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9. 12

카지모도 2016. 6. 2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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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8 1989. 12. 1 (금)


이 해도 종장에 접어들다.

내 세월은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누나.

내 생명에 대하여 진지하게 의식하기 시작한지 어느덧 3년여, 인생의 숨겨진 뜻을 흘낏 들여다 본지 어언 3년여.

내 생명은 얼마나 더 진지하여지고, 신앙은 과연 내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지, 소망있다는 삶의 행태 또한 주님의 덕목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는지.

아득하여라.


미진한 수면.

겨울 새벽에 내 의식을 지배하고있는바 그것은 순결한 이미지의 감동이 아니다.

냄새나도록 진부하며 저자거리의 어수선함이 가득한 질척질척한 진흙탕의 그림, 덕이 끼어들 여지없는 현실의 사슬에서 단호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허우적거림,


그러나.

조금 조금 내게 미치는 그 빛의 테두리, 그 향그러운 숨결.

은총의 냄새, 긍정의 분위기.

주님,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15639 1989. 12. 2 (토)


어제 SB-362 선미 Block 탑재. 해상크레인 대여한 김에 제1선대의 Block들도 운반하고.

내가 짠 전체의 신조선 공정, 이사회에서 확정.

과원들과 회식.

일어난 아침의 입 속에는 어김없이 혓바늘.

짐 리브스가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플레이어에 올려 놓고 아이들과 노닥거려도 보는 아침시간.

날씨는 많이 풀리고, 일출의 바다는 붉다.


식탁에 둘러 앉아 기도드리는 아침. 내려다 보이는 아치섬의 아침바다.

아침, 아치섬.. 얼마나 신선한 어감의 단어들인가.

새벽이 오고 이내 아침이 온다.

아침은 모든 기쁜 것들이 수런거리며 깨어나는 시간,

새들이 날아오르며 지저귀는 시간.

그리고 살아야 할것들이 살고자하는 시간.

그 살아야하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시간.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 존재의 시간.


15642 1989. 12. 5 (화)


어제 SB-360 공시운전.

선주 대만족.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

집에 돌아와 특집방송 '인간시대' 보다.

구카소라는 별명의 노인, 동숭동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파안대소하는 노인.

부디 그러한 노년을 닮을 일이다.

오세근이라는 프랑스 혼혈가수. 그의 살아온 역정과 지금 살아가는 모습.


드로우잉 아카데미 교재 오다.

많이 밀린 그림 숙제.


모차르트 레퀴엠.

시편34.

기도.


15644 1989. 12. 7 (목)


숙면 이루지 못하다.

간밤엔 어떤 기억과 억압이 만들어낸 조작된 영상에 시달렸을까?

대략 더듬어보니, 산업사회의 문화, 자본주의 속 삶의 양태같은 메타포가 있음직한 꿈이었는데.


넥타이를 매고, 자동차를 굴리며,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고,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고, 컴퓨터를 두드리고, 골프를 치면서 가장 현대적인 문화의 삶을 향유한다는 자부심.

그러나 단지 그런 양식의 삶만이 목적이 되었을 때, 이미 그는 노예이다.

어떤 존재양식의 삶을 포기한 현대라는 너울에 순치된 짐승에 다름아니다.

그의 야성, 그의 윤리의식, 그의 천래적인 아름다운 품성들은 깎이고 닳아버려, 창조성을 상실한채 통조림의 규격제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멋있는 개성이라고 착각하는 문화적 포즈들은 한낱 헛껍대기의 규격화된 동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이 산업사회가 싫다.

산업사회의 년조깊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또다른 천박한 기형인들만 양산해 내고 있는돗 하다.

이 나라의 것은.


15645 1989. 12. 8 (금)


오후 한때 엄습하는 피로감은 거의 몸을 지탱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저 아무 곳이나 쓰러져 눞고 싶을뿐.


그러나 낮의 그 피로감과는 전혀 다른 퇴근후 내 방 책상앞의 일락.

