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비가 머리를 동이고 벽을 안고 누웠다가 밀장지 열리는 기척을 알고서 돌아
눕지는 아니하고 "누구냐? “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정이 걸음을 사뿐사뿐 걸어
대비의 발치에가 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난정이올시다. " 하고 고하니 대비가 돌
아누우며 "어째 또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 "어째
서 또 들어왔느냐니까? “ "말씀 사뢰기 황송합니다만. " 하고 난정이 잠깐 말을
그치고 방글거리다가 "내외 말다툼을 했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왜 말다툼은?
” "저녁때 수시가 생겨서 안으로 들여보냈삽기에 두서너 개 맛보았삽더니 마마
께 드리기 전에 먹었다고 지각없다고 야단을 치와요. 그 생각 못한 것이 불민한
일인 줄은 알지요만 하인들 소시에 그만 일을 가지고 야단치는 것이 조금 야속
도 하려니와 첫째 창피하와 가만히 있기 어렵삽기에, 임금의 잡수실 음식을 신
하가 먼저 맛보라는 말이 옛글에도 있지 아니하냐고 좀 억짓말을 했삽더니 대번
에 주둥이만 깠느냐고, 사람을 닭의 새끼같이 말합니다. 그제는 창피도 어디 가
고 골이 나와 견딜 수가 있어야 합지요. 그래서 한바탕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
수시를 내일 드리게 하라고 말하옵는 것을 기어이 어기어 보려고 오밤중이라도
갖다 드리고 나온다고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 하고 난정이 갖은 요신과 갖은 간
특을 다 부리며 말하여 대비가 난정의 말에 끌리어서 한번 빙그레 웃고 "그래
그 수시는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었다. 난정이 대비를 부축하여 일어 앉게
한 뒤에 "수시를 들여오리까7" 하고 물어서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니 난정이 곧
밖으로 나가서 저의 손으로 목판째 들고 들어와서 대비 앞에 놓았다. 대비가 한
개를 손바닥에 놓고 윗부리를 제기고 속을 입으로 빨아들인 뒤에 껍질 남은 것
을 목판 구석에 놓으며 "이것이 어디 소산이냐7" 하고 물으니 난정이 "전라도
고부 소산이랍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고부가 장흥서 머냐, 가까우냐? ” "장
흥서 대단히 먼가 보아요. " "고향에서는 먹어보지 못했겠구나? “ "못 먹어보았
습니다. " "임피서는 가까운가? ” “장흥서보다는 퍽 가까을 줄 압니다. " 하고
난정이 대답하고 나서 대비의 눈치를 살피어 가며 "스님은 혹 자시어 보았을는
지 모릅지요. 스님에게 몇 개 보내렵니까? ” 하고 물으니 대비가 미간을 찌푸
리며 "주더라도 급할 것 있느냐. 목판을 저리 치워라. " 하고 말하였다. "인제 곧
물러나가야 하겠습니다. " "이왕 들어왔으면 그렇게 급히 나갈 것이 무엇 있니?
“ "말씀 아뢰기 황송합니다만, 공연히 말다툼하다가 저녁밥을 아니 먹었더니 조
금 시장합니다. " "너도 저녁밥을 안 먹었니? 내가 아직까지 저녁 수라를 받지
않았다. " "어째서 이렇게 늦도록 진어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공연히 그랬다.
" "그러면 진어합시고 나서 대궁을 물려주시면 황감하겠습니다. " "상궁이란 것
들은 어디 가서 자빠져 있노. 좀 불러다오. " 하고 대비가 말하여 난정이 나와서
상궁들을 부르니 오상궁이 난정을 보고 "나는 탓을 받을 줄 알고 속으로 걱정했
습니다. " 하고 웃고 "어쩌면 그렇게 수단이 용하시오. " 하고 칭찬하였다. 오상
궁 이하 여러 상궁들이 난정의 뒤를 따라 대비 침전에 들어오니 대비가 "너희들
은 무슨 큰일이 나도 모르고 있겠다. 가끔 와서 들여다 보지도 못하느냐? ” 하
고 무정지객으로 나무란 뒤에 저녁 수라를 들이라고 하여 대비가 수라상을 받았
을 때, 궁중이 갑자기 술렁거리어서 무슨 일이 있는가 알아보라고 대비가 오상
궁을 내보냈더니 오상궁이 즉시 도로 뛰어들어오며 "큰일났습니다. " 하고 소리
를 질러서 대비의 손에 들었던 수저는 저절로 자리 위에 떨어졌다.
