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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26)

카지모도 2022. 10. 27.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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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소승은 임피 용천사 우올시다. 안변 석왕사에 와서 있사옵다가 금강산에 들

어온 지 두어 달 소수 되었소이다.” 병해대사는 말이 없었다. “스님 말씀을 총

각에게서 듣고 일부러 보이려고 왔소이다.” 병해대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보

우라는 중이 못 당할 소조를 당하는 듯이 귀밑까지 붉히고 앉았더니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묻자올 말씀이 있소이다. 부처님에 전생에 상불경보살로 재

세하셨을 때, 경멸하는 사람이나 모욕하는 사람들을 한결같이 공경하셨다 하옵

는데 여래로 출세하셔서 인천대중의 찬양을 받으실 때 그 경멸하고 모욕하던 사

람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옵니까? 아귀도, 축생도에들 빠져서 세존을 우러러뵈

옵지도 못하였을 것이 아니옵니까?” 말은 공손하나 말하는 어취는 지금 나를

경멸하고 모욕하면 나중에 네가 아귀나 축생이 되리라 하는 말로 들리었다. 대

사가 별안간에 큰소리로 “보우야!” 하고 이름을 부르더니 “네가 법화경 삼천

번도 읽지 못한 것이 머리를 땅에 대지 못하느냐? 수악청산설월권이란 되지 못

한 글 한 짝이 법화경 대신이냐!” 하고 방할하듯이 말하였다. 보우의 놀라는 모

양이 옆에 사람의 눈에 보이었다. 보우가 놀랄 것이 그 글짝이 자기가 고향 절

에서 뛰어나올 때 방석에 써놓고 온 글짝이었다. 보우는 풀기가 죽은 말로 “스

님께서 임피를 가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다가 “보고야만 알까?” 하는

대사의 말 한마디에 다시 말을 묻지 못하였다. 수미암 중은 고사하고 꺽정이까

지도 처음에는 대사가 심하거니 생각하였다가 대사의 꾸지람에 풀기 죽은 모양

을 보고서는 무슨 숨은 죄악이나 있는 중으로 알고 보우의 얼굴을 한번 다시 보

게 되었었다.

수미암의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암자라 방은 큰방 작은방 둘뿐이고, 중은 노장,

상좌 둘뿐이었다. 그날 밤에 대사는 노장중과 둘이 같이 자고 꺽정이는 상좌와

보우와 셋이 함께 자게 되었다. 밤이 들어서 모두 곤히 잠들이 들었는데 보우만

혼자서 잠이 들지 못하였다. 늙은 중에게 물풍스럽게 당하던 광경을 돌이켜 생

각하고 분하게 여기었다. 생각을 이리저리 굴릴수록 분한 생각이 앞을 섰다. 분

이 돋친 끝에 무슨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보우는 그 생각을 버릴고 ‘그까짓

늙은 놈을 셈에 칠 것도 없지.’ 하고 생각을 돌리다가 ‘셈에 칠 것도 없는 놈

에게 욕을 본 것이 더 분하다.’ 하고 입술을 악물게 되었다. 보우가 소리없이

일어나서 가만히 밖으로 나왔다.

이때 스무날께 반달이 서편으로 기울었는데 달빛이 겨울맛이 있어서 쌀쌀하게

밝았다. 보우가 식칼을 찾아 손에 들고 늙은 중들의 자는 방문을 바시시 열고

들여다보니 마침 그 방에는 서창이 있어서 달빛이 우렷하게 들여비치었다. 살그

머니 방안으로 들어와서 방구석에 붙어서서 내려다보니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

던 것이 환히 보이게 되었다. 아랫목에서 코를 고는 것은 주인 노장이고 윗목에

서 숨소리도 없이 자는 것이 늙은 객승이었다. 보우는 살금살금 걸어 객승의

머리맡으로 가서 이곳이 멱줄이거니 생각되는 곳을 식칼로 푹 찔렀다. 늙은 중

은 소리도 지르지 아니하고 또 몸을 꿈질거리지도 아니하였다. ‘이렇게 허무하

게 죽나.’ 하고 보우가 생각할 사이도 없이 옆에서 “이놈!” 하고 일어서는 중

이 있었다. 이것이 병해대사이었다. 대사가 보우를 향하여 한번 손가락질하는데

보우는 두 손을 치어들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대사가 식칼이 꽂힌 목침을

집어들고 “나를 따라나오너라.” 하고 앞서서 밖으로 나가니 보우는 목매인 송

아지가 끌리어가듯이 뒤를 따라나왔다. “목침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사람 해칠

뜻을 먹다니. 어리석은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어디로든지 가거라. 목침은 너를

주는 것이니 가지고 가되 내가 이 다음에 찾을 날이 있을 터이다.” 하고 대사

는 꽂힌 식칼을 뽑아 버리고 목침을 들고 서서 “꿇어앉아 받아라.” 보우는 꿇

어앉을 생각도 없이 꿇어앉고, 받을 맘도 없이 목침을 받았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거라.” 하고 대사가 다시 한번 손가락질하니 보우는 무엇에 쫓긴 사

람 같이 허둥지둥 달음질하여 나갔다. 보우가 간 뒤에도 대사는 한참동안 혼자

서서 서편에 걸린 외로운 달을 치어다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입맛을 다시었다.

