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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25)

카지모도 2022. 10. 26.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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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왕동이는 산짐승이나 다름없이 자라난 까닭에 다리힘이 좋을 뿐 아니라 천

생으로 걸음이 재어서 겨울 해에도 하루에 사백여리 길까지 다니는 터이고, 병

해대사는 근력이 아무리 젊은 사람과 같아도 환갑 넘은 노인이라 자연히 걸음이

느린 터이니 걸음이 왕청되게 틀리어서 동행하기 어려웠다. 꺽정이는 대사와 동

행하기에 미립이 나다시피 되었건만, 그래도 갑갑할 때가 없지 아니하거든 길들

지 아니한 생마 같은 천왕동이가 갑갑증을 참느라면 조만히 애를 삭이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천왕동이는 곱길을 걸었다. 뒤에 오려니 하고 앞서가다

가 뒤에서 오지 아니하면 돌쳐와서 만나고 다시 앞서 걸어갔다. 칠성늪 가까이

와서 천왕동이가 애를 삭이다 못하여 “늪만 구경하고 도루 가자.” 하고 대사

와 꺽정이를 돌아보니 대사는 말이 없고 꺽정이가 웃으면서 “앞서 가지 말

고 나하고 같이 찬찬히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자꾸나.” 하고 말하였다.

늪가에 와서 한 차례 쉰 다음에 길라잡이 천왕동이도 꺽정이와 같이 뒤로 서

고 대사가 앞을 섰다. 얼마 아니 가서 천왕동이는 군소리하기 시작하고 한동안

뒤에는 사풍난 것같이 요두전목의 갖은 짓을 다하였다. 꺽정이가 보기에 우습기

도 하고 가엾기도 하여 “선생님, 천왕동이 미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대사는

돌아보며 웃었다. “너는 도루 집으루 가거라.” “같이 도루 갈 테야?” “우리

는 상봉까지 갔다 갈 테다.” “싫어, 그러면 나도 갈 테야.”대사와 천왕동이의

문답을 듣고 있던 꺽정이가 “혼자 도루 가지 않는 것만은 무던하다.”하고 천

왕동이를 추어 주고 “이애 네가 선생님을 업고 가자.” 하고 말하여 천왕동이

는 “그래 볼까.” 하고 대사 앞에 와서 등을 돌려대니 대사는 싫단 말 아니하

고 업히었다. 천왕동이가 처음에는 상봉까지 단참에 갈 것같이 내닫더니 불과

얼마 가지 못하여서 낑낑거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아이구, 못 가겠다.” 하고

대사를 내려놓았다. 꺽정이가 이것을 보고 웃으면서 “그러면 내가 선생님을 업

을 터이니 너는 짐을 져라.” 하고 말하여 천왕동이는 감자 바랑과 가죽을 지고

앞을 서고 꺽정이는 대사를 업고 뒤를 따랐다. 꺽정이가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천왕동이를 곱길 걸리게까지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길이 훨씬 빨라졌다. “얼른

이렇게 했더면 길을 많이 갔겠다.” 하고 천왕동이는 좋아하였다.

이래저래 많이 되었건만, 그래도 백리 길을 넘어 걸어서 무룩하게 생긴 무투

리봉에까지 와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나무 없는 돌바닥을 지나서 백두

산 상봉에를 올라왔다.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운무는 바다 같았다. 세 사람은 짐

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서로 의지하고 앉았다가 운무가 터진 뒤에 오색이 찬란하