15
그날 밤에 경복궁 안에 화재가 나서 사정전으로부터 남편은 몰수히 탔는데,
백관의 조회를 받는 근정전이 타고, 근정전 앞에 있는 근정문이 타고, 근정문 남
편에 있는 홍례문이 타고, 근정전 좌우에 있는 융문루와 융무루가 모두 타서 침
전인 강녕전이 광화문 밖에서 들여다보이게 되었다. 불이 났을 때에 알기는 곧
알았으나 북악에서 내려부는 바람이 불의 형새를 돋아서 걷잡을 사이도 없이 삽
시간에 이리저리로 옮겨붙었다. 불이 가까운 곳에서는 와글와글하고 불이 먼 곳
에서는 술렁술렁하다가 시각내에 가까운 곳 먼 곳 할 것 없이 온 궁중이 물끓듯
하였다. 대왕대비는 여러 상궁돌의 부축으로 침전 밖에 나서서 불타는 것을 바
라보는데 불길이 안으로 서리어 연기만 무럭무럭 날 때에 "거진 잡히는 게다. "
하고 옆에 사람을 돌아보다가 불머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며 불똥이 사
방으로 튈 때는 "저걸 어떻게 하나?“ 하고 하늘만 우러러보았다. 대전에서는 내
관이 들어오고, 왕대비전에서는 궁인이 오고, 왕비전에서도 궁인이 오고, 빈이
진둥한둥하며 오고, 공주와 부마가 창황하게 들어오고, 그 외에도 문안 오는 사
람이 많았다. "얼마나 경동되셨습니까? ” "대단히 놀랍시지는 않으셨습니까? “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문안을 드리는 중에 쉬 하는 소리가 나며
왕이 몸소 문안을 들어오는데 왕의 뒤에 윤원형이 따랐었다, 대비가 원형을 보
고 수어 수작한 뒤에 "이 침전은 무사할까?“ 하고 물으니 원형이 "강녕전까지
는 염려 없을 줄 압니다. 풍세를 보아도 불이 북편으로 올 리 없을 뿐 아니오라
내금위 군사를 풀어서 사정전 뒤에 진을 치다시피 하고 불을 막습니다. " 하고
대답을 아뢰고 "야기가 좋지 않사오니 침전에 듭시지요. " 하고 말씀을 여쭈어서
대비는 왕을 데리고 침전 안으로 들어가고 여러 퉁인들은 그대로 밖에 섰는데,
오상궁이 윤원형의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난정이 찾는 줄을 짐작하고 "정경부
인을 찾으십니까? ” 하고 물으니 원형이 "그렇소. " 하고 대답하고 곧 "어디 있
소?" 하고 물었다. "고대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디를 가셨을까? “ 하고 오상궁이
휘휘 돌아보다가 "급한 볼일이 계셔 가신 거로군. " 하고 혼잣말하니 원형 큰 뒤
보러 간 줄로 짐작하고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때 근정전이 한
참 타는 중이라 청기와 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오상궁은 난정을 찾아보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생각은 곧 잊어버리고 "저것이 청기와 튀는 소리라지. 상기와 보
다 소리가 더 무섭구려. " 하고 옆에 있는 다른 궁인과 지껄이기를 시작하였다.
