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사와 꺽정이가 쇠갓 동행과 함께 제주를 떠나서 강진으로 돌아왔다. 대사와
꺽정이는 장흥으로 작로하려는데, 그 동행은 해남 한덕을 간다고 하여 달포 동
행이 동서로 갈리게 되었다. 동행하는 동안에 성명을 말한 일이 없던 그 사람이
서로 작별할 때에 “나는 이지함이란 사람이다.”하고 성명을 알리어 주었다. “
이씨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예사 선비가 아니다. 지모방략이 삼군
의 대장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일평생 크게 쓰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양반인 모양인데 어째서 쓰이지 못할까요?” “양반이라고 저마다 쓰이
게 되나, 때를 못 만나면 할 수 없지.” “때를 못 만나다니요? 양반이면 쥐새끼
만 못한 것도 잘 쓰이는 때에 때를 잘 못 만나면 다시 만날 때가 어디 있소?”
“ 그 사람의 팔자도 있지.” “팔자가 아니라 아마 양반이라도 사람이 쓸 만하
면 세상에서 써주지 않는 게지요.” “너의 말을 둘러 들으면 세상에 쓰이는 양
반은 대개가 못쓸 사람이겠구나.” “대개뿐 아니라 일개로 못쓸 것들이라고 해
도 좋지요.” “무엇을 가지고 쓸 사람, 못쓸 사람을 구별하는지 네 말은 모르겠
다만, 이씨 같은 인재가 쓰이지 못하고 그대로 늙는 것은 아깝다고 하겠지.” “
이씨는 양반이니까 일평생 천대만 받고 늙는 인재와는 다르지요.” 선생 제자가
이와 같은 문답을 하며 길을 걸었다. 대사와 꺽정이가 장흥을 지나고 보성을 지
나고 순천 송광사를 들르고 구례 화엄사를 들른 뒤에 지리산에를 들어왔다. 지
리산은 두류산이니 영남, 호남 어름에 있는 큰 산이라, 서편 반야봉에서 동편 천
왕봉까지 상거가 백여 리요, 산속에 있는 평전이 동서로 육십 리, 남북으로 육십
리요, 쌍계사, 의신사, 신흥사와 같은 높고 낮은 암자가 이곳저곳에 있어서 그
수를 이루 다 헤일 수가 없다.
대사와 꺽정이가 지리산을 대강 둘러보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서 화개, 악양의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하동으로 나와서 다시 진주, 의령을 지나 창녕에 도착하
였다. 이판서는 근 칠십한 노인이나 근력이 엄엄하고 이판서 부인은 나이 오십
이 넘었으나 기부가 좋아서 늙은 티가 많이 않고, 함동이가 삼십여 세의 어른이
되어서 집안 살림을 총찰하였다. 이판서는 특별히 대사를 보고 반기고 이판서
부인은 더욱이 꺽정이를 보고 눈물을 지었다. “너의 아버지와 같이 자라던 것
이 어제 같은데 네가 나서 벌써 헌헌장부가 되었구나.” “너의 아버지는 한번
와보지도 아니하니 야속한 사람이다.” “너의 누이는 잘 있니? 이름이 무어든
가?” “김덕순이를 만나 보았니?” 이판서 부인이 수다한 사람이 아니건만, 한
번 보고자 하던 꺽정이를 대하여서는 자연히 말이 많았다. 꺽정이의 면목이 너
글너글한 것을 “아버지보다도 더 잘생겼다.”하고 칭찬도 하고 꺽정이의 말씨
가 거슬거슬한 것을 “아버지를 닮았구나.”하고 웃기도 하였다. 이판서 부인이
다정하고 이판서가 양반 티를 부리지 아니하여 내외는 다 꺽정이의 비위에 맞았
으나, 그 아들 이서방은 꺽정이에게 형님 소리 듣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는 모양
이라 꺽정이가 화가 나서 주먹다짐으로 버릇 가르치고 싶은 맘까지 있었으나 이
판서 내외의 면목을 보아서 참았다. 이서방 외에 꺽정이의 화증 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 사람은 양반도 아닌 것이 양반 이상으로 주제넘었다. 꺽정이
에게 또렷하게 해라 할 뿐 아니라 대사에게도 말공대가 별로 없었다. 그 사람이
꺽정이를 보고 “내가 너의 외조부의 친구다.” “너의 외조부가 이름은 선이지