게 비치는 천왕못가에까지 내려가서 보고 회정하게 되었다. 그날 해진 뒤에 일

행이 돌아왔다. 운총 어머니가 “어디까지 갔다오셨습니까?” 하고 대사에게 물

으니 대사는 “상봉에까지 갔다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천왕동이는

하루 해에도 다니기를 예사로 합니다만, 노인의 걸음으로 어찌 이렇게 속히 다

녀오셨습니까? 아무리 속히 오신다 하여도 길에서 두서너 밤은 지나시려니 생각

하였습니다.” 천왕동이가 그 어머니 말끝에 “두서너 밤이 무어야? 대사 걸음

같으면 네 밤은 자야 갔다왔을 거야.” 하고 내달으니 그 어머니가 “그러면 무

투리봉쯤 갔다온 게구나.” 하고 자기의 짐작대로 “무투리봉이 상봉이 아닙니

다.”하고 다시 대사를 돌아보았다. “천왕못 물에 손까지 넣어보았습니다.” 거

짓말할 리 없는 대사의 말을 의심하는 듯이 운총이가 “상봉에 참말 간 기냐,

안 간 기냐?”하고 물으니 천왕동이가 “그럼, 갔지 안 갔어?” 하고 꺽정이를

가리키며 “이가 대사를 업고 갔다왔어.” 하고 말하여 운총이의 모녀가 일행이

속히 다녀온 까닭을 알고 운총 어머니는 “험한 산길에 어떻게 노인을 업고 갔

다왔나?” 하고 꺽정이의 얼굴을 다시 치어다보고 운총이는 “너니까.” 하고

꺽정이를 보고 상글상글하였다.

 

9

운총 어머니는 죽은 남편을 묻던 날부터 매일 한번씩 천왕당 근처에 있는 무

덤에 갔다가 그 길로 천황당에 가서 당집 안팎을 정하게 쓸어넣고 왔었다. 운총

어머니가 처음에는 자기의 훗길 닦을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생각이 자녀에게까

지 번져나가서 당집을 쓸어놓고는 천왕성제 앞에 나아가서 세 번 절하고 절 한

번에 축원 한 가지씩 올리게 되었으니, 첫째 절은 죽어 저승에 가서 남편을 다

시 만나게 하여 달라는 것이요, 둘째 절은 천왕동이 수명 장수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요, 또 셋째 절은 사위를 잘 보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사 년 동안에 병이

나서 며칠 빠진 외에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를 거르지 아니하였었다. 운

총이와 천왕동이도 천왕당에 가는 것만 알지 무슨 축원하는지를 모르는 터인테,

의외에 손님 대사가 알아서 운총 어머니를 놀라게 하였었다. 대사가 오던 이튿

날, 운총이 남매가 꺽정이와 같이 사냥을 나간 뒤에 운총 어머니가 대사를 보고

사위 얻을 것을 걱정하고 또 꺽정이의 인물을 칭찬하였더니 대사가 “정성이 한

데 가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 체하고 “정성이라니요?” 하

고 말한즉 “천왕당에 가서 축원하시는 것이 정성이 아닙니까” 하고 알고 말

하는 데는 기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운총 어머니는 대사를 도승으로 알고

“꺽정이를 사위삼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대사는 웃으면서 “천왕

이 지시하셨다면 어련하리까.” 하고 대답하였었다. 그 뒤에 운총 어머니는 천황

당에 가서 천황화상 앞에 절할 때 “꺽정이 같은 사윗감을 지시하여 주셔서 감

축합니다.”하고 지레 사례까지 한 일이 있었다.

운총 아버지 젯날, 대사가 경 읽어 주기로 한 까닭에 대사와 꺽정이는 칠팔

일 동안 더 묵게 되었는데 그 묵게 된 것을 운총의 남매가 좋아할 뿐 아니라 꺽

정이 역시 해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꺽정이는 운총이와 단둘이 놀러다니고 싶은

생각까지 있었지만, 그림자같이 붙어다니는 천왕동이가 있는 까닭으로 둘이만

만나게 되지 못하다가 천왕동이가 짐승의 털가죽을 가지고 젯날 소용될 물품을

바꾸러 가게 되어 비로소 틈을 얻게 되었다. 그날 천왕동이가 길을 떠난 뒤에

운총 어머니가 운총이를 데리고 천왕당에를 나가는데, 꺽정이가 그 뒤를 좇아나

갔다. 운총 어머니가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운총이가 “엄마, 먼저 가. 우리

는 놀다 갈께.” 하고 말하니 그 어머니는 “오냐, 조금만 놀다 오너라.”하고

혼자 숲속으로 들어갔다.

꺽정이와 운총이가 천왕당 뜰 위에 와서 나란히 어깨를 겯고 앉았다. 꺽정이

는 무슨 말을 먼저 물어 볼까 생각하였다. “운총아.” 하고 불러놓고 한참 말이

없으니 운총이는 말을 재촉하는 듯이 꺽정이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너 나하

고 같이 가서 살려냐?”“엄마하고 천왕동이는 어떻게 하구?” “다 같이 가지.

” “엄마더러 물어보자.”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너 아니?”하고 묻고 꺽정

이는 운총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한번 웃었다. “모르지?

사내가 여인 얻는 것을 장가든다고 하고 여인이 사내 얻어 가는 시집간다고 한

다. 너 내게로 시집오려냐?” “시집가면 무엇하니?”하고 묻는 것이 땅파기다.

