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두령이 꺽정이의 일을 가지고 두세 사람 끼리끼리 뒷공론들 한 일은
없지 아니하나 도중에서 펼치어놓고 의론한 일은 없었는데 백손 어머니
가 서울 간다고 법석을 꾸미던 때부터 도중의 공론거리로 의론이 되기 시작하였
다. 꺽정이의 동정을 알아오자는 사람도 있고 꺽정이의 진의를 물어보자는 사람
도 있었지만 꺽정이 같은 큰 인물이 큰일을 낭패하도록 여색에 침혹할 리가 만
무하니 가만히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나온 뒤에는 동정을 알아보지, 진의를 물어
보자 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그 의견으로 쏠리었는데 유독 서림이가 고개를 외치
고 자디 소견이 다른 것을 말하였다.
"여러분 말씀은 대장께서 영웅이신 까닭에 여색에 침혹하실 리가 만무하다구
하시지만 나는 여러분과 뒤쪽으루, 영웅이신 까닭에 도리어 여색에 침혹하시기
가 쉬웁다고 생각합니다. 영웅 호색이란 말이 영웅은 여색을 특별히 좋아한단
뜻입니다. 특별히 좋아하면 침혹하기두 쉽지 않습니까. 옛날에 진문공이란 이가
있었는데 조그만 나라 임금으루 천하 각국 임금들을 좌지우지 휘두르던 영웅이
었습니다. 그가 임금이 되기 전에 고국에 있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 부하 몇 사
람을 데리구 다른 나라루 떠돌아다닐 때 제나라 임금이 준 여자 강씨에게 반해
서 고국에 돌아가 큰일할 것두 생각 않구 강씨와 같이 제나라에서 늙어 죽으려
구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하들이 강씨의 도움을 얻어서 제나라를 떠나두룩
일을 꾸몄습니다. 강씨 같은 동뜬 여자가 아니었던들 진문공 못 되구 여자 손에
서 썩었을는지 모르지요. 지금 우리가 대장만 믿구 가만히 있는 건 생각이 부족
한 일루 압니다. 대장 부인께서 서울 가시는 것두 해롭지 않은 일인 걸 공연히
들 못 가시게 하였습네다."
여러 두령이 꺽정이 내려오게 할 계책을 공론하다가 전일에 황천왕동이가 듣
고 온 말도 있고 하니 개춘하기까지나 그대로 기다려보자고 작정들 하였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와서 양지바른 산달에 풀잎이 포릇포릇 돋고 눈 녹이는
산골 도랑에 물소리가 졸졸 날 때가 되었는데 꺽정이는 오지 아니하여 황천왕동
이가 다시 한번 채촉하러 서울 가서 하룻밤 묵어가며 이야기한 끝에 겨우 수이
오겠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왔었다. 그런데 수이 온다던 사람이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다른 두령들이 황천왕동이더러 서울을 한번
더 갔다오라고 말한즉 황천왕동이가 자기는 또 가기 싫으니 다른 사람이 한번
가보라고 말하니 아니 가려고 하다가 빠른 걸음에 속히 갔다오라, 이왕 맡아놓
고 다니다시피 하는 길이니 사피할 생각 말라, 이번만 더 갔다오면 다시 가란
말을 아니하마 다른 두령들이 이 소리 저 소리 지껄여서 마침내 황천왕동이가
또 가기로 되었는데 대리 괴수 노릇하는 이봉학이가 이번에는 대장을 뫼시고 오
도록 하고 정히 뫼시고 오지 못하겠거든 분명히 어느 날 오신다는 말씀이라도
듣고 오라고 서울 가서 할 소임을 일러주고, 모사 행세하는 서림이가 이번에도
대장이 뒤로 미루고 안 오러 드시거든 우리들이 전부 다 서울로 올라가거나 그
렇지 않으면 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지 모른다고 단단히 말씀하라고 꺽정이 만
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었다.
