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가 한온의 큰첩의 집 문앞에 다 와서 한온이더러 “내일 만나세. ” 하고
인사하니 한온이가 “다시 오시지 않구 바루 가시렵니까? ” 하고 묻고 “저의
큰집에서 저녁 잡숫고 가시지요. ” 하고 말하였다. “무슨 별찬이 있나? ” “
오늘이 형수의 생일이니까 여느 때버덤 찬이 낫겠지요? ” “그럼 다녀옴세. ”
꺽정이가 박씨에게 가서 해를 지우고 한첨지 집에 다시 와서 저녁밥을 먹고 석
후에 한온이의 발론으로 오래간만에 소홍이게게 놀러갔다가 눌러 자게 되어서
이튿날 아침때에야 동소문 안으로 돌아왔다. 원씨가 꺽정이를 보고 “아침을 잡
숫고 오셨세요? 안 잡수셨으면 잡수셔야지요. ” 하고 물으며 부지런히 행주치
마를 앞에 두르는데 꺽정이가 조반을 먹어서 아침밥이 급하지 않다고 말하고 “
어제 담 너머집에서 야단법석이 났었겠지? ” 하고 물으니 “공연히 부질없는
일을 하셔서 어제 내가 창피를 당했세요. ” 하고 원씨가 대답하였다. “무슨 창
피를 당했어? ” “어제 다 저녁때 그 집 비부쟁이가 와서 제 기집이 도망하는
것을 우리 집에서 혹시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묻고 석후에 그자가 다시 밖에 와서
저의 집 안주인이 나를 좀 오라고 한다기에 아무리 이웃간이라도 상종이 없는
터에 어째 오라느냐 물어보랬더니 그자 말이 기집이 도망할 때 댁으로 오는 것
을 봤다는 여편네가 있어서 그 여편네를 청해다 놨으니 댁에서 와서 삼조대면하
라고 하더랍니다. 상직 할미가 이 말을 듣고 쫓아나가서 여편네가 우리 댁에 온
일도 없거니와 설혹 왔다고 하기로소니 우리 댁 아씨께 삼조대면하러 오라다니
별 망측한 소리를 다 듣겠다고 야단을 치니까 그자가 아뭇소리 못하고 무류해
가더랍디다. 비부쟁이 간 뒤에 얼마 아니 있다가 그 여편네가 마당에 나서서 어
떤 년이 남의 집 종을 빼돌렸느냐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어떤 년이란 것이 나더
러 하는 소리겠지요. 내가 남에게 년 소리를 들어도 한가할 수 없는 신세지만
맘에야 창피한 생각이 없겠어요. ” 원씨가 말을 그칠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꺽
정이가 대뜸 “한번 버릇을 가르쳐 놔야겠군. ” 말하고 벌떡 일어섰다. “남의
집 안 여편네를 어떻게 버릇을 가르치실랍니까? ” “내가 가서 삼조대면하자지.
” “그런 일을 하시면 더 창피합니다. ” “그럼 욕 먹구 가만 있을 테야? ”
“가래지 않고 가만 내버려두면 욕을 먹어도 덜 먹지요. 북은 칠수록 소리가 난
답니다. 그러고 우리 앞이 뻣뻣해야 탄하지요. ” "우리 앞이 뻣뻣하구 안 하구
가 어디 있담. 잘했으면 종이 도망할까? “ 꺽정이는 곧 담 너머집으로 쫓아가
고 싶었으나 원씨가 말리는 통에 참고 주저앉았다.
꺽정이가 아침 밥상을 받고 앉았을 때 담 너머집에서 여편네의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비부쟁이가 계집 잃고 가만히 자빠져 있다고 야단을 치더
니 다음에는 시아버지가 도망한 종을 찾을 생각 않는다고 사설을 퍼부었다. 비
부쟁이더러 밥 빌어먹을 자식이니 똥물에 튀할 놈이니 욕설하는 것도 해괴하거
니와 시아버지를 무참하게 해내는 것은 홑으로 해괴할 뿐 아니라 곧듣기가 송구
하였다.