꺽정이는 또 웃었다. “아들도 낳고 딸도 낳지. 너의 엄마가 너의 아비에게 시집

을 온 까닭에 너를 낳고 천왕동이도 난 것이다.”“천왕동이 같은 아들 하나 나

볼까. 그래 내가 시집갈 테다.” 하고 운총이는 어서 시집가게 하라고 졸랐다.

꺽정이가 운총이를 안아 무릎 위에 올려앉히고 젖가슴에 손을 얹어 보니 어린아

이같이 철이 나지 아니한 운총이지만, 나이가 있어서 젖가슴이 생길 뿐이 아니

라 꼭지까지 제법 생겼었다. “이것이 시집가는 게냐?” 꺽정이는 또다시 한번

웃었다. “엄마가 천왕동이를 날 때 아비하고 천왕당에 와서 축원했다. 내가 보

았다. 거짓말 아니다. 우리도 천왕당에 들어가서 축원하자.”하고 졸라서 꺽정이

가 졸리다 못하여 당집 안으로 끌리어 들어왔다. 운총이가 꿇어앉으며 꺽정이까

지 꿇어앉히었다. 운총이는 “오늘 꺽정이에게 시집갔으니 천왕동이 같은 아들

을 낳아지이다.”하고 말한 뒤에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는 꺽정이를 돌아보며 목

소리를 크게 하라고 말하였다. 꺽정이가 당집 안에 들어올 때 반은 장난으로 생

각하여 되는 대로 중얼거리다가 홀저에 엄숙한 생각이 나서 “꺽정이는 운총이

를 안해로 정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운총이는 아들을 말하라고 또 한

번 졸라서 “아들도 일찍 낳기를 바랍니다.” 하고 꺽정이는 조금도 웃지 않고

아들까지 축원하였다.

 

10

꺽정이가 운총이와 함께 천왕당에서 나와서 운총의 손을 잡고 새삼스럽게 운

총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맑은 눈 속에 박혀 있는 이쁘장스러운 눈동자에 천왕의

모양이 비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도 거룩한 눈동자는 온

세상을 다 뒤져야 또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꺽정이는 생각하였다. “무어를 들

여다보니?” “아니다.” “아니가 무어야, 들여다보면서.” “안해가 이뻐서.”

“내가 안해야? 너는 무어냐?” “너는 내 안해고 나는 네 남편이지.” “남편?

그럼 남편도 이쁘다.” 하고 운총이는 하하 웃었다. “아가야.” 하고 꺽정이가

웃으면서 운총이를 번쩍 안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운총이가 꺽정이와 같이 집으

로 돌아오니 그 어머니는 대사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운총이는 어머니 옆에 붙어앉고 꺽정이는 선생에게 가까이 앉았다. 운총 어머

니가 “조금 놀다 오랬더니 왜 그렇게 오래 되었니?” 하고 운총이를 돌아보니

운총이가 서슴지도 않고 대번에 “엄마 나는 시집갔다.” 하고 대답하였다. “시

집을 가다니?”“저애한테로.” 하고 꺽정이를 가리키니, 꺽정이가 말 말라는 뜻

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이었으나, 운총이는 상글상글 웃으면서 말하였다. “우리

들이 천왕당에 들어가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축원했다.” 운총 어머니는 비록

맘으로 바라던 일이지만 하도 어이없어 말이 없고 대사는 귀엽게 여기는 눈으로

운총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꺽정이는 얼굴이 뜨거웠다. “엄마, 그러고 숲속에

와서.” 하고 운총이의 말이 떨어지자, 꺽정이의 뜨겁던 얼굴은 일시에 모닥불을

들어붓는 것같이 화끈하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운총 어머니가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거기 좀 앉아 있어.”

하고 말하여 꺽정이는 다시 주주물러 앉아서 고개를 숙이었다. 운총이는 여전히

상글상글하면서 “숲속에 와서 나무에 올라가기 내기했다. 꺽정이도 곧잘 올라

가겠지.”하고 말하여 꺽정이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모양으로 운총이를 보고 눈

을 흘리었다. 운총 어머니가 “이애의 종없는 말로는 알 수가 없으니 자세히 이

야기 좀 해.” 하고 꺽정이를 바라보니 꺽정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이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가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운총이를 안해로 정했습니다.”