"여기까지 대낮같이 환하니 사정전 근처는 말할 것이 없겠지. " "여보, 궁중은
고사하고 온 서울이 대낮 같을 것이오. " "아우성 소리는 어디서 나오? ” "불
끄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지요. " "큰 난리가 쳐들어온 것 같구려. " "난리는 겪
어보지 못했지만 이보다 더 소란할라구. " "오늘 밤은 잠자기 틀렸지? “ ”서울
안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잠들 자지 못할 거요. " 하고 눈으로는 불구경들
하면서 입으로만 지껄이는데 왕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오상궁의 뾰족한 입부
터 꼭 다물게 되었다. 왕이 나간 뒤에 왕대비가 함께 와서 대비를 뫼시고 섰다
가 젊은 왕비가 대비 앞에 놓인 수라상을 가리키며 말이 없이 왕비를 돌아보니
왕대비가 앞으로 나서서 "수라상을 치우랍시지요. " 하고 말씀하여 대비는 "혼이
나갔네그려. 대전이 이때까지 앉았다 나갔는데도 수라상 치울 생각을 못했구나.
" 하고 곧 상궁들을 불러서 수라상을 치우라고 말하다가 저녁밥 아니 먹었다던
난정을 생각하고 "우의정댁 정경부인은 어디 가셨느냐? “ 하고 물어서 상궁들
이 "모르겠습니다. " 하고 대답하니 "좀 찾아보아라. " 하고 말하여 오상궁 외의
몇 상궁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대강대강 찾아보았으나, 난정은 간 곳이 없다.
16
대비는 난정이 간 곳 없단 말을 듣고 “어디를 갔겠느냐? 너희들이 잘 찾아보
지 않은 것이지. " 하고 상궁들을 나무랐다. 난정이 대비에게 긴한 것을 평소에
속으로 시새워하는 김상궁이 "화재 피해서 나갔는가 보오. " 하고 느런히 섰는
박상궁에게 말하는 것을 대비가 귓결에 듣고 "피하기는 무얼 피한단 말이냐? 여
기 있다가 타 무엇할까 보아서? 소견없는 소리 작작 해라. " 하고 김상궁을 꾸짖
었다. 타 무엇한단 말은 타죽는다는 말을 구기로 피한 것이다. "겁많은 사람이면
알 수 있습니까? ” "너희와 같이 못생긴 사람이 아니란다. " "나가시지 않았으
면 어디 계셔야 합지요. " "종작없는 소리 지껄이지 알고 나가서 잘 찾아보아라.
" 하고 대비가 말하여 김상궁이 난정을 찾아나갈 때에 오상궁을 돌아보고 “먼
저 어디어디로 찾아다니셨소? ” 하고 물어서 오상궁이 "자미당에도 가보고, 양
심당에도 가보고, 경회루로 불구경 나가셨나 하고 누 앞에 가서 소리도 질러 보
았지만 대답이 없습디다. " 하고 말하니 김상궁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
다. 김상궁이 두어 곳에 가서 물어본 뒤에 보우의 거처하는 곳에 와서 보니 섬
돌 위에 눈에 익은 난정의 신이 놓여 있는데 방의 아래 윗간 영창문은 모두 닫
히어 있었다. 방 밖은 밤 아닌 세상이나 방안에는 작은 촛불도 없고 방 밖은 소
란한 세상이나 방안에는 가는 말 소리도 없었다. 김상궁이 고양이 컬음으로 소
리없이 섬돌 위에 올라가서 방 안 동정을 엿보려다가 그림자가 영창에 비칠 것
을 겁내어서 다시 슬금슬금 기어내려오는데, 김상궁은 몸집이 있는 사람이라 높
은 섬돌을 내려을 때는 올라갈 때와 달라서 하마터면 굼벵이 구르듯이 굴러떨어
질 뻔하였다. 김상궁이 뚱뚱한 몸을 흔들며 부지런히 걸음을 걸어 대비 침전에
돌아와서 "스님 방에 기십디다. " 하고 대비께 고하였다. "그 방에서 무엇하더
냐? “ "그 방에 또 누가 있더냐7" 하고 대비가 연하여 묻다가 김상궁이 대답이
