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9. 11

카지모도 2016. 6. 2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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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8 1989. 11. 1 (수)


몸살끼는 여전히 머리속과 팔다리와 눈동자를 욱신욱신 찔러가며 꿈틀거린다.

잠바를 입고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오싹오싹 한기가 엄습하는 것은 독한 약에 취한 탓인 모양.

일찍 자리에 누워, 뒤척이며 깨어난 시각은 고작 3시.

이문구 '관촌수필' 읽는다.

고향, 이조인인 할아버지.... 고향, 고향.

내게도 이문구처럼 고향이라는게 있을까?

정능. 그래 정능이 고향이 될 수도 있겠지.

당시 시골티 완연하지만 도시의 외곽이어서 도시적 정서가 살아있던 곳.

겨울 썰매, 켄터키 옛집을 부르던 외가 작은 형.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 그래 눈이 내리면.

꿈이런가.


내 방에 앉아 '에레미아 애가' '요한1서'

기도드린다. 내비치는 눈물.

육신의 욕망과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벌레, 눈물은 벌레임을 자각하는 순간의 슬픔인가.

아내, 아이들, 어머니.. 세상, 그리스도와 너무도 배리된 이 세상.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벌받을 일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요한1-


오늘 SB-364 진수 예정.

그리고 신변잡사 처리.

이런 것들의 강박, 나는 이런 사소한 것에까지 일종의 세척강박적인 완벽한 처리 욕구가 기승한다.

스케일이 크게 되기는 애시당초 글러먹었다.

그러나 또한편, 의외로 큰 건수를 무덤덤하게 듬쑥듬쑥 처리해버리는 무신경한 일면이 있음, 모순, 무리한 모순이 함께 하는 피곤함.


15610 1989. 11. 3 (금)


어제 결근.

한낮의 적요로움.

안온하게 누워있는 바다.

종일 누워서 이외수의 소설 읽다.

당초 이외수라는 작가를 나는 하찮게 여겼었는데, 의외로 세련되고 참신한 감각이 있다.

긴머리, 긴수염, 연마되지 않은 것같은 글솜씨, 문학소년같은 치기하며가 유치한 인상이었는데, 그의 작품은 일정한 수준은 되어 있구나.

'꿈꾸는 식물' '훈장'..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다소 병적인 정서로서 그려저 있다.

그러나 번쩍이는 재기는 있으되, 때로 예술애호가적 수준의 환상적인 치기 역시 숨길수가 없다.


깊은 잠, 그러나 이외수의 소설적인 분위기가 꿈 속을 틈입한다.

현실의 그 현장에 굳건하게 두다리를 박고, 거기서 비롯된 고뇌, 정열, 삶에의 사랑과 허망... 에 대한 열등의식.


俊이 방 앉아 현대문의 마태복음 산상수훈 편을 읽다.

기도.


15611 1989. 11. 4 (토)


레니 에어드 '아기는 프러페셔널' 다시 읽다.

장르는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전혀 추리소설적은 아니다.

유쾌하다기 보다 행복하게 해 주는 소설.

에스프리 가득 찬 문체가 작가의 재능을 넘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대단한 휴머니스트이고.

내게 아직 소설가의 꿈이 남아있다면 이러한 재능을 배워 연마해야 하리라.


S형 이 찾았다고. 서울 변두리의 중국집 배달원.

다행한 일, 감사한 일.


비내리는 토요일 현장, SB-365 Hatch Cover 탑재하다.


15612 1989. 11. 5 (일)


뒤숭숭한 꿈자리, 5시 기상.

어느새 英이는 새벽기도 가버리고, 혼곤히 잠들어 있은 J와 俊이.

또 왼쪽 눈멍울이 부어 오르다.


데살로니가 전서 소리 내어 읽다.

뜨거움, 믿는다는 환희가 없으면 그 신앙은 형해화된 신앙.

기도드리는 마음도 뼈다귀 덜거덕거리는 소리.

늘 불타 오르는 하나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뜨거움을 주소서. 불타 오르는 열정과 넘처나는 환희로서 주님을 느끼도록 도와 주소서.


현장을 나가지 않아도 좋은 일요일.

마음은 벌써 바쁘다.

드로우잉 아카데미의 숙제 그림 완성해야 하고,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의 발색 연습도 해야하고.