“정하기만 하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다니요?”“대사를 지내야지. 대사

는 어떻게 할 테야?” “대사는 다시 지낼 것 없지요. 천왕 앞에서 굳게 약속했

으니까요” “그래도.” 하고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운총 어머니를 대사가 “

여보시오.” 하고 불러가지고 “초례는 훌륭하게 지낸 셈입니다그려. 지금부터

꺽정이를 사위라고만 하시면 고만입니다.”하고 웃으니 운총 어머니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운총 어머니가 “우리 새사위가 시장하겠군.” 하고 정지에 가서 쪄놓았던 감

자를 가지고 오니 운총이가 “나도 좀 주어.” 하고 말하는데 “남의 총각하고

같이 먹던 아이가 남편하고는 같이 못 먹나? 같이 가 먹어라.” 하고 운총 어머

니가 웃어서 꺽정이도 웃으면서 “이리 와.” 하고 운총이를 가까이 오라고 불

렀다. “이번에 운총이는 어떻게 할 터인가? 데리고 갈 터인가?” "이번에는 데

리고 갈 수 없지요.“ 하고 꺽정이가 대사를 돌아보니 대사는 ”이번에는 갈 수

없습니다.“ 하고 운총 어머니를 바라보며 잘라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

까?“ ”뒤에 보내십시오그려.“ ”천리 타관에 어떻게 보냅니까?“ ”길이 좀

멀더라도 보내시기에 걱정될 것은 없습니다. 양주 임꺽정이를 찾아가라고 보내

시면 고만 아닙니까? 또 천왕동이 걸음 같으면 천 리라야 이틀 길밖에 더 되지

아니하니 서로 소식 전하기도 걱정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운총 어머니가

대사와 말하는 동안에 운총이는 꺽정이와 같이

감자를 먹으면서 꺽정이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하고 꺽정이의 턱을 치받치기도

하였다. 꺽정이가 말라고 눈짓하니 운총이는 꺽정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하였

다. “우리 아까 다 말했지? 엄마하고 다같이 간다고.”

 

11

젯날이 되었다. 아침 뒤에 운총 어머니가 방안을 정하게 치우고 벽 밑으로 신

위를 앉히고 과일 접시 늘어놓은 솔소반을 신위 앞에 놓고 향로, 향합 대신으로

불 담은 놋탕기와 향 담은 나무 종지를 소반 아래에 놓고 그 앞에는 대사의 경

읽을 자리를 만들어놓았다. 대사가 자리에 나앉아서 향을 피우고 불경을 외기

시작하니 운총 어머니는 천왕동이를 데리고 앞에 꿇어 엎드리고 꺽정이와 운총

이는 그 뒤에 꿇어 엎드렸다. 대사가 불경에는 익지 못한 터이라 처음에는 정법

계진언 육자대명왕주 준제진언 같은 것을 외고, 그 다음에 행중에 가지고 왔던

금강반야바라경을 펴놓고 내리 읽었다. 젯날 증재에는 얼토당토 아니한 경이지

만, 점잖은 대사가 정성스럽게 읽는 까닭으로 모르는 운총 어머니 생각에 경 읽

는 소리가 곧 지하에까지 들릴 것 같고 또 승재공덕으로 운총 아버지가 보살의

지시를 받아서 곧 인도환생하게 될 것 같았다. 운총 어머니의 눈물을 자아내는

대사의 경소리가 천왕동이의 갑갑증을 쑤셔냈다. 조금 읽고 말았으면 좋겠는 것

을 자꾸 읽으며, 빨리 읽어치웠으면 좋겠는 것을 느리게 읽으니 갑갑증이 난 것

이다. 천왕동이 생각에는 대사의 경소리가 그의 걸음보다 더 갑갑한 것 같았다.

대사 앞에 펴놓은 금강경 책장이 한 장 두 장 넘어가는 동안에 천왕동이는 갑갑

증이 쇠어서 속이 상하였다. 뒤에 꿇어앉은 꺽정이와 운총이는 처음에는 서로

흘깃흘깃 돌아보며 소리없이 웃다가 나중에는 꺽정이가 눈 한짝을 찡긋하면 운

총이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또 꺽정이가 흉상스럽게 코를 들이마시면 운총이는