만 작대기란 별명으로 행세하였었다.” “너의 아버지 장가들 때 내가 중매를
들었다.” “너의 어머니 이름이 애기었었다. 얼굴이 이뻤었지.”하고 묻지도 않
은 말을 지껄이는데 꺽정이가 듣기 싫어서 “그러니 어떻단 말이오?”하고 그
사람의 말을 막았다. 꺽정이는 그 사람도 한번 쥐어질러 주고 싶었으나, 병이 들
어 운신도 잘 못하는 늙은 것이 앉아서 입만 나불나불하는 것을 손대기가 어려
워서 역시 참았다. 김삭불이가 늙게 의지가지가 없이 되어 이판서 집에 있어서
이서방이 민주고주를 대는 중이었다. 꺽정이가 이판서 집에서 한동안 묵을 것이
지만, 이서방과 김노인의 꼴이 보기 싫어서 대사에게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17
꺽정이가 떠나려고 하는 것을 이판서 부인이 지성으로 만류할 뿐 아니라 대사
까지도 “모처럼 온 길이니 더 묵어 가자꾸나.”하고 말하여 꺽정이는 주저앉아
다시 며칠 동안 지내게 되었었다. 그때가 처서 전이라 참외가 끝물일망정 아직
먹을 만하였다.
어느 날 해가 설핏할 때에 꺽정이가 이판서집 사람들과 같이 참외를 먹으러
나섰는데, 맛좋은 참외를 취하여 곰보외막이라 일컫는 참외막을 찾아오느라고
이판서집에서 오리길을 넘어 나왔다. 외막 주인은 얼굴이 얽었고 참외는 맛이
좋았다. 막 위에들 올라앉아 참외를 먹는 중에 참외막 건너편 현풍 가는 길로
행차 하나가 지나가는데, 맞잡이 보교 한 채가 앞을 서고 초립동이를 태운 방울
나귀가 뒤를 따랐다. 보교는 내행이 탄 것 같고 초립동이는 배행인 모양이었다.
하인은 보교의 교군꾼과 나귀의 견마잡이까지 모두 합쳐서 오륙 명밖에 더 되지
아니하였다. 행차 가는 맞은편에서 키대 큰 중놈 하나가 길 복판으로 걸어오다
가 보교와 마주치더니 길을 비키라거니 아니 비키거니 하여 말썽이 되는 것 같
았다. 하인들이 중놈을 떠다박지르는 모양이나 중놈은 까딱 아니하고 선 자리에
서 있었다. 골이 난 중놈이 앞채 교군꾼의 등을 쳤는지 보교를 메고 섰던 교군
꾼이 채를 낀 채로 주저앉으며 보교 속에 앉은 사람이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고꾸라지는 소복한 부인이 주저앉은 교군꾼의 등에 업히려는 것같이 보이었다.
곰보 주인이 참외 멍구럭을 엇메고 참외막 위로 올라오며 “어느 집 내행이 창
피한 꼴을 당하네.”하고 혼자 말하는 것을 듣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판서
집 사람들이 “중놈이 괘씸하군.” “어느 절 중놈인고?”하고 서로 돌아보는데
곰보 주인이 “연화사 중망나닌가 보오.”하고 말하는 것이 그 중놈의 본색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중망나니라니?” “수십 일 전에 중놈 하나가 외막에 와
서 외를 따서 달라는데 목자가 불량하여 보이기에 공먹고 갈까 의심이 나서 외
바꿀 곡식을 가지고 왔거든 먼저 내놓으라고 말했더니 곡식? 하고 뇌면서 대어
들기에 막아보려고 떠밀었소그려. 바윗덩이를 떠미는 것 같습디다. ‘다 떠밀었
니?’하고 중놈이 내 두 다리를 움켜쥐고 꺼꾸로 치어드는데 오장이 다 쏟아질
것 같읍디다. 전정이 급해서 외를 따서 바치마고 항복했지요. 그랬더니 진작 그
럴 것이지 하고 놓아줍디다. 나중에 들으니까 몇 달 전부터 비슬산 연화사에 와
서 있는 중놈인데, 천하에 망나니라 절에서도 두통을 앓는답디다. 중놈이 그날
외맛을 보고 가더니 그 뒤로는 이십리길에 사흘돌이로 와서 외를 공먹고 가지
요. 먹고 갈 뿐인가요? 상좌놈 준다고 가지고 가기까지 하지요. 심정이 사나워
죽을 지경이지만 참지 않고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 오늘도 외 먹으러 오던
길인가 보오.” “그렇게 행패하는 중놈을 버릇을 못 가르쳐?”“버릇을 가르치
려다가 누가 혼날라구요. 힘이 천하 장사요. 나를 꺼꾸로 들 때 새꽤기 하나 들
듯합디다. 충청도 어느 절에 샘물이 있어서 그 샘물을 먹으면 힘이 난다는구려.