없이 싱글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내가
부른다고 말했느냐? ” 하고 말을 물으니 김상궁은 "말씀하기 어려워 그대로 왔
습니다. " 하고 짧은 목을 펴 움츠려들이면서도 여전히 싱글거리었다. "일껀 부
르러 간 사람이 부르지도 않고 왔단 말이냐? “ 하고 대비는 김상궁에게 화를
내고 다른 상궁들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가서 곧 오라고 불러라. " 하고 말하여
오상궁이 간다고 나섰다. 난정이 오상궁의 뒤를 따라 대비 앞에 와서 "부르셔 계
십니까? ” 하고 살금살금 대비의 눈치를 살펴보니 대비는 눈썹이 일어서고 콧
방울이 벌렁벌렁하였다. 대비가 아무 말이 없이 한동안 지난 뒤에 "그 방에서 무
엇했느냐? “ 하고 물으니 난정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아까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문안을 들어옵는데 스님은 현형도 아니하옵기에 무얼 하옵는가 보고 오려
고 스님에게를 갔었습니다. 스님은 그때까지 화재 난 것도 몰랐었는지 궁중이
왜 소란하냐고 묻습디다. 큰 화재가 나서 상금 잡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였삽더니
스님은 그러냐고 한마디 말씀하옵고는 옛날 어느 큰 장사의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장사가 지각없는 아들들을 죄어 집 밖으로 데려 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옵고, 일체중생이 모두 불집 속에서 사는 격이라고 길게 설법하옵디다.
마마께 여쭙고 가지 않은 까닭으로 곧 일어서려 하온 것이 스님의 이야기와 설
법이 재미가 나서 한동안 앉았었습니다. " 하고 언변 좋게 말하는데 대비는 네
말 듣기 싫다는 듯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눈을 지그시 뜨고 "그래, 재미있는 설
법을 너 혼자 들었느냐? “ 하고 난정의 얼굴을 바라보니 난정은 "왜 혼자는이
요? 스님의 이중꾼 두 사람과 같이 들었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실
은 난정의 대답과 달라서 보우의 시중드는 궁인들은 화재 났다는 통에 밖으로
뛰어나오고 방에 없었던 것이다. 대비가 흘저에 "내가 머리가 아파서 좀 조용히
누워 있고 싶으니 너희들은 다른 방에 가 있거라. " 하고 말하여 왕대비와 왕비
와 난정과 여러 상궁들이 모두 대비 침전에서 물러나을 때에 대비는 다리를 주
무르라고 오상궁 한 사람을 머물렸다.
17
오상궁이 난정을 부르러 갔을 때 난정은 불 없는 방 속에서 한동안 부스럭거
리고 나왔었다. 난정이 오상궁의 수상히 여길 것을 염려하여 정답게 오상궁의
손을 잡고 깜작거리는 눈과 살랑거리는 머리로 남에게 말 말라는 뜻을 알리었더
니 오낭궁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까지 끄덕이었었다. 그러나 대비가 오상궁 한
사람을 침전에 머물러 둘 때, 난정은 남모르게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상궁이 한번 뽀족한 입을 잘못 놀리기만 하면 십여 년 궐내 출입이 일조에 막히
게 될지 모르는 판이라 난정은 만사에 경이 없이 바작바작 속을 태우고 있었다.