오정 때 쯤엔 친구들이 올 것이고, 그래서 오후 쯤엔 술잔들을 기울일 것이고.


15613 1989. 11. 6 (월)


집에 오는 대신 내가 서면으로 나가 상곤, 황근 만나다.

늦가을 안개처럼 흩뿌리는 빗속에서 시나브로 취하여 종장에는 황근의 집으로.

종교에 관한 헛된 공론들, 갑론을박 해봤자, 누구에게도 그 논쟁에 정작 절실함이란 있지도 아니하다. 그러니까 어떤 절실한 명제에는 도달도 못하고 밖으로만 맴돌다 그친다.

상곤의 생활인으로서의 성실함과 진지함은 내가 본받아야 할 덕복이다.

성규에게 몇천만원 출자한 사실 또한 처음 듣는 바이고.

상곤의 제안, 월 1회씩의 등산.

생활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월요일, 아마도 어제의 상곤 영향일 것.

추적추적 비는 내리다.

생활을 향한 의지, 의지여. 좀 더 낳은 경제를 향하여 내닫는 의지여, 행동력이여, 생명력이여.

내게는 너무나 미흡한 그것이여.


15614 1989. 11. 7 (화)


자기 컨트롤.

의지의 발현과 쓰잘데 없는 욕망의 절제.

의지를 방해하여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평가하여 인식할수 있는 능력.

이것은 아마도 수양의 문제이며 인격의 문제이며 성품의 문제일 것.

어쩌면 성숙한 신앙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신앙이란 얼마나 즉물적이며 편의적이며 자기중심의 가식적인 것인지.


새벽일어나 다시 창세기를 펼친다.

기도.

슬픈 반복, 그러나 더 이상의 자기혐오는 좋지 아니하다.

이 새벽의 서늘한 대기와, 오염된 내 일상중 가장 순결한 시간인 이 새벽의 예배는, 그것이 비록 진부할지라도 실망해서는 아니된다.


"인간은 먼저 겸허한 어둠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빛나는 새벽별'인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우러러 볼수 없습니다.

그 겸허의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십시오.

당신도 오늘 지금이라도 그를 주로 우러러보고, 토마스 처럼 '내 주여! 내 하나님이여!'하고 그의 발 아래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찌무라 간죠-


15615 1989. 11. 8 (수)


늦잠, 거의 6시가 다 되어서야 주섬주섬 일어나다.

그러나 간밤에는 숙면. 어제 밤 필갑, 정일우, 세동등과 집에 와 마신 다소의 음주 덕분인지.


英이, 부모에게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불만과 심통의 표현은 다만 사춘기적 반항으로만 해석해도 좋을까.

이해하는척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냥 따뜻하게 다독거려 주는 것이 지혜일까? 또는 엄하게 꾸짖고 엄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청소년기를 겪는 것은 당사자 뿐이 아니다. 부모도 함께 이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英이를 볼때마다 나의 청소년기를 생각하라.

나는 英이만큼의 성실한 16세를 살았던가.


S형 이 돌아오다. 한달여 동안 서울역 근처의 어느 중국집의 배달원으로 버텼다.

제 엄마를 만나자마자 했다는 S형 이 첫마디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엄마. 왜 이제 데리러 오는거야"

英이도 S형 이도 역시 열여섯짜리 소년에 불과할 뿐.


15616 1989. 11. 9 (목)


출근 길, 정문을 들어서자 60톤 크레인 위의 하늘을 횡으로 열을 지어 날아가는 철새 떼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로 가는지, 계절따라 어김없이 저토록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날짐승들이 보여주는 섭리에 문득 숙연해 지는 느낌이다.


육신은 실로 피곤하지만 현장의 하루라는 것은 조금의 동기부여만 허용되더라도 그닥 괴로운 것은 아니다.

음주에 대하여도 더 이상 자학치 말자. 스스로 폄훼하면서 마음밭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창조하시고 또한 술을 만들게 하셨다.

가급적 건강한 정신으로 술을 즐기기를 기도하자.


어두운 밤바다.

아치섬과 연결된 방파제에 뜨문뜨문 늘어서 빛을 발하는 가로등.

그 불빛이 바다에 비추어 참 애잔한 정서를 자아낸다.


15618 1989. 11. 11 (토)


새벽, 화장실 앉아 작가들의 일기를 읽다.