“사랑방 구석에 쥐죽은 듯이 들어앉아 무어하십니까? 도망한 종년을 찾지 않
고 가만 내버려두면 제발로 걸어들어올까요? 어째 찾을 생각을 안 하십니까? 옳
지, 나를 종년 대신 부려먹을 작정으로 아주 태평이십니다그려. 그렇지만 며느리
명색이 물동이를 이게 되면 샌님도 편히 앉아 자시지 못하리라. 하다못해 빗자
루라도 드셔야 할걸요. 종년을 찾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무어요? 찾을 도리가
없어요? 빼돌린 연놈들이 있는데 그 연놈들을 잡아 족치도록 주선을 못하신단
말입니까? 포도청에 옭아넣을 수가 없으면 장례원인가 어딘가 가서 송사질이라
도 하지요. 그래 찾을 도리가 없다고 손끝 맺고 가만히 앉았어요? 참말로 딱하
십니다. ” 여편네의 신이야 넋이야 퍼붓는 사설이 한마디도 빠지지 않고 다 들
었다. 꺽정이 밥상머리에 앉았는 원씨가 처음에는 혼잣말로 “저 여편네 입은
마구 난 창구녕이야. ” “저런, 시아버지를 개 꾸짖듯 하네. ” 하고 지껄이다
가 나중에 꺽정이더러 “빼돌린 연놈이란 소리 들으셨지요? 그게 우리더러 하는
말 아니에요. 공연한 일에 욕 얻어먹는 것도 분하지만 시비가 크게 되면 저걸
어떡허나요? ”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원씨의 말은 대답도 않고 바로 방문을 열
어 젖히며 “저 따위 망한 기집년이 무슨 쭉찌어질 열녀야! 그저 그년을 홍문
밑에 자빠드려 놓구 아가리에 똥 삼태기나 퍼너주었으면 좋겠다. ” 하고 소리
를 질렀다. 원씨는 꺽정이의 맞장구치는 것이 마음에 마땅치 못하여 “아이. ”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고 방문을 닫으며 “욕을 왜 자청해서 먹으려고
그러세요? ” 하고 사살하듯 말하였다. “무슨 욕을 자청한단 말이야? ” “그
럼 그 여편네가 대거리 않고 가만 있겠세요? ” “내게다가 욕만 하라지, 담 넘
어가서 그년의 아가리를 찢어놓지 않나. ” “뒤탈은 생각 안 하시구요? ” “
뒤탈이 난다면 한껏해야 이 집에서 못 살게밖에 더 될까. ” “국으로 사는 목
숨이 창피한 꼴이나 더 당하지 않게 그런 짓 마세요. ” “양반의 댁 따님이라
창피는 되우 아네. ” “오장육부 가지고 창피한 것 모를 사람이 어디 있세요?
상사람이나 양반 오장육부는 마찬가지겠지요. ” “말대답 마라!” 꺽정이가 소
리를 꽥 지른 뒤 아직까지 손에 들었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원씨는 말을 다시 안 하려는 것같이 입술을 자그시 물고 한동안 새촘하고 있다
가 싹싹하게 마음을 돌리어서 꺽정이를 보고 “진지나 마저 잡수세요. ” 하고
권하였다. “고만 먹을테야. ” “공연히 화를 내셔가지고 진지까지 안 잡수세
요? ” “먹을 만큼 먹었어. ” “어디 얼마 잡수셨나요? ” “그런데 그년의
여편네 아무 끽소리가 없네. ” 꺽정이는 소리 한번 지른 뒤로 이웃집 여편네는
꿀꺽 소리 한마디가 없었다. 원씨 생각에 대거리로 욕질할 듯한 여편네가 욕질
안 하는 것은 괴상하고 족히 행패할 꺽정이가 행패 안 하게 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계집아이년들이 상을 내가고 방을 훔치고 건넌방으로 건너들 간 뒤 한동안 지
나서 벌써 자수를 다 서르짓고 나갔을 동자치가 누구하고 지껄이는 소리가 나더
니 안방 앞에 와서 아씨를 불렀다. 원씨가 마침 골방 안에서 바느질거리를 꺼내
다가 고개를 방문 편으로 돌리면서 “왜 그래? ” 하고 물으니 동자치가 문틈을
조금 벌리고 들여다보며 간특스럽도록 가는 목소리로 “담 너머집 안에서 와서
아씨를 잠깐 보입잡니다. ” 하고 말하였다. 원씨는 담 너머집 여편네 왔단 말을
듣고 의외 일에 놀라서 손에 들었던 바느질거리를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을 못
하고 앉았는데 아랫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았는 꺽정이가 문틈으로 동자치
얼굴을 바라보며 “왔으면 데리고 들어오지 무슨 선통이야? ” 하고 꾸지람하듯
말하였다. “여기 들어왔세요. ” 하고 동자치가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키니 꺽정
