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69 1988. 2. 1 (월)
모처럼 4시 기상.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육체적인 죽음은 기독교인에게는 축복이다. 그러나 결코 죽을수 없는 병, 아무리 죽으려고 기를 써도 죽을수 없는 병. 그것은 절망이다. 절망의 세가지 유형- 첫째, 절망하여 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비본래적 절망), 둘째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셋째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고 하는 경우."
단독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신에게 무한한 관심을 갖는 믿음으로 홀로서는 한사람의 그리스도인.
아, 진실한 실존이란 이런 것일게다.
기독교적 영웅적인 정신.
"일부러 완전한 자기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 한 사람의 단독의 인간, 신 앞에 혼자서는 인간으로 거대한 노력을 하고 거대한 책임을 지면서 오직 혼자서 서는 이 단독자."
"절망은 병이다.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 기독교의 용어로는 죽음도 최대의 정신적 비참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러나 구제는 진실로 죽는데에, 죽어버리는데에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기도가 심리적인 것 순간적인 기분에 의한 것이 되지 말게 하소서.
일관성없는 중언부언이 되지 말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가 되게 하여 주소서.
저에게 인내가, 온유가, 사랑같은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한뼘의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겨우 한뼘짜리 벌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은총으로 주소서.
오래참음을, 사랑을, 정욕의 제어할수 있는 힘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에 상처입지 않는 의연함을, 하나님을 향한 용기를, 땅의 것들이 두렵지 않음을.
나의 하나님.
은총으로 내려 주소서.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진실이게 하소서. 어머니에게 진리에 소망을 둔 기쁨을, 아내에게 주님의 구원을, 여성다움의 온유함을, 아이들에게 굳센 의지와 지혜를 그리고 사랑을, 어머니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신실한 교통을 이루게.
은총으로 내려 주소서.
직장을. 직장의 상황을. 유치하며 조야한 인격들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소서.
연이어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벽, 농밀하고 고독한 나 홀로의 예배를 마치다.
14970 1988. 2. 2 (화)
5시 기상.
기도.
꿈. 난삽하기 짝이 없는 꿈.
산꼭대기의 설계부, 형도 설계부원이고, 젖엄마도 등장, 두축장, 길선이도 출연하였다.
일관된 스토리도 없고, 일관된 분위기도 없는 그야말로 슬랍스틱 코미디의 꿈이다.
젖엄마.
오래 잊고 있었던 젖엄마.
어머니는 작년 12월 13일, 혼미한 정신 속에서 어떤 환각을 보신 듯 "젖엄마가 죽었나 봐. 자꾸 젖엄마가 보여." 하셨었는데 정말 젖엄마가 죽었나?
젖엄마. 죽었걸랑 그 영감님이 무슨 연락이라도 하여 줄것인데..
건강해 보이던 그 영감님 울면서 '내 마누라!'하고 땅 속깊이 꽁꽁 묻었기라도 하였을 터이지...
14971 1988. 2. 3 (목)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 영하 8도.
이 곳 태림아파트 집팔리다. 1970만원.
내가 집 팔고 사는 것 무에 알랴.
이런 것들은 모두 모두 J의 몫.
잘 팔린 것이란다.
안락함이란 무엇일까?
기도 속에 간구하는 안락함이란 무엇일까? 그 찰라적인 심리상태에서 추구코자하는 그 안락함이란. 추구하는바 그 안락함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을까?
순간이며 영원한 것. 찰라이며 진리인 것.
한마디 한마디, 디테일한 동작의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이 진짜 인 것.
피카소가 무의식중에 긁적거린 낙서 하나가 불후의 명작이듯이.
이런 생각은 바보스러움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세계.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계.
치열하고 명확히 드러나 있는 리얼리즘의 세계.
묵사님등 신앙의 선배들을 따라 배울수 있는 변증의 세계.
"우리들은 자칫 지금이란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착가하고 있다. 그런 착각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성서적 사고방식의 한 특징이다. 한때, 한 시기라는 것은 반드시 끝난다는 관념, 그것이 성서적 사고방식이다."
아차, 변증의 세계는 아니다.
불교에서와 같이 추구하여 도달하는 깨달음이 있을수 없는 세계.
특히 구약의 세계는 안이한 깨달음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무서운 리얼리즘의 세계.
14972 1988. 2. 4 (목)
새벽.
싸늘.
요한1서, 기도.
<요한1서 1장 15-17>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옳다. 내게 있는 것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생의 자랑- 그러나 내게 이생의 자랑이 있는지. 혹 정신적자긍, 예술적자부 따위의 무엇이 남보다 다소 풍부하게 갖고 있을거라고 느끼는 이 교만도 이생의 자랑일 것.