이문구의 우직성과 성실한 뚝심, 그런 그가 스스로 유약한 놈이라고 자평한다.


현대문의 창세기를 안방에 스탠드 불켜 책상다리로 앉아 읽다.

俊의 곤한 새벽잠의 고른 숨소리,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소리도 공명하여 크게 들리는 새벽 공간.

소리없이 고개 숙여 기도.


막스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코트랜드 환상곡.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동양적인 귀기가 흐른다.


15619 1989. 11. 12 (일)


어제 파마.

평균 3개월마다 한번씩 하는 것이니까 이번이 열번째인가.

마흔 넘은 얼굴은 스스로 책임을 저야 한다는데, 인위적인 가공을 통하여 인상을 만들고자 한다는게 좀 비겁한 노릇은 아닐까 한다.


일요일, 사무실 앉아 진장수의 공적조서 만들려고 몇자 끄적거리다 그만둔다.

일요일은 역시 일요일. 긴장이 풀리기 마련.

그런데 오후부터 내리는 비는 공정이 밀린 작업에 지장있을까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15620 1989. 11. 13 (월)


또다시 되풀이되는 한주의 시작, 월요일.

정주영처럼 매일매일의 아침을 설레임으로 맞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매일매일 그렇게 늘 신선하게 농밀한 밀도로서 자신의 목숨을 살고있는 사람.

진부하다고 느끼는, 그 일상의 반복. 그 반복의 피곤과 지루함만을 느끼는 사람은 진정 가여운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의 순간순간이 찬란한 기쁨의 농밀함일 것이다.

내 신앙은 부박하기 짝이 없다.


英이, 아비를 바라보는 그 눈초리의 생경함,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무표정이라기보다 금속성을 띄고 있다. 그것은 때로 심장을 칼로 찌르는듯한 통증이다.


15621 1989. 11. 14 (화)


어제밤, 퇴근하여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바라보는 바다는.

마치 꿈결과 같다. 중천에는 그야말로 眞圓의 풍만한 달이 걸리고, 그 빛을 받은 물결의 잔잔한 흔들림은 은빛으로 부숴진다. 선과 산자락은 실루엣의 무대 배경을 이루고.

'콜로라도의 달' 노래가락을 흥얼거려 보기도 한다.


늦잠. 꿈탓이런가. 어머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심리적 양상의 나, 최석교, 옛날 백기수부장의 등장은 또 무엔지.

5시 훨씬 넘어서야 서둘러 기상한다.

아직 어두운 바다, 하리 쪽 포구에는 선실에 외로운 불 하나 밝힌 어선 한척 이제 막 포구를 빠져나가고, 그 저쪽 수평선에서는 피어오르는 검은 뭉게구름.

잔물결은 가로등의 불빛에 경련처럼 교감하고 있다.


英이는 시험 끝나고 오늘 쉬는 날.

기도.

나의 주님, 나를 지배하소서.

나를 신앙이게 하소서.


15622 1989. 11. 15 (수)


성큼 겨울의 길목으로 들어선 느낌.

어제는 싸락눈까지 내렸다던가.

공정이란 놈에게 늘 부대끼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없이 주어진 여건 이상의 공사진척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추운날씨 핑계삼아 퇴근길 이종숙, 권오훈,김철수,정해국등과 한잔 걸친다.

젊은 친구들의 단순한 사고영역에 늘 실망하지만, 결국 나의 30대 시절을 생각해 내면 피장파장 아닐손가.


덕분에 늦잠.

허둥지둥대는 아침은 정말 싫다.

무슨 뒤에서 숨어서 다그치는 존재가 있는듯한 느낌은 싫다.

내가 지배하고 내가 컨트롤하는 시간만이 진정한 나의 소유일뿐이다. 기실 커다란 것은 지배받고 있는 주제에....

그러나 할짓은 다하고 만다.

화장실, 세수, 식탁에서 네식구 둘러앉아 성경읽기와 기도하기, 또한 식사후에 이렇게 일기장에 글도 메꾸고...

서둘러 나가야할 시각, 7시 25분이다.


15623 1989. 11. 16 (목)


어제 대형사고.

90톤 타이어크레인의 거대한 몸뚱이 쓰러지다.

