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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7권 (26)

카지모도 2023. 6. 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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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보니 사내를 좋아하게 생겼구나. 이리 와 나하구 말하자. ” 꺽정이의 정말 상

없는 구습이 골을 돋아서 여편네는 율기를 하고 원씨를 향하여 “보아하니 양반의 딸

같은데 어째 순 불상놈을 데리고 사우? ” 하고 말하였다. 꺽정이가 마루로 뛰

어나왔다. “무어 어째, 이년아! 불상놈, 그래 나는 불상놈이다. ” 꺽정이가 여

편네게로 가까이 대들 때 얼빠진 사람같이 멍하니 기둥에 기대어 섰던 원씨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듯 꺽정이의 소매를 잡아 매달리었다. “저리 비켜! ” “제

발 손찌검 마세요. ” 원씨는 말소리가 여짓 울려는 사람 같았다. 꺽정이가 한편

손의 식지 가락을 내뻗치고 흔들면서 “이년아, 아까 한 말 다시 해봐라. ” 하

고 얼러대는데 여편네는 딴전하고 본 체도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한 걸음 앞으

로 나서서 여편네의 저고리 뒷고대와 머리 뒤를 검쳐 잡고 마루 위로 끌어올렸

다. “아이구머니, 이놈 보게. ” “이년 죽일 년 같으니. ” “놔라, 이놈아! ”

여편네의 얹은머리가 풀어져 내려와서 꺽정이가 고쳐 머리채를 잡았다. 여편네

가 꺽정이게 앞을 두고 엉거주춤 일어서며 곧 눈결에 수염을 움켜쥐고 잡아당겼

다. 여편네와 꺽정이는 고개를 마주 숙이고 원씨는 말리려고 사이에 들어서 세

사람이 한데 뭉치었다. 아이년들이 원씨에게 “아씨. ” “아씨, 이리 나오세요.

” 하고 소리를 지르고 동자치가 꺽정이더러 “나리 마님, 아씨 다치십니다. ”

하고 소리치고 또 상직 할미가 꺽정이 옆에 와서 “나으리께서 참으십시오. 저

따위 망한 여편네가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봉변하신 건 미친개에게 물린

셈 잡구 참으십시오. ” 하고 지껄였다. 꺽정이가 머리채를 놓고 팔회목을 쥐어

손아귀에서 수염을 빼낸 뒤에 한편 어깨를 툭 치니 여편네는 마루에 궁둥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이년, 내 손이 한번 더 가면 너는 죽는다. ” “오냐 죽여라!

내가 이 망신을 당하고 살면 무어하겠느냐. 자 죽여라, 내가 죽는 걸 무서워할

줄 아느냐! 자, 어서 죽여라. ” 하고 여편네가 앉아서 뭉개뭉개 앞으로 나오는

것을 꺽정이가 발끝으로 한번 걷어차서 쿵 하고 뒤로 나가자빠지며 곧 사지를

펴고 두 눈을 감고 꼼짝도 아니하였다. 원씨가 속에서부터 떨려나오는 목소리로

“아이쿠 큰일났어. 저걸 어떡해요? ” 하고 꺽정이를 쳐다보고 또 “할멈 좀

가서 만져보아. ” 하고 상직 할미를 돌아보았다. “기운이 막힌 게지. 좀 들여

다보게. ” 꺽정이가 상직 할미더러 말하여 상직 할미가 여편네에게 와서 손을

쥐어 보고 볼을 만져보고 코밑에 손을 대어보기까지 한 뒤에 동자치를 불러가지

고 둘이 같이 손바닥을 비벼 주었다. 얼마만에 여편네는 “후유! ”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일어 앉으려는 것같이 몸을 요동하였다.

여편네가 잠시 기함하였을 동안에 꺽정이는 그 집에 안아다 둘 생각이 난 까

닭에 그 깨어나는 것을 보고 곧 옆에 와서 상직 할미와 동자치를 비켜나게 하고

척 늘어진 몸을 두 손으로 떠받들어 올렸다. 여편네가 눈을 떠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손짓 발짓을 하므로 한 팔로 윗도리를 감아 끼고 또 한 팔로 넓적다리

밑을 떠받쳐서 우그려 안았다. 한달음에 담 너머집에 가서 바로 내정 돌입하여

안방문을 발로 열고 안은 여편네를 들여놓은 뒤 바깥주인 늙은이의 쫓아나오는

것과 동네 여편네들의 모여드는 것을 다 본 체 만 체하고 돌아왔다. 동자치 사

내가 원씨의 말을 드디어 홍문집의 늙은 생원님을 가서 보고 전후 곡절이 이러

저러하다고 말한즉 늙은 생원님은 긴말 아니하고 이 다음 주인 양반을 만나서

시비곡직을 가릴 터이니 가라고 말할 뿐이었고, 동자치가 자의로 동네 여편네들

을 보고 사본사 이만저만하다고 이야기한즉 그 여편네들은 돌려가면서 홍문집

흉을 찢어지게 보고 그런 열녀는 봉변하여 싸다고 말들 하였다.

