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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권 (8)

카지모도 2022. 9. 1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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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서방이 주삼의 안해에게 잔생이 곤욕을 당하고는 뒤를 따라올 용기가 없어

졌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길 옆 풀밭에 주저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멀리 가는 주삼의 내외를 바라보며 쓴입맛을 다시기도 하였

다. 그러나 김서방은 열번 고쳐 내쫓긴다 하여도 갈 데는 주삼의 집뿐이라 무슨

별 생각이 있었으랴. 봉단이를 가서 보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야겠다, 또 주팔

이를 만나보고 신세 조처를 의논해야겠다, 이리 생각하고 몸을 일어서 주삼의

내외를 멀찍이 따라왔다.

주삼의 집에서 활 두서너 바탕이 착실히 되는 곳까지 주팔이가 나오다가 형과

형수를 만나게 되었다. 주팔이는 마침 형의 집에를 왔다가 혼자 울기만 하고 있

는 봉단에게 대강 사정을 듣고 향굣말을 향하여 오던 것이다. “형님 오시는구

려.” 반갑게 형에게로 쫓아오니 형은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 형수는 내달으

며 “사람이 까닭없이 경을 쳐도 분수가 있지 않수. 매 열 개에 헐장한 개 없습

디다. 바깥에서 매질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람이 치가 떨려 어디 견디겠습디까?

도집강인지 부집강인지 그 늙은 녀석이 무슨 원수요? 물건은 그저 먹고 사람은

초주검을 시키니 도대체 사위 하나 망한 놈을 얻었다가 죽을 봉변 다 하오그려.

”남은 말할 틈이 없도록 혼자 길게 떠들었다. 주팔이가 없는 틈을 간신히 얻어

가지고 “김서방은 어디 있습니까?” “쫓아버렸소.” “쫓다니요?” “그럼 그

자식을 그냥 둬요?” “그럴 수야 있습니까.”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이후

에 그 형수의 긴 사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럴 수라니요? 그 자식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고 참기도 많이 했소. 이런

일이 없더라도 인제는 더 참지 못하겠소. 아재 탓하는 게 아니지만 사내답게 생

겼느니, 사위 재목으론 더 고를 수 없느니 하던 그 자식이 허울뿐인 하눌타린

줄이야 누가 알았소. 그런 망할 게으름뱅이가 천하에 또어디 있겠소. 일을 저지

르지 않는대도 첫째 게으름뱅이가 집에 두고 먹이고 입히지 못하겠소. 그 중에

그 자식이 봉단이하고 같이 간다지요. 사람이 귓구멍이 막혀 죽겠지. 그래 귀싸

대기를 한번 훑어 주었더니 아무 말도 못합디다. 우리가 오다가 돌아보니까 길

가에 주저앉았습디다. 만일에 그 자식이 또 좇아와서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

리뼉다귀를 통겨줄 작정이요.” 이때껏 듣고만 있던 주삼이가 “고만 집으로 가

세나. 가서 이야기하자.” 안해의 말을 가로막고 앞서서 몇 걸음 나갈 즈음에 입

맛만 다시고 섰던 주팔이가 “여보 형님, 먼저 가시지요. 나는 이따가 오리다.”

뒤에 떨어지며 “아주머니 다시 생각을 잘해 보시지요. 그리고 차차 이야기하십

시다.” 형수에게 말하니 형수는 “다시 생각할 일이 다 따로 있지요.” 머리를

뒤흔들며 형의 뒤를 따라갔다.

주팔이는 김서방의 일이 궁금하여 찾아가 보려고 뒤에 떨어진 것이다. 나오던

길로 얼마 더 나오지 아니하여 풀기없이 걸어오는 김서방을 만났다. 김서방에게

전후 곡절을 자세히 듣고 나서 “공으로 동고리를 빼앗으려는 자에게 쌀 말을

하였으니 그럼 풍파가 아니 날 리 없지. 대체 양반이란 것이 행세가 양반이라야

지 날도적들이 양반은 무슨 양반일꼬? 그라나 도집강 같은 것은 부족괘치야. 날

도적의 소굴은 서울이지그려.” 주팔이가 김서방의 소조를 가없게 여기는 끝에

양반 논란이 나온 것이건만, 서울 양반인 이교리에게는 이 역시 소조라 이교리

인 김서방이 주팔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며 간신히 “그렇지요.” 대답하고

“그런데 내 일은 어찌하여야 좋을까요?” 자가의 앞일을 의논하니 주팔이가 입

맛을 다시며 “그렇지 않아도 지금 형수를 보고 말을 하였지만, 형수의 성미가

성미라 얼른 말을 들을 것 같지 아니하니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지내 보소. 어떻

게 하든지 말썽없이 되겠지.” 말하여 김서방을 데리고 오다가 “봉단이를 보려

다간 형수 손에 큰코다치기 쉬울 게니 형님 집으로 올 생각 말고 바로 우리게로

내려가소. 나는 잠깐 다녀갈 것이니.” 말하여 김서방은 자기 집으로 보내고 혼

자 형의 집에 와서 집안이 너무 조용한 것을 괴상히 생각하면서 삽작문 안을 들

어섰다.