英이 개학, 俊이 내일 개학.
"하나님.
오늘 오후 이렇게도 조용하고 평안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것을 이제 빠져나오게 해주신 것은 아닐까하고 연약한 저는 그것에 지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밤 더 큰 고통이 닥쳐 올지도 모릅니다. 허지만 주님, 그 어떤 경우라도 저와 함께 해 주세요. 그리스도의 속죄함과 부활을 마음으로부터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으로부터 찬양드리는 저의 기도를 받아 주세요. 내일 있을 이또 선생님의 수술에 같이 하여 주세요. 구와나 교회의 사랑하는 분들을 축복해 주세요. 남편과 아이들을, 주여 부탁하오니 돌보아 주세요. 하나님. 저는 참으로 당신께서 붙들어 주셔서 행복한 지상의 생애를 보낼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지금 저를 하늘나라의 내일로 데려가 주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모모꼬의 기도-
모모꼬는 다음 날 죽었다.
14973 1988. 2. 5 (금)
다소 늦은 기상.
설친 수면.
기억도 못하는 어지러운 꿈.
지끈거리는 머리를 목욕으로 다스린다.
꽁무니씨의 기분도 썩 좋지 않으시다.
정경화가 연주하는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마지막 악장을 틀어놓은채 기도.
직장의 온갖 거스름에 대하여 빛의 아들다운 의연함으로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정열과 보람을 갖고 일할수 있는 부서로의 전보를.
아내의 회심, 어머니의 기쁨.
아이들의 개학, 아이들에게 건강과 축복...
<밤>
봄날같이 따뜻한 날씨.
현장의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내게 도발한다.
J, 어머니께 다녀오다.
이사하는데 조금의 도움을 구하고자하는 희망.
그러나 어머니는 경제적인 무력함을 의식적으로 J에게 강조하신다는.
작은아들에게 대한 어떤....
그 소원함이 작은아들짜리에게는 가없는 슬픔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가 기뻐하실 차례, 그 무력함이 당신에서 비롯한 자손들에게 둘러쌓여, 당신의 과거의 삶을 긍정으로 반추하시고, 그것을 감사하고, 하나님 속에 기쁨의 여생을 사시게 할 순서이다.
J의 훌륭한 점, 삶을 대하는 방식과 그 태도는 나에 비하여 월등히 어른스럽고 현실적이다.
나는 어떠한가?
허황과 허영과 감상과 막연함과 무책임이 내 의식 속에는 녹아 있는 것이다.
14974 1988. 2. 6 (토)
늦은 기상.
목욕후 책상 불 밝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악흥의 순간'
기도.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존재주시여.
세상의 어긋남과 거스름이 내게 아무것도 아니게 하십시오.
하나님이외에 나를 변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고자 하오니 능력 주십시오.
어머니께 기쁨을, 당신의 생을 긍정하고 포옹하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평강을 어머니에게 끼처 주십시오.
남은 여생을 풍족하게 하여 주시고, 자긍을 잃지 않도록, 언제나 자식들 앞에 군림하는 어머니, 품위있는 어머니이게 하여 주십시오.
아내의 넓은 마음과 진지한 마음을 감사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게 하십시오.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혜를,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주십시오.
주십시오라고 아뢰고, 그 아룀으로 갖게 되는 소망있음.
<밤>
2월 부산의 바람은 겨울을 두배로 춥게 만든다.
피곤한 인격들과의 부대낌이 참으로 괴로운 하루 일과.
동은이 고려신학대학교 종교음악과 합격소식, 다행이다.
제 어머니와 동생을 굳건히 이끌어가는 의지, 낙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거라.
동은이에게는 제 어머니와 저의 돈독한 신앙이 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실 것.
자온이 언니, 성온이도 합격, 동의대 미술과, 이 또한 다행이다.
英의 플롯 레슨, 이제 집에서 하기로하였다고.
이제 내 일요일은 좀 자유롭지 못하려는가.
14975 1988. 2. 7 (일)
일요일 늦잠.
유리창에 성에가 잔득 끼었다.
유년 정능의 겨울-두껍게 낀 성에, 고드름, 손잡이를 잡으면 손이 쩍쩍 들어붙고, 얼어서 뜨거운 물을 부으며 한참 애를 써야 물이 올라오는 펌프..
마흔 한번째 생일.
생존, 연명이라는 단어, 생존, 연명... 그래 그저 생존하여 연명하고 있었을 뿐이다.
