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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믿는 품이 감나무에 배가 열린다 하여도 의심하지 않
고, 보우의 말을 좇는 품이 소금섬을 물로 끌라 하여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체한 불법을 진작하려고 하여 선종, 교
종의 구별을 세우고 양종 선과를 설시하기로 작정하였다. 대왕대비가 왕을 데리
고 정전에 전좌하고 영의정 심연원과 좌의정 상진과 및 우의정 윤원형을 함께
불러들이어 양종 구별할 일과 선과 보일 일을 문의하니 심연원은 "선종, 교종의
구별은 전에도 있던 일이올시다. " 하고 간단하게 말씀을 아뢰고 상진은 "계행
있는 중은 선과에 잘 응시하지 않을 듯하외다. " 하고 말씀하다가 대비가 "선과
에 응시하면 계행이 깨어지나? 나는 계행 있는 중을 많이 뽑게 할 작정이니 대
신의 말이 맞나 나의 말이 맞나 두고 봅시다. " 하고 미안한 기미가 있게 말씀하
여 "노신의 소견에는 중에게 과거가 당치 않은 일이옵기에 한마디 말씀을 아뢰
온 것이올시다. " 하고 순순하게 말씀을 아뢰고 윤형원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우상은 의견이 어떠한고? “ 대비의 하문에 "신은 별 소견이 없습니다.
" 하고 한마디 대답을 아뢰을 뿐이었다. 대왕대비가 대신들의 이론이 없는 것을
보고 곧 다시 보우와 의논하고 광주 봉은사를 선종대찰로 정하고 양주 봉선사를
교종대찰로 정한 뒤에 양종 선과를 설치할 터이니 정하여주는 각도 사찰에서 초
시를 보고 서을 와서 회시를 보게 하되 이름 있는 중으로 선과에 빠지는 자가
없게 하라고 팔도 사찰에 영을 내리었다. 양사 옥당이 함께 나서서 국가에서 이
교를 숭봉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육조 백관들
이 나서서 정론으로 보우의 죄를 말하고 또 관학 유생들이 나서서 상소로 보우
를 죽이자고까지 청하였으나, 대비의 맘은 움직일 까닭이 없었다. 이때 대왕대비
는 눈 안에도 보우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맘 안에도 보우 한 사람이 있을 뿐
이라 보우 한 사람의 한마디 말이 대비에게는 천 사람 만 사람의 천 마디 만 마
디 말보다 더 힘지던 것이다. 유상들의 보우 죽이자는 상소를 보고 대왕대비가 "
맨망스러운 자식들 같으니, 공부는 아니하고 상소질은 무어냐? 그까짓 것들은
공부시켜 놓아도 소용이 없으니 다 내쫓차버려라. " 하고 화가 꼭뒤까지 나서 유
학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게 되어도 안위시키지 아니하였고, 한동안 지나
서 화가 조금 풀린 뒤에야 조관 부형 된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 자제를 관으로
보내게 하였다. 양사 옥당이 꾸준히 다투는 중에 각처에서 선과 초시를 마친 중
들이 회시를 보려고 서울로 모여들었다. 선과 회시의 과목은 강경과 제술이요,
시관은 허야당 보우대선사이었다, 문과 회시제도와 방사한 제도로 선과 회시를
보이어 선과에 급제 몇 사람과 교과에 급제 몇 사람을 각각 뽑은 뒤에 선과 급
제는 선사라 칭하고 교과 급제는 대사라 칭하게 하였는데, 이때 선과의 장원급
제는 청허랑 휴정선사이고 교과의 장원급제는 송운당 유정대사이었으니 송운당
은 청허당의 제자인데 선생 , 제자가 다같이 명승이었다. 이때 선과의 득인한 것
은 선종, 교종의 두 장원만 가지고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니 선종의 장원급제
청허당 휴정은 곧 임진왜란에 일국도대사 팔오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로 승
병을 통솔한 서산대사이고, 교종의 장원급제 송운당 유정은 곧 임진왜란 후에
사신으로 일본 가서 난중에 잡혀간 남녀 인구 삼천여 명을 찾아내온 사명당이
다. 청허당과 송운당이 뒷날에 장한 중이 된 것은 차치하고 그때 벌써 이름이