이는 “어디? ” 하고 물으며 곧 앞으로 나앉아서 동자치가 문앞에서 비켜서기
바쁘도록 왈칵 방문을 열어젖히었다. 마당 안에 들어섰는 여편네가 꺽정이와 눈
이 마주치자 아랫입술을 빼물고 슬쩍 외면하였다. 여편네는 늙도 젊도 않고 크
도 작도 않고 몸집은 뚱뚱하고 낯판은 둥그런데 거벽스럽고 심술스럽고 억척 있
고 끼억 있고 틀지고 거방져 보이었다. 꺽정이가 눈이 뚫어지도록 여편네를 내
다보는 동안에 원씨가 살그머니 꺽정이 귀 뒤에 와서 “내가 건넌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잘 말해 보낼 테니 안방에 가만히 앉아 기세요. ” 하고 가만가만 말
한 뒤 곧 일어나 아랫간 방문은 닫고 윗간 지겟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좀
올라오시지요. ” 원씨의 말끝에 그 여편네는 천천히 댓돌 위로 올라와서 건넌
방 옆마루에 턱 걸터앉았다. “이 방으로 들어오세요. ” 원씨가 건넌방 지겟문
을 열어놓으니 그 여편네는 고개를 한두번 가로 흔들고 자기 앉은 옆을 가리키
며 “이리와 좀 앉으우. ” 하고 명령하듯 말하였다. 원씨가 그 여편네더러 올라
오너라 방으로 들어오너라 권하는 것은 겉인사성이지 속마음으로는 올라오지도
말고 얼른 가기를 바라는 까닭에 방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은근히 해롭지 않
게 생각하여 더 권하지 않고 그 여편네 가까이 가서 사이를 두고 쪼그리고 앉았
다. 이때까지 건넌방 안에서 삐금삐금 내다보던 상직 할미와 아이년들이 모두
나와서 원씨 뒤에 둘러서고 기둥 옆에 붙어섰던 동자치도 원씨 옆으로 가까이
나섰다. “어째 오셨습니까? ” 원씨의 말은 곱고 깍듯하고 “어째 왔느냐? 할
말이 있어서 왔소. ” 그 여편네의 말은 거칠고 거만하였다. “녜, 하실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 “대체 댁에서 우리 집하고 무슨 원수가 있소?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웃간이라도 서로 누군지를 모르고 지내는 처지
에 무슨 은원이 있겠습니까? ” “그런데 어째 댁에서 우리 집 종년을 빼돌렸
소? ” 원씨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상직 할미가 “우리 댁에서 종년을 빼돌렸다고
누가 그런 거짓말을 합디까? ” 하고 나서고 또 동자치가 “봤다는 년이 어느
년이오? 그년은 눈깔이 둘이 아니고 넷입디까? ” 하고 나서는 것을 “잠자코
있지 왜들 나서 지껄여! ” 원씨가 꾸짖어서 제지하였다. “잡아떼도 속을 리 없
으니까 잡아뗄 생각 마우. 그러고 고대 나더러 욕한 사람이 있지 않소! 목소리가
사냅디다그려. 그래 남정네가 남의 집 안여편네에게 대고 더러운 입정을 놀리는
것이 세상 천하에 어디 있는 법이오? 그런 법이 있으면 좀 압시다. ” 그 여편
네가 손바닥으로 마룻장을 치면서 들이대는 서슬에 잔약한 원씨가 말문이 막히
어서 잠자코 있으니 “할 말 없소? 할 말 있거든 하우. ” 하고 그 여편네는 더
욱 기승을 부리었다. 안방에 들어앉았는 꺽정이가 벌써부터 나서고 싶은 것을
그 동안 참기도 많이 참았는데 인제 더 참을 수 없어서 방문을 열어젖뜨리고 “
욕한 사람이 내니 나하구 말하자. ” 하고 대뜸 해라를 내붙이었다.
꺽정이가 방문을 벼락치듯 열고 말을 불호령조로 내놓는 바람에 원씨는 놀라
서 벌떡 일어서고 상직 할미와 아이년들과 동자치는 일시에 머리를 돌려서 꺽정
이를 바라보는데 정작 그 여편네만은 흘낏 한번 안방 편을 바라본 뒤 곧 섰는
원씨를 치어다보며 “긴말 할 것 없이 종년은 오늘 해안으로 도로 보내주고 또
사내의 상없는 구습은 고치도록 하우. ” 하고 말하는 품이 곧 분부나 신칙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내의 구습이라니? ” 꺽정이가 말끝을 잡아가지고 뇌
까리니 여편네는 시침을 뚝 떼고 원씨더러 “아무에게나 함부로 욕하는 것이 상
없는 구습이지 무어요? ” 하고 말하는 것으로 꺽정이에게 대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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