 

14

병해대사가 금강산에서 한겨울을 지내게 되어 꺽정이도 대사를 따라 묵었었

다. 눈이 깊이 쌓인 뒤에는 이 암자에서 저 암자에 통래하는 데도 설마를 타고

다니는데, 위험한 곳에 잘 타고 다니기는 유년 타는 중보다도 꺽정이가 나았었

다. 2년에 걸치어 반년을 넘게 넘어 묵고, 이듬해 늦은 봄에 대사와 꺽정이가 금

강을 떠나 나와서 금성, 김화, 영평을 지나 양주로 돌아왔다. 대사가 양주서 십

여 일 묵은 뒤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김덕순과 심의를 찾아보았다. 심의는 갖바

치 친구를 잃은 뒤로 별로 출입이 없이 들어앉았던 터에 대사를 보고 “죽기 전

에 다시 만나네그려. 묘향산에 가서 중 되었단 소식을 듣고 내 근력이 웬만하면

쫓아가서 만나기라도 했을 터이지만, 그럴 근력이 있어야지. 송도서 작별한 것을

천고영결로 생각했었네. 백수산에를 올라갔었다니 환진갑 다 지난 늙은이가 어

찌하면 근력이 그렇게 좋은가? 나는 쇠증이 날마다 새로 생기니까 작년이 곧 옛

날이야. 불구인생이 정근이 남아 있어서 죽기 전에 한번 다시 만나기를 은근히

바랐었네.” 하고 반가워하는데, 대사와 서로 못 만난 지 이삼 년 동안에 근력이

많이 쇠패하여 보이었다. "인제 어떻게 할 터인가? 다시 서울 있어 볼라는가?" "

중은 절로 가야지요." "절 다 고만두고 내게서 여년을 같이 지내세그려." 대사가

고개 외치는 것을 보고 “절로 가더라도 묘향산 같은 먼 곳으로는 가지 말게.

간간이 만나기라도 하게.” “보아 가며 할 터이지만, 묘향에는 다시 가지 아니

할 생각이오.” “그렇게나 해야지 인정이지.” “중이 될 때 인정은 벌써 끊어

버렸소.” “인정은 끊었다니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절은 어느 문밖 절로 정하려

는가?” “남방에를 갔다 온 뒤에 어디로든지 가지요.” “남방이라니 또 어디

를 가?” “북으로 백두를 보았으니까 인제는 남으로 한라를 보러 갈 생각이오.

” “늙은이가 근력만 믿을 것은 아니야. 칠십지년에 천리 원행이 당한 일인가.

그것도 한 번 말이지, 두 번씩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길에서 객사하는 것

이나 집에서 고종명하는 것이나 죽음은 매일반이지요. 다리에 힘이 있는 동안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요. 국내 산천을 두루 밟아보려는 것이 소시적부터 소원이

었는데, 공연히 수십 년 동안 서울 먼지를 먹고 인제 늙바탕에야 소원을 풀게

되었소.” “인정은 끊어도 소원은 끊지 못하든가.”하고 심의가 허허 웃으니,

대사가 “끊을 것도 없는 것이 오죽한 소원이오.”하고 역시 웃었다.

대사가 십여 일 동안 서울서 묵은 뒤에 대단히 섭섭한 모양으로 심의를 작별

하고 또 이 다음 만날 것을 김덕순에게 말하고 다시 양주로 내려왔다. 대사가

한라산 간다는 말을 듣고 돌이도 말리고 섭섭이도 말리고 금동이까지도 말리었

으나, 대사는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이번에도 나하고 같이 갑시다.

”하고 동행하기를 청하니 대사는 두말 없이 좋다고 말하는데, 꺽정이의 아버지

가 대사를 보고 “전번에 도깨비에게 장가를 들었다더니 이번에는 또 무엇하러

따라간다고 주척대노?”하고 꺽정이의 혼인을 타박하여 말하였다. “혼인이야

잘했느니, 자네가 며느리를 상면하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하지.” “산속에서 노루

나 사슴같이 자란 계집아이가 잘나면 얼마나 잘나겠소. 여기 좋은 혼처가 있는

데 싫다고 나가던 자식이 그런데 가서 아비의 말도 없이 장가드는 것이 폐일언

하고 망할 자식이지요.” “내가 이번에는 창녕 이판서에게를 다녀올라네.” “

꺽정이도 그 누이는 한번 가보는 것이 좋겠지요.”

며칠 뒤에 대사와 꺽정이가 또다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꺽정이가 “먼

저 창녕을 다녀서 제주를 가시려오?”하고 물으니 “아니다. 먼저 전라도로 내

려가자. 그러면 제주 가는 좋은 동행을 만날 수가 있다. 제주를 들어갔다 나오는

길에 지리산을 구경하고 그리고 창녕을 들르자.”하고 노정을 말하여 대사의 정

한 대로 호남대로를 좇아 전라도로 내려갔다.