높아서 선과의 두 장원이 모두 비범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승속간 적지 아니하
였다. 당시 문신 중에 가장 총명한 체하던 윤춘년은 선과 창방하던 날까지 "인재
를 뽑는 것은 경권 보는 것과 달라서 인물을 감별하는 안식이 있어야 할 터인데
보우가 그 안식이 있을까? ” 하고 의심하던 사람이 두 장원을 보고는 맘이 절
로 꺾이든지 이 사람 저 사람을 대하여 여러 번 "보우 화상의 인물 감식이 제법
입디다그려. " 하고 보우의 시관 노릇 잘한 것을 칭찬하였다. 윤춘년은 청허당과
계분을 맺어서 이조판서로 조명하느라고 문에 잡객을 들이지 아니할 때, 청허당
이 오면 반드시 맞아들이어 경도하는 벗과 같이 대접하였다. 대왕대비는 선과의
득인한 것을 문무과 득인한 것보다 일층 더 좋아하여 장원 이하 급제들을 나라
에서 대접하되 무과의 선달은 고사하고 문과의 급제로도 바라지 못할 만큼 모든
절차를 융숭하게 하였다. 대왕대비가 보우를 보고 급제들의 신래 불릴 것과 유
가 돌릴 것을 의논하니 보우가 대번에 "신래는 고만두고 유가나 돌려보십시다. "
하고 말하였다. "신래도 불리는 것이 좋지 않소? 대사가 궐내에서 불리시구려. "
"점잖은 중들을 갖다가 웃음바탕 만들 것이 있습니까? 고만두시지요. " "까까중들을
눈에 왕방을 퉁방을 그리고 이리위 저리위 하고 끌고 다니면 구경스럽겠네. " 하고
대비가 한번 깔깔 웃은 뒤에 말씀을 이어 "그래, 신래는 대사가 좋아 아니하니 고만
두기로 하고 유가나 잘 돌려봅시다. 유가는 어떤 절차가 좋겠소? 문과 급제들과 같이
하라 하리까? “ 하고 의향을 물으니 보우는 "유가도 문무과와는 좀 달리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조대왕 때 흔히 행하시던 전경법이란 것을 참작해서 새로 절차를
정하십시다. " 하고 말하였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좇아서 새로 절차를 마련하여 유가 돌리게 하였는데 전
경법을 참작하니만큼 절차가 서로 근사하였다. 앞줄에는 수많은 기잡이와 일산
잡이를 쌍쌍이 세우고 그 뒤에 부처 태운 벌린 연을 뜨게 하는데, 연의 앞줄에
는 조라치들이 삼현육각을 잡히며 가고 연의 좌우에는 중들이 판에 받친 향로를
받들고 가게 하고 뒷줄에는 조그만 상좌중을 큰 북 실은 수레에 태워서 따라가
게 하고 장원 이하 급차들은 갖은 안장을 지운 사복 말들을 타고 좌우편 중들의
앞을 서게 하였다. 유가 돌러 나갈 때에 대왕대비는 왕대비와 왕과 왕비 외에
보우와 및 여러 궁인을 데리고 광화문 문두에 나와 앉아서 떠나보내는데, 등등
북소리가 나면서 조라치의 풍류 소리가 나고 한동안 뒤에 또 등등 북소리가 나
면서 중들의 송주 소리가 나서 둥둥 소리가 나는 대로 조라치의 풍류 소리와 중
들의 송주 소리가 번갈아 들리었다. 유가돌이가 늦은 아침때 육조 앞을 떠나서
거리를 돌다가 태평관에서 점심 먹고 다시 거리를 돌기 시작하여 재를 지우고
육조 앞으로 돌아와서 대왕대비와 보우가 다시 광화문두에 나와 앉은 뒤에 각기
흩어졌는데, 이 날 쉬는 곳의 장막은 전설사에서 등대하고 태평관의 점심은 예
빈시에서 공궤하고 어둔 뒤의 횃불은 사재감에서 대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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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가 대왕대비를 끼고 한바탕 뒤설레를 치는 바람에 불교가 왕성하여 팔도
사찰이 일신하게 되었다. 이때 시골 있는 선비들은 옥하사담이 많았는데 이황과
같이 간정한 사람은 당초에 서울 소식을 귀 막고 듣지 아니하려고 할 뿐이었지
만, 조식은 몸이 시골에 물러와서 있을지언정 맘으로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
라 제자들을 데리고 앉았다가 말이 나랏일에 미치어 "원형 하나도 과하거니 보
우까지는 심치 아니하냐. 국가는 장차 어찌 되며 생령은 장차 어찌 되랴. " 하고
주먹으로 자리를 눌러 팔을 세우며 눈물 흘릴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조식이 혼자 칼을 안고 앞마루에 앉아서 슬피 노래를 부