그래서 그 절에는 약한 중이 없다는데 망나니놈이 어릴 때부터 상좌 노릇하면서 그 샘물을
먹고 자란 까닭에 그 절에서도 장사로 유명했답디다.” 이판서집 사람들이 곰보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 샘물이나 먹으러 갈까?” “힘난 뒤에 참외를 공먹으로
오려나?” “곰보는 참외를 공먹히다 말겠네.” 하고 서로 웃는 중에 한 사람이
“저것 보게.” 하고 말하여 여러 사람이 일시에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중놈이
보교 뒤채를 꼲아들고 길에서 수십 간 떨어져 있는 나무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초립동이는 나귀 등에 엎드려 있고 하인은 모두 도망질을 친 모양인지 한 사람
도 눈에 보이질 아니하였다. “보교 속에 부인을 담아가지고 가는 것일세.” “
저 죽일 놈이 백주 노상에서 부녀를 겁탈하네그려.” “저놈을 어떻게 하면 좋
단 말인가.?” 하고 여러 사람이 지껄이기만 하는데, 이때껏 말참견 아니하던 꺽
정이가 “어떻게 하는 것은 다 무어요. 중놈 버릇을 가르쳐야지.” 하고 벌떡 일
어선즉, 곰보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 “총각 가지 말게, 목숨이 위태하니.” 하고
붙드는 것을 꺽정이가 손으로 뿌리치고 참외막 위에서 껑청 뛰어내려갔다.
그 중놈이 소복한 부인을 보교에 담아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몸부림하는
부인을 갓난아이 드다루듯 하였다. 치마·속곳 할 것없이 부인의 아래옷을 갈가
리 찢엇서 빨간 몸을 만들어놓았다. 찢은 옷으로 줄을 삼아 부인의 두 팔을 벌
리어 나무에 동여매고 발버둥치는 것을 막으려고 두 다리까지 각각 좌우 나무에
동여맸다. 부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입귀에는 피가 흐르고 눈을 감고 뜨
지 못하였다. 꺽정이가 뛰어오는 길로 초립동이에게 와서 보니 중놈이 양편 동
자를 휘어붙여서 초립동이는 두발을 빼지 못하게 되었었다. 꺽정이가 그 동자를
펴놓은 뒤에 초립동이를 안아 내리었다. 초립동이를 주주물러 앉아서 “우리 어
머니를 중놈이...” 하고 숲을 가르키며 눈물을 흘리는데, 꺽정이가 “어서 일어
서 같이 가.” 하고 치켜들려고 하니 초립동이는 어진혼이 나가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다가 발에 힘이 없어서 디디고 서지 못하였다. “이 따위로 지체하다가
는 대부인이 봉욕하겠소. 뒤에 오. 나 먼저 갈 것이니.” 하고 꺽정이가 한달음
에 뛰어와서 숲속에 들어서니 눈앞에 나타나는 광경이 해참스러워 볼 수가 없었
다. 꺽정이는 우뚝 발을 멈추고 나서 “중놈아!.” 하고 소리를 지른즉 중놈은
저리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개 같은 놈, 이리 나오너라!” “망한 놈
의 자식이!” 하고 중놈이 눈을 부라리더니 골풀이할 사이 없어서 골을 참는 모
양으로 “총각놈 수 생기게 해줄 께니 이따 오너라.” 하고 농치고 나서 다시
괴춤에 손을 대었다. 꺽정이가 뛰어들어가서 중놈의 적삼 뒷고대를 쥐고 잡아당
기니 중놈은 윗도리가 뒤로 젖혀지려다 말고 적삼 등판이 미어져 나갔다. 짐승
같은 중놈은 욕심 불길이 타올라서 눈알이 뒤집힌 중에 훼방을 만나서 눈에 보
이는 것이 없이 분이 났다. 응 소리를 지르며 돌쳐섰다. 뒤로 물러선 훼방꾼에게
로 몇 걸음 쫓아나와서 단 한번에 박살내려고 무쇠같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
쳤다. 꺽정이가 슬쩍 손을 내밀어 팔목을 받아 지니 그 주먹이 소용없이 되었다.