오상궁이 침전 안데서 늘어지게 한 동안을 있다가 나와서, 난정을 보고 눈짓하
며 자기 처소로 들어가니 난정이 오상궁의 뒤를 따라들어가서 두 사람은 조용히
귓속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마께서 꼬치꼬치 캐어물으십디다. " "꼬치꼬치 어
떻게? “ "방에 불이 키었드냐 꺼졌드냐? 스님이 앉았드냐 누웠드냐? 미주알고
주알 다 캐어물으시는데 거짓 말씀하느라고 아주 혼이 났소. " "내 뒤를 싸주셨
소? ” "뒤를 싸드리지 않을라면 애초에 거짓 말씀을 할 까닭이 있나요. " "고맙
소. 진정으로 고맙소. " "그런 말씀은 고만두고 말이나 외착나지 않게 하시오. "
"무어라고 말씀하셨소? “ "방에 불은 키어 있고 스님은 좌장을 짚고 앉아 있고
웃간 미닫이 한쪽이 열리어 있는데 섬돌에 올라설 때에 스님니 먼저 보고 어째
왔느냐고 묻더라고 말씀했소. 그런데 김상궁이 부르러 갔던 것을 아셨소? ” "몰
라요. " "김상궁이 나보다 먼저 갔었소. " "김상궁이 알았으면 탈이 났구려. " "
혹시 마마께서 물읍시거든 김상궁이 와서 아무 말도 없이 들여다보다가 갔다고
만 말씀하시오. 그 뚱뚱이가 거짓말을 일쑤 해서 마마께 흔히 꾸중을 듣는 터이
니까 우리 두 사람의 말만 맞으면 대비께서는 김상궁의 말을 거짓말로 아시게
될 것이오. " "고마운 말씀 이루 다 할 수 없소, 결초보은이라도 하리다. " "별말
씀을 다 하시오. " "우리들이 오래 같이 앉았다가 김상궁에게 들키기나 하면 재
미 적지 않겠소. "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들키어도 관계 없지요. " 하고 오상궁
이 병어 입 모양으로 입불을 모으고 호호 웃으니 "여보. " 하고 난정이 손가락으
로 오상궁와 입술을 건드리고 곧 손바닥으로 저의 입을 막았다. "인제 나는 나
가겠소. " 하고 난정이 오상궁의 처소에서 나와서 밖에서 서성거릴 때에 대비가
침전으로 불러들이었다. 난정이 오상궁과 짬짬잇속이 있건만도 침전에 들어갈
때는 오히려 서먹서먹한 모양이더니 얼마 뒤에 침전에서 나을 때는 희색이 만면
하였다. 난정은 아양스러운 거짓말로 대비의 의심을 풀었던 것이다. 난정은 소란
한 하룻밤을 궐내에서 새우고 이튿날 식전에 여러 궁인들과 같이 다니며 불탄
자리를 구경하고 저의 집으로 나왔는데 옷을 갈아입으며 곧 퇴침을 베고 누우니
전날 밤의 경겁하고 심려하고 피로한 일이 모두 꿈속과 같았다. 난정은 아침도
아니 먹고 대낮을 밤중삼아 늘어지게 잠을 잤다. 보우가 어디서 왔는지 옆에 와
서 누우려고 하는데 원형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중에 "중
놈이, 개 같은 중놈이. " 하고 호령하는 원형의 목소리가 들리며 원형이 칼을 들
고 들어서서 보우의 목을 찍으려고 하였다. 보우가 두 손으로 목을 끼어안고 쩔
쩔 맬 즈음에 난데없는 불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불이야, 불이야! "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꿈에도 불이 났나. " 하고 웃는 소리에 난정이 눈을 뜨고 살펴보니 원
형이 저의 머리 맡에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오셨세요? “ 하고 난정이 일어 앉
아서 시녀를 불러 양치물을 가져오라 하여 양치를 하고 난 뒤에 "어떻게 곤한지.
" 하고 혼잣말하니 "곤한 중에 또 불 끄느라고 애쓴 모양이지. " 하고 원형이 웃
었다. "어느 때 궐내에서 나오셨세요? ” "나는 나온 지 얼마 아니 되었소. " "
화재 출처는 사실하여 보았나요? “ "사실해 보아야 알 수가 없어. 모두들 말이
도깨비불이라고 하드군. " "요전에 궐내에 도깨비 장난이 심했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 "도깨비불이고 보면 보우는 탈이지. “ "왜요? ” "도깨비 장난을
금지하는 놈이 도깨비불을 나게는 못하든가.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그놈을 궐
내에서 떨어내고 말 터이야. " 하고 원형은 입을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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