토닉워터 섞은 진로 한병. 그리고 한권의 책.

소비엩. 넘처나는 정의와 평등,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

나는 신새벽과도 같은 혁명의 순수함을 충분히 그려낼수 있을 것 같다.

계몽주의의 성공, 인간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수 있다는 신념. 고귀한 정신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이념의 깃발아래 그 승리감으로 몸을 떨었을 혁명가들.

초기의 그 순수한 이념들이 퇴락하고, 오염되고, 시행착오와 경제적인 실패를 범했을지라도 이 자본주의의 추악한 허장성세에 비하여 신새벽의 순수한 사람냄새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더 남아있지 않겠는가?

산소결핍, 산소처럼 절박하게 그리운 냄새, 새벽냄새.

모택동의 대장정이나 박경리씨의 중국기행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새벽냄새가 더욱 그리워진다.


15646 1989. 12. 9 (토)


Delivery와 진수에 어지러운 요즘의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이다.

그 어지러운 현장을 벗어나면.

어제도 역시 철수와 맥주마시고 귤 한상자 사들고 11시 넘어 귀가.

결국 오늘 아침, 내 싫어하는 허둥지둥을 맞고 만다.

내가 깨우지 않으면 이 집안은 아무도 일어날 생각들을 아니한다.

새벽은 온전히 나만의 것인가?


혓바늘이 호시탐탐 노리는 육체의 컨디션.

내 곤비함은 아랑곳없이 그러나 현장은 바삐바삐 돌아간다.

토요일, 해가 뉘엿뉘엿질 무렵 돌아오다.

집에는 S형 어머니와 Hw선생님 와 계시다.

사십넘은 사나이는 쑥스러워 방으로 숨어 들어앉아서 새벽에 못쓴 일기를 이렇게 긁적인다.


일찍 저녁먹고 녹화해 놓은 밀린 영화 볼 생각.

아마데우스.

내일은 또 현장. 다음 주중에는 하루쯤 쉬면서 그림숙제 하려하고.

혹은 그보다 소인배의 일락을 즐기고자하는 욕망 하나 숨어있음을 대번에 간파해 버리는 나.



15647 1989. 12. 10 (일)


극도의 피로감은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다.

설핏 잠이 든것같지만, 잠의 심연으로 내 온 의식이 가라앉지 못하고 물위에 뜬 기름처럼 이리저리 부대끼고 있다.

꿈- 媛이 결혼식, 김영삼씨, 규선이형.

문득 규선이형이 그립다. 친척형제중 가장 매력적인 사람, 정능의 겨울, 개척지와 같은 정능의 주택가. 규선이형이 부르는 듣기좋은 목청의 켄터키옛집. 외갓집에서 함께 엎드려 그리는 그림.

규선이형과 김영삼씨는 절친한 모습으로 장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은 꿈의 종장쯤이었는지.

덕분에 새벽 기상.

내 방의 냉기, 안방으로 물러나 책상다리로 앉아 요한1서 소리내어 읽는다.

英이는 새벽기도.

새벽 교회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의 전구가 반짝인다.


15648 1989. 12. 11 (월)


어제 일요일, J는 S형 어머니, Hw선생님 과 동래 어딘가의 침례교회예배 참석.

Hw선생님 남편이 그 교회의 음악목사님.

Hw선생님 의 온유함의 배후에는 신앙이 있었다.

英이는 교회에서 학교로 직행하고 俊이는 늦은 밤까지 독서실.

나를 제외한 식구들은 열심히 일요일을 살아냈으나 현장에 나갔던 나의 일요일은 취생몽사의 일요일.


흐린 날씨.

간밤 모처럼 숙면 이루었는가.

슈베르트 크게 틀어놓고 월요일을 맞는다.


15649 1989. 12. 12 (화)


퇴근후 집에 돌아오니 英이는 학원, 俊이는 독서실.