르는데 이때 마침 "남명 선생이 계시오? “ 하고 문 밖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사
람이 있었다, 남녕은 조식의 아호이다. 남명이 칼을 놓고 일어서서 옷을 가다듬
는 중에 그 사람은 벌써 마당 안에 들어섰다. 남명이 달빛 아래 걸어오는 얼굴
을 바라보며 "형중이 아닌가? 이거 웬일인가? ” 하고 뜰 아래로 쫓아내려와서
맞아올린 사람은 곧 이지함이다. 두사람이 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웬일인가? “
”웬일이라니? 자네가 보고 싶어 찾아왔네. " "토정이 갑갑하든 것일세그려. " 하고
남명이 껄껄 웃었다. 이지함은 자기의 사는 집을 담집으로 치고 그 지붕을 평평하게
하여 정자를 삼고 지내는 까닭으로 별호까지 토정으로 행세하는 터이라 "이 몸이
갑갑한들 어찌하나. "하고 토정은 별호를 빙자하여 집 말을 몸으로 대답하고 나서
역시 허허 웃었다.
"자네가 내게로 바로 오는 길인가? “ "아니 보은을 들렀었네. " "보은을 들렀
어? 건숙이 잘 있든가? ” 하고 남명이 묻는 사람은 보은 종곡에 사는 처사 성
운이요, "자경이도 나와서 며칠 동안 잘 놀다 왔네. " 하고 토정이 말하는 사람
은 현감으로 있던 성제원이니 성처사와 성현감은 모두 인품이 높아서 남명과도
서로 친한 터이다. "자네 말을 들으니 거문고 안은 건숙이와 술잔 잡은 자경이가
곧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이 자네 말을 많이 하였었
네. " "속리산에 들어갔든가?“ "나 혼자 한 번 문장대에 올라갔었네. " "요전에
나와 같이 갔을 때도 자네 혼자 올라가더니 또 올라갔단 말인가? 자네의 섭위
잘하는 것도 못쓸 버릇이니. " "쓸 버릇, 못쓸 버릇 가르는 법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지금 내가 시장하니 밥 좀 지어 내오라게. " 하고 말하는 토정의 얼굴에는
시장한 모양이 보이었다. "내가 불민해서 미처 묻지 못하였네. " "물어 무어하나,
내가 말하는데. " "그리할까7 " 하고 남명이 한번 웃고 곧 하인을 불러서 밥을
지어 내오라고 안에 통기하였다. "좀 눕게.” 하고 남명이 방에서 목침을 집어다
가 권하니 "눕도록 피곤하지는 아니하니 걱정 말게. " 하고 토정은 눕지 아니하
였다. "서을 있을 때 소위 선과 창방이란 것을 구경하였나? “ "점잖은 사람이
누가 그걸 구경한단 말인가. " "보우는 문교를 그르치니 국사는 말이 아니지. "
하고 남명이 한숨을 쉬니 "보우가 국정까지 그르친다네. 대왕대비의 하시는 일이
모두 보우의 주장인 줄을 모르나. 보우 앞에는 원형이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
이데. " "신돈이가 또 하나 났군. " "신돈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 십여 년
전에 한번 이장곤 이판서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이판서 말이 신돈 같은 중
놈이 장차 나온다고 하고, 어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자기가 선생같이 믿는
사람이 앞일을 능히 짐작하여 말하더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네그려. " "미리
알았으나 미리 몰랐으나 그런 원숭이 나기는 일반이라면 미리 아는 것이 소용
있나?" "하여튼지 말이 맞는 것이 신통하지. " "지금 조정에는 이존오 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 하고 남명이 개탄함을 마지 아니하는데 토정은 "양사 옥당과 육
조 백관과 관학 유생이 모루가 다 이존오시지. " 하고 허허 웃고 "우리는 구전성
명이나 하지 별수 있나. 나도 조카 자식들을 데리고 시골 가서 숨어 살 작정일
세. " "언제는 우리가 세상에 나섰는가? ” 하고 남명은 토정을 바라보며 입맛
쓴 웃음을 웃었다.