운전사 이무길이가 과소평가하여 10톤 정도의 물건을 인양하면서 안전 자키를 장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Dry Dock를 가로질러 생산부 건물의 옆을 스치면서 넘어진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무길 이외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정말 아찔한 사고였다.

그 와중에도 최일구반장등 모범근로자들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15624 1989. 11. 17 (금)


90톤 크레인 분해하여 세우다.

만물박사인양 지껄여대는 전무라는 사람은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마는 김을용직장의 걷어부친 솜씨가 그것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부르조아지를 꿈꾸는 삶,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내 꿈꾸는 삶의 양식은 소유의 삶이다. 경제로서의 삶이다.

그것은 소유양식, 맘몬숭배자, 천편일률적인 삶의 양식, 소인배적 베끼기의 삶, 흉내만 내다가 끝마칠 삶, 아류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에게서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조의 삶, 존재의 삶, 초연한 삶, 점잖은 삶, 아 그런 삶을 살자고 중얼거리는 내 생의 양식은 참 모호하기 그지 없구나.


초겨울 서늘한 대기의 아침.

엄정행의 찬송가는 따뜻한지.

참 못부르는 우리나라 테너중 한사람.


15625 1989. 11. 18 (토)


어제밤 내 방에 앉아 토닉워터에 소주타 마신다.

5층 공간에 둥실 떠서 깊은 가을의 대기, 어둠 속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나의 실루엣은 어떤 모습일까.

선명회 합창단의 찬송가 들으며, 이외수의 소설 읽으며...


李箱은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심리의 준거틀인가.

이상의 냄새를 풍기려고 은연중 기를 쓰는 아류는 나를 포함하여 참 많기도하다.

시니컬한 절망, 세련된척 하는 유모어감각, 통찰력을 은근히 내비추는 이조의 선비적 풍모등....

이상은 어쨌든 현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내뿜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15626 1989. 11. 19 (일)


게으름, 일요일 오전.

비비적거리다가 2시 들어서야 낯을 씻는다.

英이, 俊이 데리고 시내 나간다.

무척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 부영극장.

이탈리아 여자감독 릴리아나 카바니, 미키 루크주연.

'프란체스코'

미키 루크가 프란치스코라니, 그러나 생각보다는 프란치스코를 잘 연기하였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내면을 영상화하기에는 감독의 역부족.

마태복음의 예수님.

가난하라, 애통하라, 순결하라....


하나의 기쁨, 또는 하나의 슬픔... 진리, 내가 인지하고있는 오직 하나의 진리.

그러나 세상은 이토록 현란하여 아름다운데, 그것의 오의가 하늘에서 이룬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 그것이 아닐진데....

도심에 넘처나는 밤의 정서여.

아들과 딸 손잡고 걷는 도심의 거리는 소주 한잔에 의하여 이토록 가득 의미가 널려 있거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위대한 행위자여, 위대한 스님이여. 당신은 진정한 부처님이고 제1등급의 예수님 본보기십니다.

나는 현존하고자 하는 당신의 제자가 되겠으니 오늘 내 꿈에 오소서.


15627 1989. 11. 20 (월)


월요일, 현장은 눈이 핑핑 돌아가게 바쁘다.

2공장의 Block 운반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시간당 130만원짜리 해상크레인 동원해 놓고는 노심초사, 60톤 겐트리 크레인은 주행 휠의 베아링 파손되어 꼼짝을 못하고, Shot Blast기계 2공장 이전 문제로 P이사는 자꾸 나를 부대끼고.


초연할수 있다면.

현상의 거스름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현상의 유혹이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명경지수와 같은 영혼밭을 유지할수있은 자는 성인이다.

3년전 나를 그토록 사로잡으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내게 끊임없이 암시를 보내고 계시건만, 나의 현상의 부대낌은 그 암시를 박제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신앙은 투쟁, 자신과의 싸움, 극복이다.

균형감각을 유지할수 있는 마음밭을 쟁취하는 것이다.


"至人은 자기가 없고, 神人은 功이 없고, 聖人은 名이 없다" -장자-

"위대한 인물이란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을 뜻함이다" -맹자-


15628 1989. 11. 21 (화)


회색수면.

어머니, 작은어머니,형, 왕성규등이 등장하여 무슨 애틋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드라마를 펼첬는데, j와 아이들, 온천장에서의 쓸쓸함.