풍파 나던 날 저녁때는 담 너머집에서 여편네의 울음소리가 간간 들리었으나

전에 없이 조용하였고 다음날 아침때부터는 여편네의 악쓰는 소리가 나기 시작

하였는데 “이놈 이놈, 내가 너하고 사생결단할 테다. 이놈 이놈! ” 똑같은 말

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였다. 여편네 벼르는 말에 원씨는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

앉건만 꺽정이는 한두 번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한낮이 조금 기운 때 한온이가

사람을 보내서 황천왕동이가 왔다고 통기하여 꺽정이가 남소문 안에 가서 천왕

동이와 같이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천왕동이를 떠나보낸 뒤에는 박씨집에 들렀

다가 박씨와 둘이 조용히 담화하느라고 해를 지우고 석후에 동소문 안으로 돌아

왔다. 전 같으면 지쳐나 두었을 바깥문이 잔뜩 닫아걸려서 적이 괴상하긴 하나

그저 어쩌다가 일찍 닫아걸었거니 생각하여 문 열어주는 동자치 사내더러 “문

을 어느새 닫았어? ” 말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오니 원씨가 곧 오래 그린 끝에

만난 것 같이 반겨 하였다. 꺽정이가 아랫목 자리에 앉은 뒤에 원씨는 그 앞에

모를 꺾어 앉아서 먼저 저녁을 어디서 먹었느냐, 손님이 벌써 갔느냐 이러한 말

을 묻고 그 다음에 밑도끝고 없이 어디 다른 데로 이사를 시켜 달라고 청하였

다. 꺽정이가 고개를 젖혀 벽에 기대고 천장을 치어다보며 “이사를 시켜 달라

구? ” 혼잣말하고 얼마 있다가 고개를 벌떡 일으켜 원씨를 바라보며 “왜? ”

하고 묻는데 속을 알면서 짐짓 묻는 모양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저요. ” “그

저라니 까닭을 말해야지. ” “이 집이 싫어요. ”이 집이 싫은가, 이웃이 싫은

가? “ ”이웃도 싫구요. “ ”나 없는 동안에 그 망나니 여편네가 또 왔었나?

“ ”밖에까지 와서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어요. “ ”못 들어오게 누가 밀막았

나? “ ”어저께 다 저녁때 그 여편네가 우리 집 기둥을 팬다고 도끼를 들고 오

는데 동자치가 마침 밖에 나섰다가 얼른 앞질러 들어와서 문을 닫아걸고 열어주

지 않았어요. 도끼로 문짝을 몇 번 찍다가 동네 사람들이 저 여편네 미쳤다고

떠드니까 고만 가더래요. 그래서 오늘은 식전부터 종일 문을 첩첩이 닫고 살았

세요. “ ”담을 넘어오면 어떻게 할 뻔했노? “ ”담에 구멍을 뚫고 들어오거

나 사다리를 놓고 넘어오거나 할까봐서 동자치 사내를 종일 어디 가지 못하게

붙들어 두었는데요. “ ”그러면 그년이 기둥을 와 패어서 집이 무너진 뒤에 어

디루 이사하지. “ ”얼른 이사하는 게 상책이에요. 그러면 시비 없고 좋지 않아

요. “ ”그래 이사는 하기루 하더래도 며칠만 더 두구 보자구. “ 꺽정이가 원

씨의 마음을 안위시키느라고 며칠만 더 두고 보자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며칠 안

에 무슨 요정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원씨가 전날 밤에 공연히 조심이 되어서 잠을 못 자고 또 낮에도 눈을 붙이지

못한 까닭에 밤이 그리 늦기도 전에 눈에 잠이 가득하였다. 꺽정이는 졸리지 아

니하나 원씨의 사폐를 보아서 일찍 자리를 깔게 하고 같이 드러누웠다. 원씨는

바로 잠이 곤히 들어서 숨소리까지 거의 없는데 꺽정이는 잠이 안와서 어두운

속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마침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뒤척거리기까

지 하였다. 이리하는 중에 담 너머집 여편네 제독 줄 수단을 생각하기 시작하여

잠이 영영 번놓이고 말았다. ‘그년의 여편네가 다시 말썽을 부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제독을 주어놔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위인이 여간내기 아닌 줄은

이왕 짐작하였지만 엊그제 죽이라고 대드는 걸 보니 섣부른 으름장 가지고는 제

독 주기커녕 되려 망신하기 쉽겠는걸. 기둥을 패려고 도끼 들고 오거든 도끼 들

려서 동네 조리를 돌려볼까. 동네 것들 왁자지껄하는 것 재미없어 광 속 같은데

잡아넣고 죽일 것처럼 잡도리해 볼까. 그래서 말썽을 다시 안부린다고 항복하면

좋지만 죽이라고 자꾸 발악이나 하면 그걸 어떡한담. 나이 이십 안짝에 호랑이

꽁질 붙잡고 하룻밤 동안 매달려 다닌 계집이라니 세상에 희한한 독종인 거야.

