 핥아주자. 어머니 영혼에 상처의 자욱이 있거든 우리 그것을 핥자.
긍정으로, 어머니의 과거는 긍정과 자랑으로 만들어 드리고, 미래는 보람과 소망의 기대로 가득 채워 드리자.
소리, 소리, 숨소리. 순한 짐승의 따뜻하면서도 힘찬 입김소리.
나의 하나님.
14931 1987. 12. 25 (금)
성탄절.
주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날.
아이들과 어머니께.
자신감, 행복의 모습이 어머니 표정에 가득.
주님의 빛이 머무는 언저리, 그곳에 어머니는 계신다.
회사 창립일, 제사에는 참석치 않는다.
14934 1987. 12. 28 (월)
새벽기상.
뒷꽁무니 하혈.
당분간 금주하자. 어머니 입원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걱정과 감사의 핑계로.
술의 분위기, 디오니소스적인 그 분위기. 술의 힘으로 감정은 고양되고.. 일종의 센티멘탈리즘.
그것은 아무리 종교적인 엑스터시의 가면을 쓸지라도 그 축제는 거짓이다.
회사에서의 유치한 하나의 인격.
유치하고 조야한 인격을 상대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 인격이 자신의 정체를 자각할수 있기를 원하지만, 이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고있다면 그 인격은 이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다.
14935 1987. 12. 29 (화)
새벽기상.
신앙공동체에 관한 잡다한 꿈.
그러나 회색수면은 아니었다.
목욕중 수돗물 급수중단에 화가 치밀다. 사소한 일상의 불편에도 나오는 욕지기.
나는 고작 이 꼴이다.
어둠 속에 불 밝혀 아가서 읽다.
너무 아름다운 사랑의 시. 관능적인 시.
이것은 무슨 알레고리인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알레고리인가?
어머니 오늘 2시 퇴원예정.
어제 본 어머니, 명랑하고 소녀처럼 발랄하다.
<밤>
깃털처럼 가뿐한 어머니 퇴원.
온 가족 더물어 저녁먹다. 물론 나는 소주, 다소 늦게 퇴근한 형도 역시 소주.
소녀처럼 즐거운 어머니, 나의 체홉.
J는 나보다 똑똑한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
어머니가 안고있는 빚의 규모는?
이 문제에 관하여 형과 얘기해야 한다.
내일부터 내가 만나야 할 사람.
김선생님.
그 분께 모든 얘기를 들어야 한다.
어머니의 가시. 그 가시는 이제 자식들이 뽑아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자식들이여.
14936 1987. 12. 30 (수)
다소 늦은 기상.
부채많은 노쇠한 어머니. 가슴 속 돌이 되어.
어쩔수 없이 절실하게 인정해야할 어머니의 늙고 무력함.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하는 두려움.
나의 어머니.
이제서야 비로소 어머니는 내가 필요하다.
치솟는 눈물. 이것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연인의 눈물이다.
김선생님, 가장 가까이서 어머니를 모셨던 사람, 그 분이 모든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14937 1987. 12. 31 (목)
1987년의 마지막 날 새벽.
에레미아 읽다.
기도.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를 이끌어 가시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
나보다 더욱 나를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를 나약하게 하지 마소서.
전과 같이 자신감 넘치는 강한 어머니가 되게 하소서.
어머니에게 풍요를 주소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식구들 되게 하시어 그 가족들 모여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풍요를 주소서. 형편없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식구들입니다.
아, 나의 하나님. 어머니를, 아내를, 아이들을, 형을, 媛이를... 하나님 나의아버지.
언어는 진부하다.
흐르는 눈물.
어머니는 나약하게 눈치보는 노파가 되어서는 안된다.
돌아가실 그 날까지 당당한 어머니로서 사셔야 한다.
이것은 유아적집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견디어낼수 없을 뿐이다. 상상만으로도.
흘러가는 세월.
무가치하게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다.
새해부터는 어머니 모시고 주일마다 교회 나가야지.
새해에는 나의 주인께서 내게 무슨 소명을 주시리라.
아내를 사랑하자. 아내를 진정 사랑하자.
올해의 이벤트들.
1) 기독교. 2) 수술과 육체적인 고통, 3) 현장, 4) 노사분규, 5) 정치적변혁, 6) 어머니
<밤>
정묘년의 마지막 밤.
오늘은 사라저서 과거가 되어 어느 기억속에 남아있으려는가.
넓은 운동장.
점점 짙어가는 땅거미.
어둠의 공간 속으로 잠겨들어가는 교사의 실루엣.
내 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일의 태양은 의미가 새롭거라.
우리 삶의 뜻이 새롭게 피어나라.
나의 존재주, 어머니의
존재주.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
그 분을 온 몸으로, 온 영혼을 기울여, 그 분을 느끼는 새해가 되기를.
치미는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