영혼은 죽어버린채 몸뚱이 심장만 뛰고 있는 상태의 생명.
이제 영혼은 소생하였는가.
내 존재주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수 있다는 이 존재.
감사와 빛... 내 삶이 빛이고 그 빛을 감사하기를.
아이들, 조성기의 소설과 두꺼운 노트 선물하여 준다.
'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俊-
'아버지 이제 술 담배 좀 끊으시고 배도 좀 불러들이세요. 건강하고 오래 오래 사세요.' -英-
또한 오늘은 교회가는 날이다.
J도 교회 나가고자 하는 뜻을 비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교회도 교회이지만 더욱 즐거운 사실은 어머니를 뵙고, 함께 그 그윽함에 잠기는 것이다.
14976 1988. 2. 8 (월)
어머니와 형수와 교회.
남성교회의 분위기는 썩 좋다.
더욱이 어머니, 형수, 英이가 함께하는 예배.
오후 형과 소주.
형과 형수는 어머니 묘자리를 빨리 구해 놓아야 한다고 어머니 면전에서 한참을 피력한다.
웃으시며 '화장하고 말지 뭐.' 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에 스치는 당혹감을 나는 읽는다.
경솔한 면이 있는 형네 가시버시.
어머니가 한결 가슴 아프게 닥아오는데.
그러나 형네와의 친교는 즐겁고 좋은 것이다.
<고후 2장 14-16>
14977 1988. 2. 9 (화)
4시 기상.
고린도 후서.
14978 1988. 2. 10 (수)
어제 대취.
정말 오래간만에 왕성규 내려오고.
박PS곤 , 조JN영 , 김KH근 과 함께 만나다.
모처럼 친구들과 묵은 회포를 푼 것이다.
예술론, 인생론, 그리고 더러운 현실...
날씨는 사뭇 풀렸다.
14979 1988. 2. 11 (목)
경건을 회복치 못한 하루.
곤한 몸뚱이, 더불어 곤한 영혼.
조선공사 다시 분규 조짐.
14980 1988. 2. 12 (금)
어제 성규, 아이들 선물 한아름 사들고 집에 오다.
술도 없이 안방에 J도 같이 앉아서 오랜시간 이런 저런 얘기들.
고급스런 취향의 성규, 그의 예술관도 고급이다.
외유내강의 성격, 왕성규는 나의 친구이다.
<밤>
간밤의 설친 수면으로 종일 빌빌, 은단 먹은 닭이 이렇다던가.
윤직장의 단순함과 그 단순함에 근거한 고집스런 논리.
이런 단순함의 완전무장의 무기 앞에서는 설득시킬 도리가 없다.
내가 아무리 그 건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여 내 딴에는 그를 설복할수 있다고 자신하는 언어를 구사하여도 난공불락 앞에서야 어찌하랴.
이내 나와 그의 대화는 언어의 카오스에 빠지고 만다.
그저 내 뜻만 대충 감득하였기를 바랄뿐이다.
현장- 선대공사중인 선박에 올라 빈 Accomodation 어느 구석에서 잠시 기도드린다,
올 구정은 닷새동안의 연휴.
그러나 16일은 숙직이고 17일 새벽에는 SB-333 진수이고 20일은 일직이다.
내일 새벽은 경건하리라.
14981 1988. 2. 13 (토)
새벽.
잡다한 꿈. 옴니버스의 슬랍스틱 영화. 무언가 초조로움의 분위기있는.
고린도후서 6,7장 소리내어 읽다.
기도. 울다.
기도가 나의 심리나 찰라의 감정에서 나온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께 합당한 언어가 되기를.
단순함을 주소서. 이 세상 복잡다단한 온갖 것들은 아버지의 그 단순함에 한방에 깨어질 것들이니 아버지의 그 단순함을 주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여 명료한 믿음을 주소서.
아버지와 얘기하는 이 조그만 방, 이 조그만 빛의 테두리에서의 이 기쁨이 너무나 좋습니다.
세상은 똥이랍니다.
마음 마음들을 움직여 주소서. 아내의 영혼에 작용하셔서 빛의 딸로 변케하는 은총 주소서. 인생의 도정을 함께 걸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피조물을 사랑하고, 존재 자체를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의미를 깨닫고, 그 덕목을 사모하고, 나와 얼굴 마주 웃으며 살아가게 하소서.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나를 움직여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을 대하는 순간, 경건에 온 영육을 푸욱 잠기고 있는 이 시간이 최상의 기쁨이니까 나의 모든 욕망과 열정이 다만 이 방향으로 가기를 안달하게 하소서.