꿈 속에서도 리얼하게 감득되는 그 애틋함이란 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완의 청춘?, 미완의 핏줄의 정?, 핏줄의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데포르마숑?

무언지는 모르나 분명 어떤 완성치 못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골깊은 한의 각인이 심층심리 속에 있는 것이다.

새벽.

안방의 앉은뱅이 책상 펴 놓고 불밝혀 정좌한다.

옆에는 내 식구들, 아내와 英이와 J가 혼곤한 잠 속에 빠져 있다.

성서를 뒤적이다 불을 끈다.

어둠 속에 잠겨 명상에 빠져보려 한다.

그리하여 내면을 가만히 응시하고자 한다.

보이는가. 황량한 내면의 풍경이.

보이는가. 추악한 짐승 한 마리 웅크려 있는 모습이.

보이는가, 연약한 참새 한 마리 떨고있음이.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한 철면피, 껍데기를 지고 분비물의 궤적을 그리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은 달팽이.

형해화된 뼈다구의 덜그럭거리는 것만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돼지의 영혼.

기도드린다.

어둠과 침묵, 이 고요한 곳 저쪽에서,

그윽한 연민의 눈으로 내려다 보고있은 그 분.

그 분을 온 존재로서 껴안아라.


15629 1989. 11. 22 (수)


현장의 분주함, 번잡함.

게다가 사람끼리의 부대낌은 불꽃이 튄다.

조선소의 공정을 어떻게 '벨트 컨베이야'식으로 정립할 수는 없을까?

사람들에게 부딪쳐 원시적인 오더와 공갈과 고함 속에 진척되는 공사 공사들.

퇴근길, 필사적으로 술의 유혹을 뿌리친다.

이것이 육신은 물론이려니와 정신에도 이리 좋은 것을.


4시 못비처 깨어 일어나다.

잠바를 걸치고 베란다 내 공간에 앉다.

오랜만에 몸과 정신을 감싸는 순결한 냉기, 초겨울 새벽 하늘엔 초승달이 떴다.

빌레몬서, 유다서.

불 꺼, 어두운 청결함에 몸을 굽히고 기도드린다.


15630 1989. 11. 23 (목)


어제의 현장은 흡사 격전장에서의 치열한 전투였다.

뻐근한 다리를 끌고 퇴근길의 한 두잔, 그러나 주님의 절제는 제법 작용하였다.

퇴근하여 아파트 계단을 다 올라서 문앞에 이르자 안에서 울려오는 피아노 소리.

웬일이신가, 俊씨께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포근한 새벽.

레날타 테발디의 소프라노, 얌전한 아씨의 교과서적인 소프라노라는데. 내 귀에는 대단한 테크니션의 소프라노로 들린다.


15631 1989. 11. 24 (금)


英이 성적 다시 곤두박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모앞에 무릎꿇고 고하는 딸아이.

J는 그만 안색이 변하고 나의 가슴도 철렁 내려 앉는다.

결과가 英이의 최선이었다면 어쩔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최선을 향한 열망을 방기함으로서의 결과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英이의 문제집을 보면 대부분이 그저 허연 백지이다. 학습에 대한 그 어떤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결코 방치하여서는 안된다.

이 사회에서의 자유를 획득코자 한다면 공부의 길이외에는 없다.

英아, 英아. 제발 극복하여라. 사춘기의 싱숭생숭한 산만함을 아비는 왜 모르겠니?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그 싱숭생숭의 산만함을 극복하여 집중력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2년여만 한번 해 보자꾸나. 국민학교때의 찬란한 네가 그립지도 않니? 새암을 가져라. 지면 분해하여라. 그런 경쟁의식으로 너를 이겨낼수도 있지 않겠니..


꿈자리 뒤숭숭.

새벽 냉기.

기도.

금요일, 현장의 어수선함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내게는 주님이 계신다.


15632 1989. 11. 25 (토)


노조창립일, 휴무.

대낮의 다다가 펼처저있은 저 공간은 저리도 광활한데 속 좁은 전전긍긍함은 이토록 초라하다.

여가를 생산성있게 활용하지 못하는 이것은 웬 초조로움때문인지.

현장생각, 英이 생각.

그림숙제는 밀려있는데도 종이를 펼치고 연필을 준비하고 파스텔을 비벼넣고하는 과정을 시작하기가 참 요원하게 느껴지기만 하다.