모처럼 늙다리 가시버시 마주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해로한다는 것은 이렇게 마주앉아 밥을 먹는 것, 이런 애틋하고 소박한 그림을 연출하는 것.


새벽.

俊이 한번 깨우면 군말없이 부스스 일어나는 기특함.

안방에 앉아 시편, 이사야서 소리내어 읽는다.

옆자리 새벽잠에 빠져있는 J에 아랑곳않고 불을 끄고 엎드려 소리내어 기도.


15650 1989. 12. 13 (수)


어제 경남조선 와 있던 Hydro-Crane을 응급적으로 빌려 Shot Blasting M/C 들어 올린다.

이제 30톤 크레인의 렌지까지 올기는 문제, 그리고 2공장까지 옮기는 문제가 관건이다.


퇴근하여 박세동, 이종숙과 마시다.

동삼동까지 와서 P대리 집에가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못생긴 P대리의 마누라 역시 무구한 생활인의 아름다움 가득.

가정이라는 곳. 가장 근원적인 인간관계의 터전.

그 곳에서 피가 생겨나고, 그곳에서 깊은 곳 의식세께가 형성되고, 그 곳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낚시를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 그곳에서 심층심리의 난마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고통스런 카인도 생겨나는 것이다.


7시 임박하여 부랴부랴 일어나 후딱후딱 해치우는 아침의 과정들.

증시는 폭락후의 반등, 거의 모든 종목 상한가.

그런데 J의 손실은 보충되려는지.


오늘 기도는 없다. 현장, 그곳에 산적하여 나를 기다리는 일감들.


15652 1989. 12. 15 (금)


현장은 불이 붙는다.

노후된 장비와 시설, 빈약한 Utility.

게다가 시설투자에 인색한 경영자의 사고방식, 그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은 가히 눈부신바 있다.

아마도 국내 어느 조선소보다도 높은 생산성일 것인데, 그 보상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SB-362 수압시험은 Cancel, 카룬소드 설득하느라 애먹다.

카마초는 미국으로 출국. 좋은 친구였는데.


15655 1989. 12. 18 (월)


일요일 오후 회사에서 돌아와 녹화된 영화 '오메가 맨' 보다.

내가 곧잘 상상하는 상황, 인류의 절멸.

정적의 거리를 걷는 홀로 남은 사람.

그러나 영화는 유치할 정도의 오락일변도의 영화.


초저녁부터 누웠으나 숙면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내용의 꿈나라를 넘나든다.

크리스마스 캐럴, 계절은 저물어가는데.

어머니는 추우실까?


다시 월요일.

월요일 아침이면 늘 무언가 황당한 느낌이 엄습한다.

순치되기 싫다고 내부에서는 외쳐대지만, 순치되어야 해라고 타이르는 또하나의 외침은 무언가.

하나님. 나의 주님이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주님의 오심.

역사 속에 오시고, 나의 실존에 개입하심.

일사부재리의 원칙.

주님은 이미 내게 오셨다.


15656 1989. 12. 19 (화)


뒤척이며 꿈 속을 헤매이다 새벽을 맞다.

기억을 못하겠지만 분위기는 슬펐다.

꿈은 확실히 그렇다. 프로이트적인 측면,곧 심층심리의 심인성 요인은 사실이다.

한편 신체의 상태, 이를테면 부담스런 상태의 위장은 자꾸 메시지를 작은 골에 보내고 귀찮게 하여 그것이 무의식속에 숨어있던 경험의 축적자료를 끄집어 내서, 편집하여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이른바 내 단골 꿈, 배변 꿈이다.


싸늘한 새벽.

화장실에서 신명기 읽다.

俊이 방에서 전도서, 시편 읽다.

아, 그렇다. 성경이 시종일관 외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그 부정적인 사상을 수용하고 있은 성경은, 모순을 극복하는 당위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존재의식의 귀납인 것이다.

