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 뒤로 돌이는 삭불이만 보면 “색시 선 좀 보러 갑시다.” “어느 날 양주
가시려우?” 조르기도 하고 다지기도 하는데 삭불이는 “아따, 틈이 나지 않네
그려.” “일간 가도록 해보세.” 핑계도 하고 미루기도 하여 그럭저럭 십여 일
이 지났다. 이 말이 어떻게 이승지 귀에 들어가서 어느 날 이승지가 삭불이를
불러 세우고 “네가 돌이 장가를 들여 준다고 같이 선보러 가자구 했다더구나?
가자고 했거든 얼른 갈 것이지, 무슨 일이 있어서 틈이 없느니 있느니 하고 내
일 모레 미루기만 한단 말이냐? 양주가 멀지도 아니한 곳이니 속히 한번 갔다오
너라.” 하고 준절히 일러서 삭불이는 다시 핑계도 못하고 미루지도 못하게 되
었다. 삭불이는 그날로 돌이에게 와서 내일은 정말 떠나자고 말하여 두고 이튼
날 식전에 주팔의 집에서 이른 아침을 얻어 먹고 돌이를 데리고 양주길을 떠났
다.
양주읍내에는 서울서 오십여 리 길이라 삭불이와 돌이가 노량으로 길을 걸어
다락원 삼십 리 와서 점심참을 대고 해가 높다랗게 있을 때 양주읍을 돌어왔다.
피선이의 집을 찾는데 포주 두 군데에 선이의 포주가 큰 것이라 두 번도 묻지
않고 찾아오게 되었다.
삭불이가 문간에 들어서서 “작대기 집에 있나?” 하고 소리를 쳤다. 허여멀
겋게 생긴 얼굴에 새까만 수염이 돋보이는 사나이가 열리어 있는 되창문으로 내
다보더니 “나는 누구시라고!” 하며 짚신을 미처 다 꿰지 못하고 뛰어 나왔다.
이 사람이 피선이다. 선이가 삭불이를 보고 “이거 왠일이오? 무슨 볼일이 있어
왔었소?” 하고 묻는 품이 삭불이가 전위하여 찾아온 줄로 알지 아니하는 모양
이라 삭불이가 선이의 묻는 대로 “무어 조그만 볼일이야. 이왕 온 길이기에 좀
찾아보려고 들렀어.” 하고 웃으니 선이는 큰 키를 구부슴하고 삭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륙 년 동안 대단히 노창해졌소그려.” 하고 뒤미쳐 말을 이어서
“반갑소. 좀 들어앉아서 이야기합시다.” 하더니 고개를 안으로 돌리고 “이애
아가, 안방 좀 정하게 치워라. 서울 손님 오셨다.” 하고 다시 돌이켜 삭불을 향
할때에 삭불이가 “동행 하나가 있는데 같이 들어가도 좋겠지?” 하고 물으니
선이는 선뜻 “좋고 말고.” 하고 문밖에 섰는 돌이를 가르키며 “저기 섰는 총
각이오?” 하고 묻고야 삭불이가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는 돌이를 향하여
“총각 이리 들어오.” 하며 손을 쳤다.
이리하여 주인 손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데 애기가 안방을 치워놓고 마루
로 나오며 어떤 손이 들어오나 하고 바라보다가 총각 하나가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얼른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얼른이라 하여도
돌이의 볼 동안이야 없었으랴. 돌이는 들어오면서 눈을 놓아 살피던 차이라 애
기의 얼굴을 보았고 애기의 옆태를 보았고 또 애기의 뒤태를 보았다. 잠깐 동
안에 많이 보았다. 얼굴 바탕이 조금 갸름한 듯한데 이맛전은 반듯하고 눈은 속
이 배어 보이나 눈찌가 곱고 코는 파고 안친 것 같은데 콧날은 오똑하고 입은
자그마하고도 나부죽하고 턱은 밭았다. 살쩍은 그린 것 같고 머리는 삼단 같다.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모두 두말할 것이 없이 어여쁘다. 돌이는 첫 눈에 마
음이 가득하였다.