중놈이 팔을 뿌리치려다 잘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발길로 불두덩을 내지르나 꺽
정이가 쥐었던 팔목을 놓으며 나오는 발목을 거두어 잡아 번쩍 위로 치어들자,
중놈이 벌렁 뒤로 자빠졌다. 이것이 말하자니 길지 순식간에 일이었다. 중놈이
땅 위에 자빠져서 꺽정이를 치어다보고 “총각, 장사일세.” 칭찬하고 그 다음에
“총각, 그러면 내가 숲 밖에 나가 있다가 나중에 들어오세.” 말하고 흉상스럽
게 웃는 것을 꺽정이가 발로 직신거리며 “어서 일어서라!” 하고 꾸짖었다. 꺽
정이가 중놈을 앞세우고 숲 밖에를 나오니 초립동이가 발을 질질 끌고 걸어오는
중이었다. “어서 들어가서 대부인을 풀어놓우.” 하고 꺽정이는 중놈의 등을 밀
어 가지고 길가에 나와서 주저앉힌 뒤에 “여보, 여보” 하고 큰소리로 하인들
을 불렀다. 하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참외막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편으로
건너왔다. 중놈이 침먹은 지네같이 꿈쩍 못하고 앉았는 것을 보고 외막 주인 곰
보는 꺽정이를 도술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장사도 도술 앞에는 소용없네.
”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돌아보았다. 꺽정이가 하인들을 숲속으로 보내더니
얼마 동안 아니 지나서 보교 뒤에 웃옷을 벗은 초립동이가 하인에게 부축을 받
고 따라왔다. 초립동이의 웃옷은 그 어머니의 빨간 몸을 가리게 한 모양이다. 교
보꾼이 보교를 내려놓고 바람에 열리지 않게 앞문을 단단히 동여매는 중에 “이
애, 은인의 성함을 여쭈어 보아라.” 하는 가는 목소리가 보교 속에서 나오며,
초립동이가 꺽정이 앞에와서 양수거지를 하고 서서 “성함이 누구십니까?” 하
고 물었다. “성함 없소.” 하고 꺽정이가 껄껄 웃으니 “그러시지 말고 가르쳐
주십시오.” “성함은 없으니 총각 백정으로나 알고 가시오.” 하고 꺽정이가 그
하인들을 향하여 바삐 떠나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하인들이 놀란 정신을 수습하
고 길 갈 차림을 차리는 중에 꺽정이가 중놈을 내려다보며 “조그만 힘을 믿고
행패하고 다니다니 우스운 놈이다. 처음에는 네가 세상에서 천대받는 중놈이기에
천대받는 것으로 보아 용서하려 하였더니 하는 짓이 용서하지 못하겠다. 계집이
생각나면 어디가서 하나 업어가지, 백주 노상에서 겁탈이 무어야. 개 같은 놈 같
으니!” 하고 꾸짖고 중놈의 팔회목을 두 손에 갈라쥐고 한번 힘을 쓰니 중놈이
상을 흉악하게 찡그리며 뼈 부서지는 소리가 자끈 하고 났다. “너의 목숨 붙여
주는 것만 다행으로 알고 어서 빨리 가거라!” 하고 꺽정이가 중놈을 쫓은 뒤에
이판서집 사람들을 보고 돌아갈 것을 말하니 옆에 섰던 곰보가 무서운 총각을
대접할 생각이 나서 말까지 공대하여 “아직 늦지 아니하니 외나 몇 개더 잡숫
고 가십시요.” 하고 다시 움막으로 가자고 청하는 것을 “
다음날 다시 오지요.” 하고 꺽정이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이판서집 사람 하나가 내행 따라온 하인 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것을 꺽정
이가 보고 “무슨 이야기요, 고만 갑시다.” 하고 재촉하였다. 꺽정이와 이판서
집 사람들이 얼마 아니 와서 그 내행에게 길을 비켜 주게 되었다. 그 초립동이
가 홀로 된 어머니를 뫼시고 창녕 외가에를 왔다가 현풍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인데, 외가가 가까운 까닭에 모자간에 의론하고 길을 돌치게 된 것이다. 초립
동이가 꺽정이를 보고 나귀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을 꺽정이가 “어서 타고 가시