 

제 6장 축출

 

1

주팔이가 윗방 문을 열고 본즉 형은 누워 있고 형수는 방을 훔친다. “인제

오시우?” 인사하는 형수에게 “네.” 대답하고 “봉단이는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 형수는 머리를 흔들며 “난 모르지요. 그년이 이 방을 훔치다가 말고 새

촘하고 나가더니 다시는 들어오지 아니하니까 어디 가서 눈물을 짜내는지도 모

르지요.” “아주머니가 김서방의 말을 하신 게구려?” “방을 훔치면서 그는

왜 아니오나요 묻기에 쫓아버렸다고 말했더니 맹랑스럽게 걸레를 톡 내던지고

나갑디다.” 주팔이는 형수와 말하던 것을 그치고 봉단이를 찾으려고 집 안을

둘러보다가 아랫방 문을 와서 열었다.

봉단이는 머리를 싸고 누워서 문 여는 소리가 나도 꼼짝달싹 아니하다가 “이

애 봉단아!” 부르는 주팔의 목소리를 듣고야 겨우 일어 앉는데, 얼굴에는 눈물

흔적이 있고 얹은머리는 풀어져 내려왔다. 주팔이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봉단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걷어 얹으며 아랫목 자리를 주팔에게 비켜 주고 삼촌

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는 것같이 주팔이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주팔이가

김서방에 들은 전후사실을 이야기하고 “김서방은 죄도 없이 도집강에게 매를

맞고 죄도 없이 네 어머니께 내쫓겼다. 그 사람의 일도 딱하고 가엾지만 대체

너는 어찌 할 셈이냐?” 조카딸의 의견을 물으니 봉단이는 눈물이 맺거니 듣거

니 하며 “지금 그가 어디 있습니까? 바깥에 왔습니까?” 김서방의 있는 데를

알려고 묻는다. 주팔이는 그때 마침 바깥에서 형수의 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

그 사람도 사람이지 여기 오려고 하겠느냐? 정히 갈 데가 없으면 서울로라도 도

루 가겠지.” 봉단이 묻는 말에 동이 닿을 듯한 대답을 하고서 한번 기침을 하

더니 앞창문을 열고 가래를 배앝다가 마당에서 무슨 치임개질을 하는 체하고 있

는 형수를 보고 “아주머니!” 불러서 “이리 오시지요.”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

하였다. “언제 들어가고 말고 할 새가 있어요. 저녁을 해야지.” “벌써 저녁할

때가 되었나요? 나도 집에 좀 가봐야겠군.” 하며 주팔이는 일어서서 형수에게

들리지 아니할 만큼 나직이 “아직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있으라고 했다. 말썽없

게 되고 안 되기가 제일 첫째 네게 달렸어.”말끝을 힘지게 맺고 봉단이를 내려

다보았다. 봉단이는 왼손을 벌려서 엄지가락과 장가락으로 관자놀이께를 누르니

자연히 손바닥으로 얼굴이 가리어진다. 그리하고 나서 “저를 만나보기 전엔 어

디로든지 가지 말라고 해주세요.” 삼촌에게 부탁하니 “그것은 내게 부탁도 할

것이 없다. 그 사람 역시 너를 보기 전엔 어디로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라.”

주팔이는 말이 끝난 뒤에 멀찍이 서 있는 형수에게도 들릴 만큼 “사람은 몸 성

한 것이 제일이야. 몸조심해라.” 봉단에게 이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에 봉단이는 밥짓는 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밥 먹는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아랫방에 누워 있었다. 저녁이 끝나고 어두컴컴한 뒤에 그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이애 자니?” 하며 봉단의 몸을 흔들다가 자지 않는 표가 나

니까 “어디가 아프냐?” 하고 머리를 짚어보면서 “어지간만 하거든 일어 앉아

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말하니 봉단이는 대답이 없이 일어 앉았다.

봉단 어머니가 등잔불을 켜놓고 앉아서 딸을 타이른다.“게으름뱅이를 내쫓은

것이 부모라도 야속하냐? 그 자식의 지저구니로 말하면 백번 내쫓아도 마땅하고

내쫓은 것이 조금 과하다고 하더라도 이왕 그렇게 된 것을 다시 불러들일 수가

어디있니? 쏟아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단다. 너같이 소견이 넉넉한 애가

그게야 벌써 잘 알고 있을 테지. 게으름뱅이 생각 마라. 너의 삼촌은 나더러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만 다시 생각할 것이 무어냐? 천하에 사내가 게으름

뱅이 하나뿐이란 말이냐? 게으름뱅이는 질동이니까 깨져도 아깝지 않다. 놋동이

사위를 얻어주마. 나이도 알맞고 난밖 사람이 아닌 서방이 좋지 않겠느냐? 서방

과 손그릇은 손때 먹일 탓이란다. 정만 들이고 보면 첫서방이나 둘째 서방이나

매일반인 법이다.” 봉단이가 잘 듣지도 아니하는 말을 끝이 없이 지껄이는 판

에 주삼이가 어느틈에 일어나서 "무슨 이야기들이야?“ 하며 창문을 열고 들어

섰다.