봉단이와 같이 복성스럽지는 아니하나 이쁘기로만은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직 머리를 늘인 것이 돌이 맘에 든든하였다. 세 사람이 방
에 들어와 앉은 뒤에 선이와 삭불이가 서로 지금 지내는 형편을 이야기하다가
삭불이가 “애기 어머니 어디 갔나?” 물으니 선이는 “장날 팔다 남은 고기를
가지고 나간 모양이오. 얼마 아니 있으면 오겠지요. 김서방 말을 나보다도 자주
하는 사람이라 여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오.” 하고 말한 뒤에 “전에 우리가
한집안 식구같이 지냈으니까...” 하고 서울서 지내던 이야기하려는데 삭불이는
거북살스럽게 앉은 돌이를 바라보며 “좀 편히 앉게그려.” 말하여 선이의 이야
기를 가로막으니 선이도 “왜 편히 앉지 그러우.” 하고 돌이를 보고 말하였다.
제9장 두집안
1
선이는 돌이가 편히 앉는 것을 보고 다시 삭불을 향하여 “요지막도 한선달님
생각이 가끔 납디다.” 하고 한치봉의 말을 꺼내니 삭불이가 “그렇겠지 죽은
사람은 죽고 사는 사람은 살고 늙은 사람은 늙고 자라는 사람은 자라는 것이 이
세상이니까.” 하고 될 듯 말 듯한 말을 늘어놓아서 또 선이의 말을 가로막고
“애기야말로 몰라보게 자랐어. 올에 열 몇 살인가?” 하고 말을 돌리니 “열여
덟 살이오. 아차, 잊었소. 와서 보이랄걸!” 하고 건넌방을 향햐여 “아가, 아가!
” 하고 부르다가 돌이를 한번 흘끗 보고 조금 거북한 눈치를 보이었다.
삭불이가 장난의 말로 “여보게 임도령, 남의 집 색시를 앉아 보기가 면난하
거든 밖으로 나가시게.” 하고 하하 소리를 내서 웃으니 선이는 정말로 듣고 “
별소리를 다하오. 관계없어. 나가기는 어디를 나가?” 하면서도 말이 이에 물이
었다 나오는 것을 보면 맘에는 신통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돌이는 김서방이
장난의 말을 하거나 말거나 주인이 신통히 여기거나 말거나 색시를 가까이 보게
되는 것만 다행하게 여기어 아무 소리를 아니하고 앉아 있었다.
애기가 그 아버지에게 불리어 건너오는데 안방 외쪽문 밖에 와서 주저주저하
니 선이가 되창으로 기웃이 내다보며 “어서 들어와서 이 어른께 뵈어라.” 하
고 재촉하여 애기가 외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서 삭불이를 향하여 절하는데,
그 절이 서울 절과 달라서 두 팔은 무릎 밖으로 벌어지고 궁둥이는 들리고 머리
는 자리에 닿을 것 같았다. 삭불이가 웃으며 절하고 섰는 애기를 치어다보고 “
퍽 컸다. 너 나를 알겠니?” 하고 물으니 애기가 나직이 “녜.” 하고 대답하였
다. 선이가 “열두서너 살까지 뵈온 어른을 설마 모를라고.” 하고 삭불이를 보
고 말하고 나서 “고만 건너가거라.” 하고 애기를 보며 말하였다.