오.” 하고 번쩍 안아서 나귀 등에 올려앉히니 초립동이가 “미안합니다. 그러면
앞서 가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는데 꺽정이는 인사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었
다. “헐이야.” “난간이다.” “바닥이 험허고.” “오냐.” 앞채잡이는 주워섬
기고 뒤채잡이는 대답하며 보교가 거침없이 나가니 따라가는 나귀가 초싹초싹하
며 바삐 걸어갔다. 그날 밤에 이판서가 대사와 같이 이야기하고 앉았는데, 부리
는 아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성참판댁 서방님이 오셨습니다.” 하고 연통하니
이판서가 “그 사람이 밤저녁에 무슨 일일꼬?” 하고 혼잣말하였다. 성씨의 집
은 이판서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아니하나 세시 인사와 애경상문 이외에는 별로
상종이 없는 터이다. 이판서는 연로한 재상이라고 어른으로 대접하지마는, 이판
서의 아들은 절름발이 양반이라고 친구로 사귀지 아니하는 까닭에 이판서의 아
들과 노소 연기나 되는 성씨는 고사하고 성씨 일문 중에 나이 젊은 사람들도 대
개는 서로 서먹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이판서가 성씨가 밤에 찾아온 것을 괴상
히 생각하며 “들어오시라고 해라.” 하고 아이에게 말을 일렀다. 아이가 나간
뒤 조금 있다가 나이 사십여 세 된 사람이 들어와서 이판서에게 절하고 꿇어앉
았다. “무슨 일이 있어 밤에 찾았나?” “밤에 와서 보입는 것이 황송하온 일
이나 시생의 자친이 밤에라도 가라고 말씀하셔서 황송한 것을 무릅쓰고 왔습니
다.” “자당이 가라시어? 대체 무슨 일인가?” “다른 일이 아니올시다. 시생의
매부가 현풍 사람이올시다. 매부는 연전에 작고하고 생질 하나가 있습니다.” “
그래서” “향일 자친 수신에 누이와 생질 모자가 와서 묵다가 오늘 회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흉한 중놈 하나를 만나서...” 하고 성씨가
한번 대사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큰 봉욕을 하였는데 대감댁에 있는 사람
이 구하여 주었답니다.” 이판서가 꺽정이의 한 일을 들어 알고 있는 터이라 속
으로 ‘꺽정이를 찾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자네 매씨가 그런 일을 당하셨
더란 말인가? 내 집에 있는 사람인 것은 어떻게 알았나?” “하인이 물어보았더
랍니다.” “나는 몰랐었네.” “그래서 시생의 자친이 곧 대감께 가서 보입고
말씀이라도 여쭙고 오라고 하셔서 밤에 왔습니다.” “내 집에 잠깐 다니러 온
총각아이가 기운꼴이나 쓰는 모양일세. 그 총각아이를 불러줄까?” “총각이 백
정이랍지요?” “쇠백정의 아들이야.” “불러볼 것은 없습니다. 대감께서 말을
이르셔서 한번 시생의 집에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일러봄세만 기특
하단 칭찬 받으러 가려고 할는지 모르겠네.” “아무쪼록 보내주십시오. 시생의
자친이 친히 불러보시기까지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하인을 보내겠습니다.
” 하고 다른 말을 수어하다가 성씨가 돌아갔다. 이판서가 대사를 바라보고 한
번 웃고 꺽정이를 부르라고 하여 꺽정이가 윗간에 와서 앉은 뒤에 말을 완곡하
게 “너의 구원한 부인이 성씨집 딸인데 그 집에서 너를 고맙게 생각하여 한번
청하러 온다더라.”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청해다 무엇하게요? 하정배 받고
싶어서요?” 하고 입을 실쭉하고 앉았었다.
