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년은 그저 죽일 년이 못 된다. 고개 쳐들구 말 들어라. “ ”그저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테냐? “ 여편네가 이불자락으로 앞을 가리고 뒷벽에 가서 기대어 앉
았다. ”우선 네 죄가 죽어 싼 줄을 아느냐? “ ”모르기에 대답이 없지. 내가
죄목을 일러줄 테니 들어봐라. 늙은 시아비를 구박하는 것이 하나, 어린 자식을
들볶는 것이 둘, 종년을 도망질하두룩 학대한 것이 셋, 이웃 사람에게 함부루 욕
설하는 것이 넷, 이웃집 와서 야료하는 것이 다섯, 이만해두 죄가 다섯 가지다.
그러구 방정맞게 내 수염을 끄둘러서 채 좋은 것이 대여섯 개나 뽑혔다. 내가
수염 아까운 생각을 하면 네년의 살점을 대여섯 점 포를 떠두 시원치가 않다.
“ ”밥먹구 똥누는 건 죄가 안 되느냐? “ 여편네 얼굴에 냉소하는 빛이 나타
났다. ” 이년아, 건방진 말 마라! “ 꺽정이가 칼을 여편네 볼에 대고 한번 쓱
문댄즉 여편네는 진저리가 치이는 듯 몸을 옹송그렸다. 꺽정이가 속으로 ‘기집
년이란 아무리 담대한 체해도 별수 없다. ’ 하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더니 여
편네가 꺽정이의 웃는 것을 보고는 이를 바드득 갈고서 ”네가 할 말 다 했거든
이제 내 말 좀 들어봐라. “ 말하고 꺽정이가 미처 대꾸하기 전에 말을 다시 이
었다. ”양반의 댁 기집종. “ ”양반의 댁이란 다 무어냐? 이년아. “ ”내 말
을 다 듣고 나서 말해라. 기집종을 빼돌려 팔아먹고 안부인네 몸에 손찌검하고
밤중에 양반의 댁 안방. “ ”그래두 또 양반의 댁이야? “ ”양반의 댁을 양반
의 댁이라지 무어라고 하랴. 양반의 댁 안방에 밤중에 뛰어들어온 놈은 죄가 어
떠냐? 천참만육해도 싸지 않으냐. 네놈이 되려 나를 수죄를 해! 이놈아, 내가 너
하고 사생결단하려고 작정한 사람이다. 내 손으로 너를 못 죽이면 네 손에서 내
가 죽을 작정이다. 나 죽은 뒤에 시아버지가 원수를 못 갚아 주고 친정친지들이
원수를 갚아 주고 또 나라에서 원수를 못 갚아 주드래도 내가 원수를 갚을 테
다. 내가 죽어 아귀가 되어서라도 너를 잡아가고 말 테다.“ 여편네의 입귀에서
침이 튀도록 말이 부푸게 나왔다. ”네년의 오장이 어떻게 생겨 저 모양샌가?
배다지를 갈르구 오장을 좀 봐야겠다.“ ”오냐, 배를 갈르든 목을 자르든 하고
싶은 대루 해라. 아무렇든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느냐!“ ”빼때기에 칼 들어
갈 때두 큰소리하나 어디 보자.“ ”죽는 년이 앞을 가리랴. 배를 내놔주께 가만
있거라.“
여편네가 앞가린 이불자락을 한옆으로 거두치고 끈 풀린 아래옷을 배꼽까지
내려밀고 앞으로 나앉으며 “자, 찌르든지 가르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 씩씩하
게 말하였다. 꺽정이가 여편네를 여기지르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편네에게 여기
지름을 당하고 입맛이 썼다. 그러나 여편네의 허연 속살을 내려다보는 중에 꺽
정이는 생각이 달라졌다. 실상은 여편네를 처음 볼 때 좋게 여기는 생각이 없지
아니하였는데 이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들어 있다가 이제 와서 온마음을 차지하
도록 번져나온 것이다. 꺽정이가 갑자기 칼날을 집에 꽂고 여편네에게 덮쳐서
달리 요정을 내려고 하는 중에 여편네는 어느 틈에 손을 놀려서 사내의 가장 중
난한 곳을 움켜쥐었다.
여편네 손아귀에 잡힌 곳이 수염과는 달라서 꺽정이가 평생 처음 당하는 경계
라 꺽정이로도 마음에 적이 놀라웠다. “이년아 놔라! 얼른 놔라, 안 놓을
테냐!” 하고 연거푸 꾸짖으며 손으로 여편네의 팔을 눌러서 꼼짝 못하게하였다.
“팔을 분질러 봐라, 내가 놓나.”여편네가 말은 억세게 하나 팔이 아프고 손이
저려서 손아귀에 힘을 들일 수 없었다. “내가 조금 힘써 눌르면 팔 하나 병신
된다. 진작 놔라.” “배를 갈르구 오장을 본다며 팔병신 될 것이 걱정이냐.”