 

15

양주서 떠난 지 한 보름 가까이 된 때에 대사와 꺽정이는 강진으로 내려가는

역로에 영암읍을 들르게 되었다. 영암은 장흥, 강진, 해남을 느런히 앞에 놓고

나주를 등으로 가리고 있는 남방의 요해처라 산천 형세를 살펴볼 만도 하려니와

그 중의 월출산은 국내의 유수한 명산이라 바쁜 길이 아닌 바에는 한번 걸음을

아끼지 아니할 곳이다. 대사와 꺽정이가 도갑사 동구에서 선돌도 둘러보고 구정

봉 아래에서 동석도 흔들어보고, 또 바위 구멍으로 빠져서 구정봉 절정에도 올

라보았다.

대사와 꺽정이가 월출산을 돌아보고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중에 동행 한 사람

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신수는 점잖아 보이나 몸에 입은 의복이 추레하고 머리

에 갓 대신 퉁노구를 썼었다. 그 사람도 강진으로 가는 모양이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얼마 동안 동행하던 끝에 꺽정이가 “여보, 머리에 쓴 것이 무어

요?”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쇠갓이다.”하고 대답은 하면서 묻는 사람을 거

들떠보지도 아니하였다. “쇠갓? 좀 구경합시다.” “구경할 것 없다.” “없긴

무에 없어?”하고 꺽정이가 날쌔게 대어들어 쇠갓을 벗기니 “총각놈이 버릇이

없구나.”하고 그 사람이 짚었던 지팡이를 들어 장난조로 꺽정이의 볼기를 후려

쳤다. 꺽정이가 껑청 뛰어 피하며 “나 좀 써봅시다.”하고 퉁노구를 머리에 얹

고 거들거들 앞서 가니 그 사람은 맨상투 바람으로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총각이 대사의 동행인가?” “그렇소이다.” “대사의 동행이 내 갓을 벗

겨갔으니까 대사의 굴갓을 상투 가림으로 잠깐 빌려 쓰겠네.”하고 그 사람이

대사의 굴갓을 빼앗아 쓰니 구경은 대사가 중대가리 바람이 되고 말았다. 장난

같은 일이 인사 대신이 되어 대사와 꺽정이는 그 사람과 서로 이야기하며 동행

하게 되었다. 그 사람도 제주를 구경가는 사람인데, 제주길이 두번째라 제주의

산천경개와 인품 풍속을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제주를 그렇게 잘 아시

면 또 무어하러 가시나요?"하고 물으니 "잘 아는 곳은 다시 가지 않는 법이냐?

너는 이웃 동리에도 두번 가지 아니하겠구나." "제주와 이웃 동리가 같은가요?"

"서해 건너편에 중원이 있고 동해 속에 왜국이 있고, 또 오랑캐 땅이 북편에 있

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제주가 이웃 동리 폭이나 되겠나."하고 그 사람이 꺽정

이의 소견을 웃어서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날이 점심때가 된 때에 그 사람이 어느 냇가에 와 앉아서 머리에 썼던 퉁노구

를 벗어 돌로 괴어 놓고 허리에 찼던 양식 전대에서 쌀을 꺼내어 밥을 안치었

다. 그 사람이 밥을 두 번 지어 대사와 꺽정이까지 요기시킨 뒤에 퉁노구의 안

팎을 닦아 다시 머리에 쓰니 훌륭한 쇠갓이라, 꺽정이가 “세상에 편리한 갓도

다 많소.”하고 빈정거리듯이 말하니 “이놈!”하고 그 사람은 꺽정이를 돌아보

며 웃었다. 그 사람이 제주 왕래에 동행할 것을 허락하여 대사와 꺽정이는 그

사람을 따라가기로 작정되었다.

세 사람이 강진에 와서 배를 잡아타고 완도를 나왔다. 제주 다니는 어선 한

척을 얻은 뒤에 그 사람이 큰 두룽박 네 개를 얻어다가 배 네 귀에 매어달고 제

주를 향하여 배를 띄웠다. 제주 수로가 멀기도 하거니와 풍랑이 험하여서 복선

되기 쉽건마는, 세 사람의 탄 배는 두룽박 까닭으로 복선될 염려가 없었다. 배

속에서 몇 밤을 지내고 어느 날 아침에 조천관 포구에 배를 대게 되었다. 대사

와 꺽정이가 제주에 내린 뒤에도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였다. 그 사람

이 대정을 간다면 따라가고 그 사람이 한라산에 오른다면 따라 올랐다. 제주 와

서 달포 묵는 동안에 꺽정이의 맘에 드는 구경거리는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생마

잡는 것이었다. 꺽정이가 말 타는 법을 지성스럽게 물어 배우고 또 계제만 있으

면 말을 얻어 타고 달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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