꺽정이가 이판서 집에서 묵는 동안에 성씨 집안에서 꺽정이에게 버선을 보내
고 벌 맞는 옷을 보내고 또 음식까지 보내서 이판서 부인이 먼저 받아놓고 꺽정
이에게 말한즉, 꺽정이는 “아주머니 그건 왜 받으시오?” 하고 사설하였다. “
주는 것은 받아도 좋지 아니하냐? 굳이 안 받을 것이 무엇이냐?” 하고 이판서
부인이 말하다가 나중에는 “주는 것을 굳이 안 받으면 그것도 욕거리다.” 하
고 타일렀다. 꺽정이의 한 일을 한 사람 두 사람이 차차로 알게 되어서 “백정
놈 장사가 이판서집에 와서 있다.” “장사 백정놈이 이판서 부인의 결찌다.”
“정경부인이 나고 천하 장사가 나니 이판서의 처가는 백정놈이 집이라고 우습
게 볼 것이 아니다.” “백정놈의 집이라도 묏장이나 얻어 쓰면 사람이 나는 것
이다.” 이판서 부인까지 들추어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말이 이판서의
아들의 귀에 들어와서 그는 창피한 생각으로 어머니를 보고 “공연히 꺽정이 때
문에 어머니 말까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구려.” 하고 불쾌한 빛을 얼굴에 나
타내니 그 어머니가 “그러면 어떻단 말이냐?” 하고 나무라눈 기색을 보이었
다. “백정이라고 놈이니 년이니하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 좋아요?” “백정을
백정이라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놈이니 년이니 하는 것은 입버릇들이 사나워 그
러하지.” “사람이 창피해 못살겠소.” 옆에 있던 꺽정이가 “잘하나 못하나 욕
만 먹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오. 백정도 사람이지요.” 하며 탄하고 나서니 몇십
년 동안에 속이 썩고 썩은 이판서 부인이 “창피하다고 말할 것도 없고 탄할 것
도 없다.” 하고 가늘게 한숨을 지었다. 이판서가 대사와 꺽정이를 생량한 뒤에
가라고 붙들어서 대사는 그렇게 할 뜻을 보이었으나, 꺽정이는 그 전에 떠나가
겠다고 고집하여 꺽정이는 먼저 가고 대사는 추후하여 가기로 작정되었다.
꺽정이가 떠나간 뒤에 대사는 다시 달포를 넘어 묵다가 떠나는데, 이판서가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기필할 수 있나. 저승에 가서나 만나보세.” 하고 늙은
눈을 씻고 다시 한번 바라보니 대사는 “저생에 가서 만날 것인들 기필할 수 있
습니까.” 하고 호젓하게 웃었다. 대사가 새재를 넘어서 연풍·괴산을 지나 무기
에 왔을 때, 중 동행 하나를 만났다. “스님, 어느 절에 계시오?.” “죽산 칠장
사에 있소.” “칠장사요? 제가 칠장에 있는 중인데요.” 하고 그 중이 괴상히
생각하니 대사는 점잖은 태도로 “칠장에 가 있어 보려고 생각하오.” 하고 빙
그레 웃었다. “지금 칠장으로 가시는 길인가요?” “글쎄, 그럴까 보오.” 하고
대사는 남의 일에 말하듯이 대답하였다. 대사가 그 중과 동행하여 죽산 칠장사
에 찾아왔다. 대사가 곧 법당에 올라앉아서 그 절에 있는 중들을 보고 “내가
이 절에 있으러 왔으니 넓고 깨끗한 방을 하나 치워라.” 하고 자기 상좌들에게
말하듯 하니 중들이 “미친 사람이로군.” “내쫓아 버립시다.” 하고 수군수군
하며 서로 돌아보는 중에 대사가 벌떡 일어서며 “너희들 모두 뜰 아래로 내려
가거라!” 하고 손가락질 한번에 여러 중들은 누가 내모는 것같이 정신 잃고 뜰
아래로 몰려내려왔다. “거기들 꿇어앉아라.” 여러 중들의 무릎이 절로 꿇리어
졌다. “내가 이 절에 있으러 왔다면 그만이지, 두말이 무엇이냐!” 여러 중들의
고개가 또 절로 수그러졌다. 얼마 동안 지난 뒤에 “처음이라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 올라들 오너라.” 여러 중들이 일어설 때 법당 마루에 나선 대사의 모양을
치어다 보니 머리에는 금광이 둘려 있고, 몸매는 서기가 어리어 있는 것같이 보
이었다. “생불이 강림하신 것을 눈이 없어 몰랐습니다.” 하고 여러 중들이 나
란히 합장 배례를 드리었다. 이리하여 병해대사는 칠장사에서 생불 대접을 받고
지내게 되었다.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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