혀를 홰홰 내둘렀다. 이와 같이 둘이 번갈아가며 눈짓, 콧짓, 입짓 갖은 짓을 다

하노라니 웃음을 잘 집는 꺽정이도 웃음이 터질 뻔하였는데, 운총의 입에서 낄

낄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상하는 천왕동이가 뒤에서 나오는 낄낄 소리

를 듣고 속이 일층 더 상하여 메어붙이는 막소리로 “웃지 말아. 무엇이 웃으우

냐?” 하고 나무라니 그 어머니가 머리를 뒤로 돌이키고 눈을 흘기면서 “이십

넘은 것이 천왕동이 지각만도 못하단 말이냐!” 하고 운총이를 꾸짖었다. 동생의

나무람과 어머니의 꾸지람을 함께 받은 운총이가 애성이 나서 눈물을 흘리는데,

꺽정이가 두 손의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내리 훑어 보이니 운총이는 입술을 물

고 외면하였다. 대사가 경 읽던 것을 한동안 쉬게 되어 꿇어 엎드렸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 앉았다. 대사가 경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운총 어머니를 보고 “저애

들은 맘대로 나가 놀라고 하시지요.” 하고 권하여 운총이 남매와 꺽정이가 나

중 경 읽을 때는 꿇어 엎드리는 것을 면하였다. 젯날 낮에는 종일 경을 읽고 밤

에는 메 한 그릇과 채소 몇 가지로 제를 지내는데, 꺽정이는 운총의 남매와 같

이 꾸벅꾸벅 절하고 운총 어머니는 일장을 섧게 울었다. 젯날 새벽 운총 어머니

의 꿈에 운총 아버지가 와서 경 읽어 준 것을 치사하고 새사위가 참사한 것을

기뻐하여 이튿날 식전에 운총 어머니는 꿈 이야기를 하면서 좋아하였다.

젯날이 지난 뒤에도 대사와 꺽정이는 이삼 일 더 묵었다. 꺽정이는 떠날 생각

이 적은 것을 대사가 “인제 고만 떠나 보자.” 하고 재촉하여 내일이면 떠나기

로 작정이 되었는데, 운총이는 같이 가게 아니한다고 꺽정이에게 골이 나서 변

변히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달랠 뿐이 아니라 그 어머니까지 달래도

운총이는 골이 풀리지 아니하여 “나는 이 다음에 아니 갈테야. 맘대로 해.” 하

고 꺽정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튿날 식전에 운총 어머니와 천왕동이는 천왕당

까지 전송하는데 운총이는 방안에서 내다보지도 아니하였다. 꺽정이는 맘에 섭

섭하였다. 천왕당에 와서 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마주 서서 인사들 하는 중

에 꺽정이가 숲속 길을 돌아보다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한달

음에 쫓아왔다. 운총이다. 운총이가 꺽정이의 쫓아오는 것을 보고 와락 덤비어

목에 매달리며 “나하고 같이 가.” 하고 눈물을 흘리니 꺽정이가 “나중에 엄

마하고 천왕동이하고 같이 오너라. 내가 곧 고향으로 갈 것 같으면 데리고 가지

만 선생님과 같이 여기저기 들러갈 터이니까 여럿이 같이 갈 수야 있니? 이 다

음에 반갑게 만나자.” 운총이가 머리를 꺽정이의 가슴에 대고 말을 듣고 있다

가 “잘 가.” 하고 목에 감겼던 손을 놓으며 돌아서더니 별안간 뛰어가는데 몇

번 꼬꾸라질 뻔하는 것이 꺽정이의 눈에 보이었다.

 

12

병해대사와 꺽정이가 허항령에서 혜산진으로 나와서 갑산, 북청을 지나 함흥

에 와서 오륙 일 유류하고 다시 영흥을 지나 덕원에 와서 회양으로 작로하지 아

니하고 동해변으로 내려오며 통천 총석정과 고성 삼일포를 구경하고 금강산에를

들어왔다. 금강은 명산이라 곳곳이 경개 절승하여 처음 오는 사람의 눈을 놀래

었다. 대사는 나이 이십 시절에 내외금강을 한번 다 돌아본 까닭으로 큰절이나

암자에서 노독을 쉬고 꺽정이가 혼자서 구경다닐 때가 많았다. 은선대, 칠보대를

구경하고 안무재를 넘어서 마하암에 와서 묵을 때, 꺽정이가 혼자서 구경다닐

때가 많았다. 은선대, 칠보대를 구경하고 안무재를 넘어서 마하암에 와서 묵을

때, 꺽정이가 비로봉에를 올라 가려고 대사에게 말하니 대사는 전에 올라가 본

곳이라 “비로봉 절정에 올라가 보면 금강 일만 이천봉이 모두 눈 아래 굽어보

이고 망망한 동해가 눈앞에 내다보이느니라. 한번 시원하지. 그러나 나는 고만두

겠다. 나는 수미암으로 갈 터이니 그리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꺽정이가 지로승도 없이 혼자 길을 찾아 나서서 돌서더릿길을 접어들었을 때,