그 동안에 애기가 속눈질과 겉눈질로 앉아 있는 총각의 인물을 보니 심술궂어
보이나 밉상은 아니었다. 그 총각의 눈이 자기의 몸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 같아
서 괴난하게 생각하였다. 사실로 돌이는 염치불고하고 애기의 아래위를 샅샅이
보았다. 애기는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서 볼 때나 다름없이 어여뻤다. 까다롭게
흠을 잡아 말한다면 키가 너무 커서 맨드리가 없고 귀가 쪽박귀에 눈에 독살이
들어 보이고 목소리가 새될 것 같았다. 치마 밑에 나온 발이 모양 없이 크나 봉
단이의 발보다는 더 클것이 없었다. 돌이는 만족하였다. 눈치 잘 채는 삭불이는
애기가 돌이 맘에 드는 것을 벌써 짐작하고 있는 터인데, 돌이는 인제 혼인말을
해달라고 싶어서 삭불이에게 여러 번 눈짓을 하다 못하여 “여보, 김서방. 아니
가시려우?” 하고 말하니 선이가 “가자시니? 김서방이 내게 와서 밥 한 끼 안
자시고 갈 터수가 아니어.” 하고 가로맡아 대답하는데 삭불이는 웃고 있었다.
삭불이가 선이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애기의 혼사를 정한 곳이
있느냐고 물은즉, 선이는 자기 형편으로는 데릴사위를 얻어야 할 터인데 가근방
백정의 집에 사위로 데려올 만한 아이가 없어서 지금 광구하는 중이라고 말하였
다. 삭불이가 이 말을 듣고 “내가 혼처 한 곳을 지시할까?” 하고 ‘훌륭한 총
각 하나가 있다. 그 총각이 외모도 준수하고 심지도 굳건하다. 나이는 올해 스물
다섯이다’ 말하고 혼인 정할 생각아 있느냐고 묻는데, 아무 말 아니하고 앉았
는 돌이는 낯이 간질 간질하였다. 선이는 그 사람이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다. 삭
불이는 “이왕 말이 났으니 내가 말하지.” 하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함흥으로 도망갔던 유명한 이승지의 외사촌 처남 되는 사람인데 지금 서울 와서
있다고 말하니 선이는 “그러면 함흥 양주삼네 일지요그려.” 말하고 삭불이가
“잘 아는군.” 말하니 “양주삼의 딸 봉단이가 숙부인 바친 소문이야 누가 모
르겠소. 더구나 백정의 집에서야.” 말한다. 삭불이가 선이에게 혼인 정할 의향
이 있느냐고 묻는데 돌이는 간지러운 낯이 따끔따끔 따가울 지경이었다. 돌이는
그대로 앉아 배길 길이 없어 뒤 좀 보고 오겠다고 일어섰다. 삭불이는 돌이가
헛뒤 보러 가는 줄까지 짐작하면서 “아까 이리 내려올 때 보았지? 길가에 한데
뒷간이 있지 않디? 그리로 가게.” 말하는 선이는 “우리 집에는 진디기만 사는
줄로 아우? 그렇게 멀리 갈 것이 무어요.” 하고 삭불의 말을 나무라서 말하는
데, 돌이는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2
돌이가 나간 뒤에 삭불이가 선이의 의향을 다그쳐 물으니 처음에는 선이가 신
랑감을 한번 보고야 말하겠다고 잘라 말하지 아니 하였다. 삭불이가 고개를 젖
히고 천정을 치어다보고 짧은 휘파람을 불다가 홀저에 혼잣말하듯이 “신랑감을
한번 보아야 한다것다. 막중 대사에 그럴 테지.” 하고 고개를 다시 바로 세우고
선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랑감은 벌써 보아 둔 줄로 알았더니 인제 볼 터이
란 말이야?” 하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선이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
어떤 신랑감을 누가 보아 두어요?” 하고 삭불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이때
껏 시치미를 떼고 있던 삭불이는 픽 하고 웃음을 터치며 한참 동안 하하 소리를
걷잡지 못하였다. 선이는 또 그 웃는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다가 삭불
의 웃음이 어지간히 끝날 때 “여보, 웃는 까닭이나 좀 압시다.” 말하니 삭불이
는 웃음 반 말 반으로 “알리다뿐이야. 아까 그 사람, 같이 온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신랑감이야.” 하고 또 하하 웃었다. 선이가 “무어요?” 하고 눈을 끄게
뜨니 삭불이가 웃음을 그치고 “놀라지 말고 내 이야길 들어.” 하고 한번 큰기
침을 하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첫 머리에 이승지를 쳐들었다.