“죽일 테면 벌써 죽였지, 이때까지 있어? 장난으로 그래 봤지.” “누가 너하고
장난하자드냐?” “지금 이게 장난이지 무어냐?” 여편네가 ‘장난’하고 되고
한참 만에 “그래, 네 말대로 장난이라고 하고 장난한 뒤는 어떻게 할 테냐?”
하고 말하는데 얼굴빛이 붉어지는 듯하였다. “뒤를 어떻게 하다니?” “나를
어떻게 할 테냐 말이야.” “좋다면 같이 살고 싫으면 고만두고 네 소원대로 해
주지.” “거짓말 아니지?” “사내대장부가 부녀자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나.”
여편네가 이를 악물고 펴지 않던 손아귀가 어느 틈에 슬그머니 펴져서 꺽정이
도 팔 눌렀던 손을 떼었다. 꺽정이가 그제는 일어 앉아서 발에 신은 신발을 벗
어 윗목에 내던지고 꽁무니에 뻐티는 환도를 빼서 발채에 놓고 여편네 옆에 와
서 들어누웠다. 마침 이때 사랑에서 문을 열치는 소리가 나고 곧 뒤미처 안으로
들어오는 신발 소리가 났다. 이불을 끌어덮고 누워 있던 여편네가 얼른 일어나
서 아랫목 앞문과 윗목 지겟문의 문고리를 모조리 걸고 다시 자리에 와서 누우
며 꺽정이에게 귓속말로 “아무 기척 말고 가만히 있소.” 하고 당부하였다. 두
어 사람의 발짝 소리가 안방 앞에 와서 그치더니 한참 만에 명토 없이 “자느
냐?” 하고 묻는 늙은 시아버지인 모양인데 여편네는 대답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밖에서 다시 한번 “자느냐?” 묻고 나서 앞문을 흔드니 여편네가 그제사 “누
구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야.” “웬일입니까?” “문 열구 나 좀 보아.
” “밤중에 왜 자는 방문을 열라십니까? 망측스럽게.” “물어볼 말이 있어 그
래.” “물어볼 말이 있거든 밝는 날 물어보시구려.” “잠깐만 내다보렴.” “
옷을 벗어서 못 일어나요.” “행랑에서 들으니까 안방에서 떠들썩하는데 죽인
다는 소리가 들리드라구 이애가 지금 사랑으루 쫓아들어왔어.” “반실이가 귀
는 밝네. 나 혼자 자는 방에 누가 떠들썩해요. 옳지, 내가 꿈에 이웃집 사내놈을
붙들어다 놓고 죽인다고 야단을 쳤더니 잠꼬대를 한 게로구먼.”
꺽정이가 눈을 흘기며 뺨치려는 시늉을 하니 여편네는 손을 가로 흔들며 빙그
레 웃었다. “나는 도둑놈이 들어온 줄 알았구나. 지금 들어오며 보니까 사람의
그림자가 방문에 어른거리는 것 같더라.” “어른거리긴 무에 어른거려요? 당치
않은 소리 고만하고 나가 주무세요.” “나갈 테다. 불을 끄구 자. 불 켜놓구 자
니까 꿈자리가 사납지.” “불 끄겠어요.” 여편네가 일어나서 벽에 걸린 등잔불
을 꺼버렸다. 방문 밖에 발짝 소리들이 가까운 데서부터 차차로 멀어지더니 사
랑방 문 여닫응 소리가 들리고 그 뒤에 행랑방 문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었다.
첫닭울이에 꺽정이가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여편네가 더 누워있다가 가라고
붙잡아서 닭이 자칠 때에야 도로 담을 넘어왔다. 꺽정이가 지겟문을 곱게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원씨가 자리에 일어 앉으며 “밤중에 어디를 갔다오세요?” 하
고 물었다. 꺽정이가 원씨의 묻는 말은 않고 “잠이 벌써 깨었나?” 하고 물으
니 아랫간으로 내려왔다. 어둠침침한 원씨가 꺽정이 손에 가진 물건이 있는 것
을 보고 “손에 가지신 것이 무에요?”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흡사 숨기려는 것
같이 “아니야.” 하고 말하며 벽장을 열고 그 물건을 집어넣었다. “아니라니,
그게 환도 아니에요?” “환도야.” 원씨는 큰일난 줄로 짐작하고 기가 막혀 한
참 말을 못하다가 “담 너머집에 갔었지요?” 하고 묻는 것을 무서운 일 물어보
듯 하는데 “그랬어.” 꺽정이의 대답은 수월하였다. “아이구 나는 몰라. 그게
무슨 짓인가요?” “내가 살인하구 온 줄루 아는구먼.” “그럼 어떻게 하고 오
셨세요?” “여편네를 보구 왔어.” “말썽을 다시 못 부리두룩 하셨어요?” “
말썽을 다시 못 부리두룩 제독을 주었지.” “그러자니 자연 손찌검하셨지요.”