그저 누운채 뒤척이기만 할뿐.


오늘도 현장은 번잡하리라.

용접불꽃은 계속 번쩍거릴 것이고 절단 슬라그는 선체 외판 사이로 현란한 불가루로 불꽃놀이를 할 것이고 크레인은 빅빅 사이렌을 울리며 돌아갈 것이다.

순수한 근로의 현장, 순수한 생산의 현장은 얼마던지 아름다울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필연적으로 개입되어 그 순수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이다.

그 자본의 생리는 이기이며, 아집이고 때로는 유치함이다.

내가 정녕 싫어하는 것은 조선소의 그 현장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음험하고 교활하게 조종하고 있은 자본의 더러운 생리이다.



15633 1989. 11. 26 (일)


화창한 일요일.

날씨는 사람의 기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일찌감치 목욕, 시벨리우스 '핀란디아'를 마루 가득 울리게 하여 놓고 휴일의 출군준비 서두르다.


그런데 박동적인 그 음악과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데,

느닷없이 생각나는 극작가 칼 비트링거, 그의 '은하수를 아시나요?'

연극하던 시절, 그의 대사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음악이란 참 묘한 연상을 불러 일으킨다.


5공 청산 문제로 정국은 시끌시끌. 진부한 정치는 여전하다.

독일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폴란드 항가리 체코등은 민주화바람이 불고, 남북 예멘은 통일되었다던데 이 나라의 정치는 늘 요 모양 요 꼴이다.


15634 1989. 11. 27 (월)


어제 SB-356 경사시험 준비, P이사의 일에 대한 열정 및 그 추진력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만큼 적극적인 저돌성을 갖고 있은 사람은 흔치 않다. 때로 독선이 지나쳐 탈이지만.


회사 화장실용으로 가져간 소설 '미스 블랜디시의 위난'.

한 순간에 다 읽어 버린다. 벌써 세 번쯤 읽는 소설인데도 볼때마다 재미있다.

하드 보일드 터치의 문체와, 긴박하고 발빠르게 전개되는 스토리.

작가는 제임스 헤들리 체이스.

모름지기 통속작가는 이 정도의 엔터테인먼트는 창출할줄 알아야 한다.

이 정도로 독자에 대한 투철한 서비스정신이 있는 작가가 우리나라에는 있는지.

품질은 통속소설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어줍잖은 사상을 집어넣고 진부한 관념들을 비벼넣어 만든 엉터리 대중소설들.


15636 1989. 11. 29 (수)


SB-362 선각 Block 1263-64의 오작에 대하여, 카마초를 선주실로 찾아가 공작을 좀 하다.

이 문제를 문서로서 회사에 어필해 달라고 부추기다.

2공장의 계속되는 오작 때문에 결국 내가 당하고 마는 현실타개의 일환, 선주측을 선동해 회사를 공격하는 꼴이지만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일본 다녀 온 최일구반장과 김영태씨의 선물.

전자수첩, 일본어 해독능력은 그나마 내가 제일 우수하여 그 매뉴얼 번역하여 같은 선물받은 부장에게도 교육.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어제 밤, 집에 있는데 전화.

서면기업 김상용사장, 차를 몰고 집까지 찾아오다.

일본 여행다녀 왔다고 양주 두병들고서.

마루에 마주앉아서 음악과 사진얘기들.

조선소에 관련된 인사중 가장 향기나는 사람이다.


15637 1989. 11. 30 (목)


어제 추운 날씨, 한파를 헤치고 SB-360 예비시운전 성공리 다녀 오다.

SB-356 Boom Load Test 완료하다.

SB-362 선미 Block의 해상크레인 이용한 탑재 계획은 12월 1일로 순연.


어제 英이 시험치르다.

성적이 좀 나아져야 할텐데.

새벽 5시.

이미 俊이는 깨어 일어나 제 방에서 부시럭거리는데, 英이는 근 30분을 뭉기적거리다가 겨우 겨우 일어나다.

저 계집애를 어떻게 정신이 확 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베란다의 창문을 열자 비수와 같이 찔러오는 깨끗한 냉기.

이런 냉기를 英이 머릿속에 가득 넣어줄수는 없을까?

먼 수평선 위로 놀이 붉다. 붉다기 보다는 처연한 빨강이다.

시편 115.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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