계집이란 것이 대체 사내들버덤 독하긴 하나 그 대신 약하니까 제아무리 독종이

라도 약한 계집으로서 죽는 걸 겁내기 않을 수가 있나. 그것도 독이나 악이 난

때 같으면 모르지만 여느 때야 그렇지 못하겠지. 시퍼런 칼날로 볼때기나 서너

번 쓱쓱 문대주면 대개 다 기절 않고 못 배길 게지. 오늘 밤에 환도를 가지고

담 넘어가서 자는 년을 잡아일으켜 놓고 한번 혼뜨검을 내줄까 보다. 그래도 제

독이 안 되면 아주 요정을 내주는 수밖에. ’ 꺽정이가 일어나 앉아서 허리띠

대님을 다시 주워 매고 벽장에 넣어둔 환도를 꺼내고 벽장문을 닫을 때 원씨가

돌아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자면서도 가끔 한숨을 쉬는 것이 원씨의 버릇이나

혹시 잠이 깼나 하고 지근지근 건드려 보다가 정신없이 자는 것을 안 뒤에 좌우

쪽 이불자락을 잘 눌러주고 일어섰다. 원씨를 아직 기이었다가 나중의 재미를

보려고 원씨의 잠이 행여 깰세라 가만가만 윗간에 나와서 지겟문을 살며시 여닫

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절기가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가까운 때라 낮에는 봄뜻

이 다소 있으되 밤에는 겨울맛이 그대로 남아서 방안에 있던 따뜻한 몸에 바람

이 몹시 차련마는 추위를 모르는 꺽정이는 선득선득 시원하게쯤 여기었다. 보름

전께 달이 인왕산 쪽으로 기운 것이 한밤중이 된 모양이라 네 이웃에 사람 소리

가 그치어서 괴괴하였다. 꺽정이가 마당에 내려서니 강아지가 마루 밑에서 쪼르

르 나와서 치어다보며 꼬리를 쳤다. 그 모양이 주인더러 딴짓할 생각 말고 저하

고나 놀자는 것 같았다. 원씨 집에는 이 쥐방울만한 강아지나마 먹이지만 홍문

집에는 주인 여편네가 짐승을 좋아 안 하는지 닭새끼 하나 치지 아니하였다. 개

가 있어도 겁날 것이 없지만 자취를 감추고 들어가려면 개 없는 것이 한 부조였

다. 꺽정이가 담 밑에 와서 단번에 뛰어넘으려다가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지 아

니하려고 손에 들었던 환도를 허리에 지른 뒤에 몸을 솟쳐 손으로 담 위를 짚고

올라오며 곧 사뿐 담 안으로 내려섰다. 사랑방도 캄캄하고 행랑방도 캄캄하고

오직 안방에만 불이 있는데 등잔 심지를 돋우지 아니한 듯 불빛이 희미하였다.

꺽정이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마루 위로 올라왔다. 과부 여편네 혼자 자는 방이

라 으레 문고리가 걸렸으려니 짐작하고 배목이 솟쳐 빠질 만큼 힘껏 지겟문을

잡아당기었더니 고리 걸리지 않은 문이 펄떡 열리며 꺽정이는 자기 힘에 몸이

한편으로 휘뚝하였다. 꺽정이가 몸을 가누며 곧 칼날을 빼어들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아랫목에서 자는 여편네가 이불을 홱 제치고 벌떡 일어 앉아서 윗목을 내려다

보며 “이놈! ”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편네는 첫잠이 깊이 들어 정신을 모르고

자다가 지겟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었던 것이다. “죽기가 시각이 바

쁘거든 어서 소릴 질러라. ” 꺽정이가 칼을 치어들고 여편네 앞에 와서 딱 서

니 여편네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꺽정이의 얼굴을 치어다보다가 예삿말 소리로

“오냐, 죽여라. ” 하고 고개를 길게 앞으로 내밀었다. 꺽정이가 속으로 어이없

어 하면서 목덜미 부연 살에 칼등을 슬쩍 갖다대니 목이 움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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