아, 두서없고 거친 기도.
그러나 행복한 기도.
<밤>
토요일 밤이다.
일과는 그렇다치고 마음은 넉넉하다.
새벽의 기도는 행복하였다.
진로에다 진저에일 섞어서 책상위 불밝혀 앉다.
아이들은 아빠 술마시는 곁에 앉은뱅이 책상 펴 놓고 마주 앉아 스낵과자 씹으며 공문수학 공부중.
이 세 핏줄 주위를 흐르는 것은 음악, 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이다. 음악중에서 가장 행복한 선율. 이 음악 속에 추호의 갈등이 있느냐? 따뜻함, 여림, 생동감, 안온함... 가히 천국의 세계가 아니냐?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의 그 웅장함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이 소나타가 하나님적이다.
나는 정녕 이 작은 행복의 봄을 사랑한다.
부산하고도 영도 동삼동의 한 자그마한 방안에 흐르는 이 봄을 나는 정녕 사랑한다.
내일은 태종대라도 가볼까나. 수목의 냄새,바다.. 그 적요와 단순함.. 움트는 희망, 하늘을 나는 새의 지저귐, 그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충일감에 젖어... 아, 찬양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14982 1988. 2. 14 (일)
태종대는 가지 아니하다.
어제 밤의 봄은 내 마음 속의 봄이었지, 아직은 겨울이다.
현장들렀다가 어머니께.
어머니 감기 잔득 드셔서 교회 빠지시고 英이와 둘이서 예배보다.
설교 '자랑할것이 없는 사람'
-갈라디아서 6장 11-18-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마라.
예수의 흔적, 예수의 흔적..
내게도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어딘가 심령 깊숙한 곳.
아아, 예수의 흔적,
14983 1988. 2. 15 (월)
잡다한 꿈에서 깨어난 시각은 벌써 6시.
외갓집- 외숙모님, 작은누나,규정이.. 그리고 자하문밖 어느 골목.
기억창고 어느 서랍 속에 숨어있다가 어제밤 끄집어 냈을까?
주님의 기도.
음주치 않은 다음날의 아침은 뱃속이 이토록 편한데..
조성기의 소설 '베데스다'
마귀의 영은 존재는데 신비신앙은 어떤 형태의 것인지.
조용기 목사는 과연 영적인 능력 충만한 신비주의 속 사람인가.
전에 대충 읽어보았던 메릴 F 운거의 책을 다시 읽어 보자.
또 소설 속에 소개되었던 책, 웟치만니 '영에 속한 사람들' 도.
푸르스름하게 사물의 윤곽이 깨어나 닥아오는 여명.
봄은 멀지 않다.
<밤>
오래참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에 거스리는 현상을 참는 것?
거스리는 것들은 육체의 질고나 자존심의 상처,좌절, 부자유, 거짓....
오래참음의 대상은 이런 것들 뿐일까?
그 속에는 즐거움까지도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현상이 만들어내는 만족, 기쁨, 환호작약....
어떠한 현상의 그것이 환희이건 비애이건 괴로움이건.
곧 궁극적인 가치의 본령은 그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
영원을 꿈꾸는 자만의 최상의 덕목.
오래참음...
나의 순간의 현상을 참아내는 덕목은 지극히 모자르다.
14984 1988. 2. 16 (화)
3시30분 기상.
화장실에서 말콤엑스 읽다.
말콤 엑스.
언제인지 반역자의 금기된 은밀한 이름처럼 내 귀에 들려온 이름이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지휘한 과격분자로서 나와 같은 시대를 살다 살해당한 한 흑인.
미상불 흥미롭다.
책상 불밝혀 앉는다.
고린도후서와 기도.
14986 1988. 2. 18 (목)
설날.
이제 며칠간의 휴무.
밤새 꿈, 말콤엑스 등장, 조연은 무하마드 알리였나?
요즘 말콤엑스가 자꾸 사념 속에 침범한다.
흡사 어둠의 자식들의 이동철 미국판인 느낌인데.
기도.
명절,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인 가족들이 어머니의 기쁨이게 하소서.
14987 1988. 2. 19 (금)
어제 취하다.
형은 진주로 전보.
가야 속모네와 아이들 윷놀이, 어머니와 또 한패 둘러앉아 고스톱.
어머니 주위에 감도는 어딘가 휑한 분위기는 어머니의 나약해 진 마음에서일까?
오늘 세수도 생략, TV와 책읽기.
말콤엑스 상권 완독, 하권은 구할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내일쯤 헌책방을 뒤져보려고.