이승지가 외사촌 처남을 장가들여 주려고 색시를 구하는 중에 자기에게 문의
을 하기에 자기가 애기 말을 하였고 이승지의 말이 너 친한 사람이면 나 친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터에 너 친한 사람의 딸이라니 두말 할 것 없이 좋다고
곳 정혼하도록 주선하라고 하는데, 자기가 볼일 때문에 좀 늦었고 신랑감 총각
과 같이 오기는 선보고 선보이고 하는 폐를 덜려고 자기가 주장하였고, 자기로
보면 양편이 다 친한 까닭에 중매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에 참말 섞은 이
야기를 자기가 중매된다는 것으로 마치었다. 그리하여 다시 선이의 의향을 물으
니 선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 총각 같으면 좋소이다. 애기 어머니
오거든 다시 이야기합시다.”하고 반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해가 거의 저녁때가 다 되었다. 선이가 삭불이를 보며 “시장하시
겠소.”하고 밖을 내다보며 “어째 이렇게 아니 오나? 이애, 너의 어머니가 오기
기다리다가는 손님 곯리겠다. 어서 나와서 밥 지어라.”하고 그 딸이 들으라고
크게 말하니 애기는 “녜.”대답하고 건넌방에서 밖으로 나왔다. 애기가 물을 이
어 들이고 솥을 가시고 쌀을 안치고 밥솥에 불을 지핀 뒤에 애기 어머니가 돌아
왔다. 문간에서 들어오는 길에 부엌에 있는 애기를 보고 “밥을 안쳤니? 너의
아버지 방에 계시냐? 누가 왔니?”하고 묻는데 애기가 부엌에서 나와서 고기 함
지를 받고 소곤소곤 몇 마디 말을 한즉 애기 어머니가 반색하며 “무어? 김선배
가 오셨어?”하고 안방문 앞으로 와서 미처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에그머니.
”를 찾아가며 삭불이와 인사하고 “왜 이렇게 늦었나?”묻는 남편을 보고 “조
금조금 하다가 늦었어.”발명하고 “저녁을 얼른 지어야겠군.”하고 바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선이가 “거기 잠깐 앉게나.”하고 나가려는 안해를 주저앉힌
뒤에 김서방이 애기 혼인 까닭으로 전위하여 왔다고 말하고 신랑감의 나이와 고
향과 및 친족 관계를 말하고 신랑감 총각이 밖에 나갔은즉 들어오거든 보라고
말하니 애기 어머니는 자기의 남편을 보며 “지금 문 밖에 낯선 총각이 서성거
리더니 그게 그 총각이군. 잠깐 보아도 사내답게 생겼든데.”하고 다시 삭불이를
보며 “애기 혼인 까닭에 일부러 양주 걸음까지 하셨으니 고맙기 짝이 없소. 전
에 정답게 지내든 김선배가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다르구려.”하고 수월수월하
게 말하였다. 삭불이가 손뼉을 치고 웃으며 “인제는 두말할 것 없군.”말하는데
선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애기 어머니는 “이야기들 해서 정하시지요. 이
승지의 부인만은 못해도 이승지의 처남의 댁도 좋구먼요.”하고 곧 뒤이어서 “
나는 몰라요. 나는 나가서 저녁이나 할래요.”하고 일어서 나가더니 자기의 이고
갔던 고기 함지에서 남은 고기를 꺼내서 뱀장어칼로 저미고 예고 하여 저녁 반
찬을 장만하였다.
방에 앉았는 삭불이는 선이를 보고 “총각 녀석을 불러들여야겠군.”말하여
선이가 문 밖에 나가서 돌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삭불이가 돌이를 보며 “자네,
뒤를 굉장히 오래 보네.”하고 바로 옮겨 선이를 보며 “훌륭한 사윗감이지. 천
하 일등인 뒤보는 것만 가지고도.”하고 하하 웃으니 돌이도 머리를 긁적긁적하
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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