앞서 가는 중 하나를 보았다. 꺽정이가 말동무가 없어 심심하던 터이라 걸음을

조금 재게 걸어서 앞선 중을 쫓아왔다. “대사, 어느 절에 있소?” 하고 말을 붙

이니 그 중은 꺽정이의 모양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먼 곳에서 왔네.” 하

고 대답이 장히 완만스러웠다. “먼 곳은 이름도 없소?” “이름이 없을 리가

있나. 내가 미처 말을 못했지. 전라도 임피서 왔어.” “참말 멀리 왔구려.” “

멀리 오지 않고야 먼 곳에서 왔달 리가 없지. 총각은 어디서 왔나?” “나는 마

하연서 왔소.” “마하연이 고향은 아니겠지?” “고향은 경기도 양주요.” “총

각도 반천리길이나 왔네그려.” “반천리? 평안도 묘향산에 갔다가 함경도 백두

산을 들어가 보고 지금 나오는 길이니까 삼천 리도 넘어 왔을 것이오.” 꺽정이

의 말에 그 중은 놀라는 듯이 “무어하러 그렇게 멀리 다니나?” 하고 물었다.

“우리 선생님과 산천 구경 다니오.” “선생님이란 이는 어디 계신가?” “지

금 마하연에 계시오.” 이와 같이 서로 말을 주고받고 하며 십리길이나 올라왔

다. 비로봉 등성마루에 올라섰다. 이편은 비스듬하나 저편은 천장만장의 절벽이

다. 등성마루를 타고 얼마 동안 더 나가서 수삼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곳에

왔다. 이곳이 비로봉의 절정이다. 하늘에서 내리지르는 바람을 쏘이면서 두 사람

이 같이 전후좌우를 돌아보다가 꺽정이가 선생의 말을 생각하고 “한번 시원하

구나.” 하고 소리 높여 말하니 그 중은 바다 내다보던 눈을 돌이켜서 천봉만학

을 내려다보며 “높은 데 서서 내려다보는 맛이라니! 내가 이왕 중이 된 바에는

한번 천하 중을 눈아래로 내려다보아야 할 터인데.”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었다.

“대사가 양이 적구려. 이왕 사람으로 난 바에 한번 천하 사람을 눈아래로 내려

다본다고 말 못하고 만만한 중만?” 하고 꺽정이가 소리내어 웃은즉 “천상천하

유아독존인가.” 하고 그 중도 역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 중은 허우대가 크고 허

울이 끼끗하고 또 언변이 좋았다. 그 중의 말이 시골 작은 절구석에 엎드려 있

기가 갑갑하여 뛰어나온 길이라 장차 경산 절에 가서 있어볼 작정이라고 하여

꺽정이는 “서울 삼각산에도 좋은 절이 많지마는 우리 양주에 회암사, 봉선사

같은 큰절이 있으니 양주로 오구려.” 하고 말하니 “회암사는 서천 아란타사와

같은 유명한 대찰이고 봉선사는 세조대왕 광릉의 재사이지. 세조대왕은 불교를

숭봉하던 갸륵한 임금이야.” 하고 그 중은 수다를 부리었다. 꺽정이가 웃음의

말고 “우리 선생님도 대사와 같은 중이니 대사가 내려다볼 만한가 가보지 아니

하려오?” 하고 물었더니 그 중이 “내려다보든지 치어다보든지 같이 가세나.”

하고 꺽정이와 동행하여 수미암으로 왔다. 대사는 꺽정이와 수어를 말하고 그

중의 합장배례하는 것을 본체만체하고 앉았으니 겸손한 대사의 전에 없는 일이

라 꺽정이는 그 중을 데리고 온 까닭으로 맘에 민망하여 “선생님, 먼 곳에 사

는 중이 선생님을 보이러 왔습니다.” 하고 깨우쳐 말하니 대사가 눈을 들어 그

중을 한번 바라보고 “오, 너냐?”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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