“손찌검 안 하면 항복을 받지 못하나?” “그래 그 여편네가 순순히 항복해요?
” “두구 보면 알지만 우리 집에 와서 말썽 무리는 건 고사하고 저의 집에서
떠들지두 않을걸.”원씨는 속으로 꺽정이의 말이 헛말 아닐까 의심하였다.
꺽정이가 개잠이 든 동안에 원씨는 일어나 마루에 나와서 소세를 하는데 동자
치가 아침밥 쌀을 받으려고 이남박을 가지고 마루 앞에 와 섰었다. 원씨 마음에
이웃집 여편네의 일이 궁금하여 동자치더러 이웃집 문간에 가서 안의 동정을 좀
보고 오라고 말을 일렀다. 동자치가 가기 싫다고 안 가려고 하다가 원씨 말에
못 이겨서 “잠깐 갔다 올께 얼른 쌀 내놓으세요.” 하고 이남박을 마루 끝에
놓고 가더니 한동안 좋이 지난 뒤 비로소 돌아왔다. “왜 그렇게 오래 되었어?
” “아씨, 별일 다 봤세요.” “무슨 별일?” “저 집 여편네가 아주 딴사람이
되었겠지요. 지가 문간에 섰는걸 어느 틈에 보고 들어오라고 그러더니 여러 말
을 하는데 말하는 것이 모두 멀쩡해요. 자기가 본시 홧병이 있는데 혹시 화나는
일이 있어서 홧병이 발작되면 꼭 미친 사람같이 된다구요. 이번에도 이웃집에
공연히 시비를 걸어 가지고 미친 사람 구실을 해서 우세가 적지 않다고 조만히
말합디다.” 안방에서 으 하는 트림 소리와 에헴 하는 기침 소리가 났다. “나으
리 기침하셨어. 아침 늦겠네. 어서 쌀 갖다 씻어 안치게.” 동자치가 쌀 이남박
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면서 “아씨, 제 말이 곧이들리지 않으시거든 이따 할
멈더러 한번 가보라십시오.” 하고 수다를 부리었다.
아침 후에 원씨가 조용히 꺽정이를 보고 여편네 제독 준 수단을 캐어물으니
꺽정이는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듯 차차 들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낮에는 별일
이 없었다. 밤에 원씨가 자다가 버스럭 소리에 잠이 깨어서 눈을 뜨고 살펴보니
꺽정이가 아닌밤중에 새삼스럽게 의관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어
디 가세요?” “담 너머집에 좀 갔다오께 가만히 드러누워 자.” “담 너머집에
는 무어하러 또 가세요?” “미진한 말이 좀 있어.” “미진한 말이 무슨 말이
에요?” “차차 이야기할 테니 아직 가만 있어.” 원씨는 비로소 딴 의심이 들
어서 꺽정이 나간 뒤로 공연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긴밤을 새우다시피 하였다.
꺽정이와 과부 김씨가 같이 살기로 작정이 되었는데 첫날밤에는 말이 대강령
에만 그치었고 이튿날 밤에는 의논이 세절목에까지 미쳤었다. 꺽정이는 김씨를
부실 대접 아니할 것과 김씨 살림에 시량 범절 돌보아 줄 것을 허락하였고, 김
씨는 시아버지 늙은이와 양자한 아들아이를 고향으로 보내버리고 들어 있는 집
에서 눌러 살림하게 할 것을 자담하였다.
꺽정이가 김씨에게서 두번째 반밤을 새우고 돌아왔을 때 날은 아직 다 밝지
아니하였는데 원씨가 벌써 자리까지 걷어치우고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왜 어
느 새 자릴 치웠어?” “곤하지 않거든 좀 앉아 이야기하셔요.” “이야기 듣기
가 그렇게 급해서 오밤중에 잠두 안 자구 앉았어, 사람두.” 꺽정이는 혀를 낄낄
찼다. “나를 속이실 건 없어요.” “속이긴 누가 속여? 별소리 다하는군. 속시
원하게 다 이야기해 주지.” 꺽정이가 첫날밤 행동한 일과 이튿날 밤 작정한 일
을 대충 다 이야기하니 원씨는 벌써 미리 의심하고 있는 일이라 별로 놀랄 것은
없었으나, 일 된 품이 왈가왈부하기도 더러워서 말 한마디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삼천 궁녀두 거느리구 살려든 기집 몇 개를 못 데리구 살까. 공평하게 해줄
테니 염려 마라.”꺽정이의 말끝에 원씨는 눈이 뜨거워지며 고물이 맺혀서 듣고
솟아서 흘렀다. 그러나 이 눈물은 꺽정이의 말이 자아낸 것이 아니고 자기의 설
움이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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