 

2

주삼이가 ‘아이구’ 하고 거북살스럽게 앉더니 안해와 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딸을보고 “너의 어머니 하는 일이 종시 생각이 부족해. 게으름뱅이

는 내쫓아도 좋지마는 너더러 말이나 한번 할 것인데.” 하고 잠깐 안해를 돌아

보며 “홧김에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지만.” 뒤를 두고 말을 이어 “말도 없이

한 것이 너는 야속할 터이지. 그렇지만 이왕 그렇게 된 일이니 네가 마음을 삭

여라.”

점잖게 말하는 폼이 미리 말만 하였다면, 봉단이가 저녁밥을 안먹을 까닭이

없을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봉단이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 따름이요, 주삼의 안해는 봉단에게 향하여 “부모 자식 사이에 간격이

있을 턱이 있니? 야속하거든 야속하다고 말을 해라. 너도 어미 애비가 하루 편

히 못 지내고 죽도록 고생받이만 하게 되면 마음이 원통할 터이지?” 하고 잠깐

남편을 돌아보며 “서방과 무쇠솥은 새것이 언짢다지만 너만한 인물이면 서방

없이 늙겠느냐? 또 감영 관비로 들어가도 게으름뱅이 데릴사위보다는 나을 게

다. 눈초리가 처진 감사나 만나게 되면 남부럽지 않게 호강을 할 것이요, 예방비

장의 눈에 들면 음식을 노놔 먹을 게니 너도 좋고 우리도 좋지...” 봉단이가 듣

다 듣다 듣기가 싫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가 아파서 누워야겠어요.” 하고

앉았던 자리에 쓰러져 낯을 벽에 대고 누우니 뒤에 앉은 주삼이 내외는 서로 얼

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삼의 안해가 괘씸한 일을 억지로 참는 듯이 ‘응’하고

남편과 함께 일어서 나갔다.

가을 긴긴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아침때가 되었다. 주삼이 내외는 아침밥을

먹는데 봉단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제 아랫방에 누운 채로 오늘도

일어나 나오지 아니한 것이다. 주삼이는 딸이 굶는 것을 걱정하여 “조죽이라도

쑤어서 그 애를 먹게 하지.” 말하였으나 그 안해는 자애 많은 어머니가 도리어

범범한 사나이 같이 “몇 끼나 굶나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보지. 제가 좋아 굶는

것을 누가 성가시게 먹어라 먹어라 한단 말이오.”

하고 자기 먹을 밥만 먹고 있다.

아침때가 훨씬 지난 뒤에 봉단이는 그 부모가 방에 들어앉은 틈을 타서 슬그

머니 집에서 빠져나와 아랫말로 내려왔다. 여러 끼를 굶은 까닭이든지 또는 너

무 속을 상한 까닭이든지 머리가 내둘리고 걸음이 잘 걸리지 아니하여 평일 같

으면 한두 번 왔다갔다 할 만한 동안에 간신히 주팔의 집에를 당도하게 되었다.

이때 김서방은 주팔이와 같이 뜰 위에 놓인 들마루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중에, 삽작문께 들어서는 해쓱한 봉단의 얼굴을 보고 벌떡 일어섰

다.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박힌 듯이 서서 있고 주팔이는 뜰 아래도 쫓아내려가

서 “너 오느냐?” 하며 비실거리는 봉단을 붙들고 올라왔다.

“여기 좀 앉으려무나.” 들마루에 앉히려고 하니 봉단이는 고개를 흔들어 싫

다 하고 숙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팔의 안해는 나이가 주팔이보다 7년 위일

뿐이 아니라 하나 기르지 못하는 여러 번 아이 낳기에 사람이 곯아서 봉단의 어

머니보다도 더 늙어 보이고, 거기다가 병객이라 조만한 일이 아니면 꿈쩍거리지

아니하고 방에 들어앉았는 사람이다. 질녀의 몇 끼 굶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

서야 몸이 부지하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바깥으로 나와 한참 꾸물거리어서 되

지 않은 조죽 한 그릇을 쑤어 가지고 들어왔다.

봉단이는 죽을 먹은 뒤에 “작은어머니, 나를 좀 눕게 해주세요.” 하여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주팔이가 김서방과 같이 방으로 들어오매 봉단이가 일어 앉는

데, 앉아 있는 봉단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고 서 있는 김서방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하룻밤이 십 년 같더냐? 봉단이 너는 여자라 연약한 심장에 눈물

흘리기 쉽지마는, 김서방 자네는 늠름한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다니 남보기 창피

치 아니한가.” 주팔이가 소리를 높여 웃으며 손으로 김서방의 어깨를 치니 김

서방은 겸연쩍은 것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으면서 “누가 눈물을 흘려. 실없은

소리 고만두어.” 하며 앉을까 말까 주저하는데 주팔이가 그 안해를 눈짓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봉단이를 내려보며 “만일 아주머니가 아시고 쫓아오신다면 나

도 난처하거니와 너의 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조금만 쉬어가지고 올라가게 하

여라.” 말하고 다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십년적회를 잠시라도 풀어보지.” 하

고 웃으면서 자기 역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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