박영한 '머나먼 쏭바강'
의식있는 한 병사의 월남 참전기.. 진부한 종류의 소설은 아니다.
14988 1988. 2. 20 (토)
새벽.
경건회복.
고린도후서 11장부터 13장까지 소리내어 읽는다.
기도.
좀 울다.
<밤>
연휴중의 일직근무.
잠시 나가 책 산다.
안드레 드보 '생덱쥐뻬리 평전'
에리히 프롬 '소유와 존재'
부흥목사 15인의 간증수기.
책상 앞 앉아서 소주에 토닉워터 타서 홀짝이면서 간증수기 읽는다.
예수님께 닥아가는 그 순박한 목사님들의 신비한 체험에 정신을 맡기며 상헌이 너도 단순하여 저라.
14990 1988. 2. 22 (월)
어제 英이와 어머니께.
어머니는 요즘 교회를 잘 빼 먹으신다.
선여이와 둘이 참석하여 예배.
그리고 나는 형 사무실 직원 모는 차를 타고 형의 근무지 진주를 다녀온다.
진주의 자동차 영업소-
그 영업소의 분위기는 나의 직장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비가 된다.
그러나 그곳 역시 자동차 팔아먹는 곳인데 내가 감득 못할 어려움이 왜 없으랴.
진주에서 형과 몇병의 맥주 마시고, 연휴 끝머리 복잡한 고속버스 타고 늦은 시각 돌아온다.
귀성차량으로 길이 얼마나 막히던지.
연휴는 끝나고, 오늘부터 다시 그 진부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찬송이 울려 퍼지는 아침, 나의 방.
아이들은 오늘부터 봄방학.
<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내 방 책상 앞.
俊이와 오랜만에 마주 손잡고 기도하다.
연이어 홀로 기도.
기도중 문득 느껴지는 감정 한줄기.
술을 끊어라 하는.
'상헌아. 술을 마시지 말거라. 대신 내가 내리는 생수를 마시려무나.'
비어져 나오는 눈물이 있는데...
14991 1988. 2. 23 (화)
희망과 기쁨.
英이 1등.
俊이 모두 秀.
한학년들 마친 내 새끼들.
14992 1988. 2. 24 (수)
돌아 와 책상 앞에 앉은 밤.
온유함으로 하루를 견뎌 냄을 감사.
온유한 상황을 주심에 감사.
음주의 욕망을 눌러주심에 감사.
아내의 상냥함을 감사.
쉬바이처를 생각하라.
인간의 정신은 상승하는 존재이다.
상승하기를 포기하는 정신은 곧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추구하라.
제5공화국이 저문다.
14993 1988. 2. 25 (목)
제6공화국 출범, 휴일이다.
노태우씨의 취임사는 참으로 이상론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좋아 보인다.
모든 국민이 능동적으로 미래 결정에 참여할수 있는 나라, 거짓이 없는 나라, 자부심이 사는 나라, 능력이 숨김없이 발현되는 나라, 삶에 보람을 가질수 있는 나라, 평등이 보장된 나라...
그대로만 성실하게 이행된다면 과거야 어떠하든 노태우씨는 훌륭한 사람이다.
김성동 소설 '오막살이 집한채'
피빛 놀과 같은 恨.
그 한이라는 것은 개인의 경험적인 어떤 색깔이라기보다는, 존재 근원에 대한 그리움같은 것이나 아닐까?
14995 1988. 2. 27 (토)
민방위 훈련을 위하여 일찍 깨어 난 아침.
날씨는 무척이나 따뜻하다.
새벽의 냄새.
히브리서 4장.
14997 1988. 2. 29 (월)
며칠째 자의적인 불경건.
영혼의 영토에서 의도적으로 도망쳐 나온 꼴.
어제 일요일 교회도 빠지고.
김철수 끌고 소주, 집에 데려 와 다시 맥주 마신다.
몇 개의 아포리즘, 기지에 찬.
'한가함이란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는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여가가 생겼다는 것이다.'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보다 멀리 간다.'
'엄마가 나에게 마이클이라고 이름 지어주길 참 잘했어. 학교에 가면 애들이 모두 날 마이클이라고 부르거든'
'어째서 돈주고 산 크리스탈은 잘 깨지는데, 주유소에서 공짜로 준 유리컵은 십년이 가도록 멀쩡한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윙- 대는 모기소리만큼 그토록 작은 부피에 심술과 적의를 응집시킨 것은 없다'
잔득 흐린 월요일 아침.
아득한 회사.
그 현장에서의 하루 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