시편들 역시 읽을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그렇다. 성경이 감동을 줄때는 나의 심령이 가난할때이다.

가난한 심령은 주님을 향하여 문을 두드리고, 그때 성경은 오의의 문을 열어주면서, 주님은 내게 스며드시는 것이다.


존재야. 일어나 서라. 너의 존재로써 네게 허락되어진 너의 생과 마주 서거라.

그곳에서 너는 너의 주님을 뵈어라.

소유는 다 벗어 버리고 오직 너의 가난한 심령 하나만 가지고 일어서거라.

그리고 이미 네게 닥아오신 주님과 정면 대결하여, 그 분을 너의 존재로써 껴안아라.

새 삶을 이루라.


15657 1989. 12. 20 (수)


어제 SB-362 Tank 검사 고비를 넘기다.

오늘 After Peak Tank 수압시험만 마치면 진수공정은 어찌어찌 지킬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부서장회의의 망년회.

오늘 어머니 오신다고.

토요일인 23일은 아이들 교회에서 칸타타 연주.

그리고 오늘, 선주감독 일본인 사또 올 것이다.

그를 또 어떻게 사귀어서, 순조롭게 공정을 이끌어야 하는지.


15658 1989. 12. 21 (목)


어제 어머니 오시다. 전화로 듣는 목소리, 어느 새 칠십을 성큼 넘기신 그 목소리.

40을 갓 넘어선 내 육체의 꼬락서니가 이러할진대, 어머니의 쇠잔하심은 어떠하겠는가.

늙어 이윽고 소멸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어머니일것인데 상상만으로도 처연하지 아니한가.


오늘 부서장회의의 망년회. 쓰잘데없는 유치함과 이기주의들이 난무하는 자리일게다.

차라리 거기에 참석치 말고 어머니께나 갈까하는 작정도 없지 아니하다.


어제밤도 뒤척뒤척.

몸은 무척이나 피곤하지만 깊은 잠은 이루지 못한채 배겟있에 흠뻑 침을 흘린다. 비몽사몽.

참 추한 수면이다.


15659 1989. 12. 22 (금)


어제 부서장회의의 모임은 빼먹고 어머니께.

어머니가 좀 더 진실하셨고, 형이 좀 더 성숙하였고, 내가 좀 더 진지하였더라면 우리의 생은 좀 더 달라졌으리라.

우리 가족은 참 어리석었다.

아니, 지금도 그 어리석음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칠십이시나 아직 건강무쌍한 모습이 그저 좋기만한 나의 어머니.


아침 식탁에서의 주기도문과 잠언 낭독은 형식에 흐르고 만다.

이래서는 안된다.

J의 심령 속에 신앙의 싻이 트게 하기위해서라도 이래서는 안된다.

형식주의, 외식주의, 문자적인 읽기로서는 그 오의는 희석되고 만다.

사랑을 담고, 진정을 담고, 신앙의 열정을 답고.


세밑. 들 뜬 거리, 들 뜬 감상.

그리고 들 떠 가벼운 내 영혼의 무게여.


15661 1989. 12. 24 (일)


어제는 쌀쌀한 겨울비.

겨울비가 내 정서에는 좋기만 하지만, 현장의 상황은 애타게 비가 그처주기를 비는 내가 되게 한다.

아이들 할머니께.

英이 공연은 성공했는지.


달콤한 잠이룬다.

방학의 첫날.

떠들썩한 집안 분위기.

얼마나 좋은가. 웃음소리 들리는 가정이란.

그런데 나는 휴일의 회사에 나가야 한다.

60톤 크레인 수리, 이 추운 날 작업해야 하는 근로자들을 생각하라.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예수님 이미지가 아닌. 알록달록, 울긋불긋, 반짝반짝...

색색의 즐거움, 하얗고 빨간 색의 앙상블... 크리스마스.

중학교 졸업무렵, 부산내려오기 전날.