6
토정이 석반을 마친 뒤다. 밤이 들수록 달빛은 더욱 밝아 대낮 같으나 바람이
조금 선선하였다. "선선하거든 방으로 들어 가세. " "달이 아까우니 잘 때나 들
어가지. " "길에 지쳤을 터인데 곤하지 아니한가? “ "자경이와 같이 보름씩 잠
안 자고는 배기지 못하지만 설마 길에 좀 지쳤다고 곤하겠나. " 하고 토정이 말
하는 것은 성현감의 일이니, 성현감이 어느 중을 데리고 잠 안 자기를 내기하여,
그 중은 열사흘 만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성현감은 보름을 채우고도 평일과
별로 다름이 없이 기거한 일이 있어서 그 정력의 절등한 것을 친구들 사이에서
칭도하는 터이였다. "자경이는 별사람이야. " 하고 남명이 토정의 말 뒤를 이으
니 토정은 별사람이란 말이 자기 뜻에 맞는 듯이 "참 그러해, 별사람이야. 내가
연전에 자경이와 같이 뉘 집에 갔다가 광대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광대가 소리
를 시작해서 단가 한 곡조 다하기도 전에 자경이가 그 광대를 돌려보내자고 주
인더러 말하데그려. 우리야 까닭을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왜 돌려 보내라느냐
고 묻지 않았겠나. 자경이 말이 이 소리가 상고 있는 사람인 것 같으니 소리 시
키지 말고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데그려. 나중에 알아본즉 그 광대의 어
미가 먼 곳에 있었는데 그날 밤에 통부가 왔더라네. 자경이가 성음을 살필 줄
아는 것이 확실하지. " 하고 한동안 앉았다가 "별사람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
네. " 하고 다른 이야기를 거내었다. "내가 둘쨋번 제주를 갈 때에 중 동행을 만
났었는데 그 중이 별 사람이야. 문식도 유여하거니와 의약복서와 천문지리를 모
르는 것이 없데그려. 그 중이 지승 살았으면 나이 근 칠십 했을 것일세. 그 중이
상좌 같기도 하고 상좌 같지 않기도 한 아이놈 하나를 데리었었는데 그 아이놈
역시 별사람이야. 한라산 올라갈 때 저의 선생을 등에 업고서 올라가는데 홀몸
으로 가는 사람보다 더 빨리 올라가데. 저희의 말을 들으니까 백두산에도 그놈
이 선생을 업고 올랐었더라네. " 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남명이 "장사일세
그려. " 하고 말하여 토정은 그 말을 따라서 "장사이고말고. 엄장도 예사 사람보
다 크지만 무쇠로 만든 것 같은 두 팔뚝이 천 근의 힘이 들어 보이데. " 하고 "
그런데 그놈에게는 양반이 비각이야. 양반이라면 당초에 만나 보기를 싫어하고
말말끝에 양반의 말이 나기만 하면 함부로 욕설을 하는데 선생 되는 중이 항상
타일러 못하게 하드군. " 하고 말을 달리 돌리었다. "불학무식한 상것들의 자식
이 그렇기가 쉽지. " "백정의 자식이래. 내가 아까 이야기하려다가 미처 못했지
만 그놈이 이장곤 이판서의 처족이란 말을 들은 법해. 이판서를 만나면 한번 물
어본다는 것이, 이것을 물어보려고 일부러 찾아갈 까닭은 없어 이내 못 물어보
았어. " "그렇기가 쉽지. 이판서의 부인이 함경도 백정의 딸이라니까. " "이판서
는 작고한 지 오래지만 그 부인은 아직 살아 있겠지? “ "아니, 이판서의 부인이
작년 가을에 죽었다지. 요전에 이판서 집 이웃에 사는 일가 사람이 문인들과 이
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은 일이 있네. " "백정의 딸 봉단이로서 일품명부가 되었
던 유명한 부인이 작고했네그려. 인물이 잘났었더라는걸. " "인물이 낫기에 천인
의 딸로 정경부인까지 바쳤겠지. 치가범절도 무던했었더라네. " 하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이판서 부인의 말을 가지고 수작하던 끝에 남명이 "곤하지는 않더라
도 고만 방에 들어가 눕지. " 하고 칼과 목침을 거두니 "아무리나 하세. " 하고
토정이 몸을 일으켰다. 주인과 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으로 들어간 뒤에는
빈 마루에 달빛만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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