명동의 시청각교육관, 철주와 또 누구누구와 학교를 땡땡이치고 보았던 영화.

빙 크로스비 주연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바로 그 날 아마 눈이 왔었다.

그 추억이 애틋하게 떠오른다.


15662 1989. 12. 25 (월)


성탄절.

어제 英이와 俊이.

교회에서 밤을 꼬박 새운후 새벽 집집마다 돌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6시 넘어 집에 돌아온다.

간 밤의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었는데 아이들은 씽씽하다.

오늘도 역시 바쁜 아이들의 교회일과.

아비 어미는 이토록 교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년의 성탄절은 조금 더 굳센 신앙으로 맞을수 있을는지.

그렇지만 예수님은 성탄절에만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아기예수는 태어나신다.


덴뿌라 시켜놓고 기울이는 한잔의 술.

신이 태어나신 안온한 한낮의 일락.

보오들레르는 예수님께 있어서 누구일까.

기쁜 포도주? 타락한 죄인?

디오니소스보다 보오들레르는 훨씬 악마적이지만, 그것은 탐미의 악마이므로 성경의 이른바 마귀하고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15665 1989. 12. 28 (목)


어제 부서 망년회.

몹씨 취하여 돌아와 오늘 출근은 포기한다.


"통히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없는 껍질이요, 그 진보라는 것은 세속주의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의로운 피난처도 되지 못한다.

다만 한 수용소요, 한 문화기관일 뿐이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된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믿음이란 그저 말로나 외모의 행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전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종래 자기표준, 인간중심으로 살던 것을 그리스도 표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일이다.

자기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일이다.

그런고로 신앙은 안에 있는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며, 양심에 있고 행동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영혼이요 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법규를 다 지키고 외양의 행동을 선히 하여도 '나'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이상 신앙은 아니다." -김교신 '성서조선'-


15667 1989. 12. 30 (토)


이제 꼭 하루를 남겨놓은 그야말로 세밑.

보너스 때문에 시작한 J의 남편을 향한 그 직선적인 말투, 조금의 머뭄이나 생각의 여과없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말투. 일요일도 없이 현장을 누벼야하는 밖의 일에 대하여 눈꼽만큼의 배려도 베풀 마음을 먹지 않는다.

허둥지둥 6시 일어나 출근준비.

6시30분경 제 방문을 나서는 英이의 심통, 엎드려 졸았는지 부스스한 몰골하며, 불만 가득한 표정, 묻는 어떤 말에도 대답하기 싫다는 완고함이 뚝뚝 흐르는 포즈.

아비짜리는 가슴 속 불이 일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집안의 두 여성분들께서는 이토록 여성답지 못함으로 이 집안의 두 남성분들을 남성답지 못하게 만든다.

내년에는 두 여성분께 간구한다.

부드럽게, 여성답게, 상대 감정에 대한 배려있기, 생각하고 말하기, 미소짖기.


15668 1989. 12. 31 (일)


1989년의 끄트머리.

내가 태어난지 15668번째의 아침을 맞는다.

창가를 벌겋게 물들인 저 빛은 저무는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태양이다.

새벽일어나 목욕하고 안방에 홀로 앉아 소리내어 시편읽는다.

그리고 불꺼 어둠속에 앉아서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를 외고 나의 기도를 드린다.

아내에게 신앙의 기쁨을, 英이의 사춘기를 다잡아줄수 있은 지혜를, 俊이에게 용기와 사랑은, 모든 진정으로 가득찬 가족, 감사와 기도와 찬송의 가족. 어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소망을.

모든 마음들에게 얼음덩이를 녹여주시어, 차가운, 뱀처럼 번득이는 이기와 독선과 아집과 오만과 허영과 교활과 편견과 무지와 질투의 그 얼음덩이를 녹이고 따뜻함을.

오, 나의 하나님이여, 이 육신과 이 마음 속, 이 더러운 영육의 속들을.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날이 밝고.

출근준비 해야하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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