황천왕동이가 광복산서 첫새벽에도 떠났지만 해가 제법 길어져서 서울을 들어
올 때 승석때가 못 되었었다. 꺽정이의 처소는 가 보아야 으레 비었으려니 짐작
하고 한온이의 큰집 사랑으로 들어왔더니 사랑에 있는 서사가 나와 맞으며 “황
서방 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한 뒤 “너머집에를 안 들르시구 바루 이리 오셨습
니까?”하고 물어서 황천왕동이는 안 들렀다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오늘이
우리 집 작은주인 생일이지요. 임선다님두 너머집에 와서 기십니다. 아니 저녁
잡숫기 전에 어디 출입 안 하셨을 겝니다.” 한온이가 꺽정이를 위하는 마음으
로 자기 집에서 숙식하지 않는 것을 광복산 두령이나 졸개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라고 집안 사람들을 신착하여 둔 까닭에 서사가 무심코 다른 데서 온 것으로
말하였다가 얼른 출입 안한 것처럼 고쳐 말한 것이었다. 황천왕동이는 꺽정이가
처소에 있는 줄을 안 바엔 서사와 더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 없어서 곧 “그럼
나는 저 집으루 가보겠소.” 말하고 도로 사랑 중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서
사가 “저 샛문으루 가시지요”하고 일러주어서 큰집과 너머집 사이에 있는 일
각문으로 나왔다. 문 열어놓은 건너방에는 상노아이 서넛이 머리들을 한데 모으
고 바스락장난을 하고 문 닫힌 안방에서는 남녀 섞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
었다. 황천왕동이가 뜰 앞 가까이 들어왔을 때 상노아이들이 내다보더니 하나가
마루로 쫓아나오며 곧 안방 윗간 문을 열고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임선다님,
시골서 손님이 오셨습니다.”하고 고하였다. 꺽정이는 들은 체 아니하는지 아무
소리가 없고 “어디?”하고 묻는 것은 한온이의 목소리였다. 황천왕동이가 뜰
위에 올라서서 여기 왔노라 알리듯이 헛기침을 한번 크게 하니 상노아이가 한옆
으로 비켜서며 한온이가 내다보고 대뜸 실없은 말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구
왔느냐? 이왕 올라면 어제쯤 와서 오늘 아침밥이나 같이 먹게 할 것이지 인제
다 저녁때 온단 말이냐. 네가 종시 생각이 좀 부족해. 하여간 삼백여 리 전도에
생일날 전위해 온 것만은 기특하다. 어서 올라와서 절이나 한번 해라.”
한온이와 황천왕동이가 서로 친하여 실없이 농지거리하는 사이지마는 원처에
서 온 친구를 보고 나와 인사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농부터 거는 것은 황천왕동
이의 마음에 적이 불쾌하여 “실없은 자식.”하고 가볍게 대꾸한 뒤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버선을 바꾸어 신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에 사람 여섯이 들어앉아 있는데 그중에 넷은 몸에 주사니 것을 감은 계
집이고 먹다 둔 주안상 하나가 중간에 놓여 있고 거문고, 가야금, 장고 등속이
한옆에 밀쳐 있고 그외에 아래윗간에 벌려놓은 방 세간이 있어서 간반방이 가득
하였다. 황천왕동이가 아랫목에 앉은 꺽정이를 향하고 비좁은 틈에서 거북살스
럽게 절을 하는데 꺽정이는 눈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한온이가 중뿔나게 “오
잘 왔느냐?”하고 점잔을 빼고 말하여 계집 두엇이 서로 눈짓하며 소리없이들
웃었다. 꺽정이에게 냉대받고 한온이에게 멸시당하고 계집년들에게까지 창피 보
는 것 같아서 황천왕동이는 골이 발끈 났다. 주안상을 한편으로 밀어버리고 한
온이 앞에 와서 앉으며 곧 “이자식, 내가 네 놀림친구란 말이냐!” 하고 대어드
는데 황천왕동이의 거동과 기색이 약차하면 바로 주먹질을 시작할 것 같았다.
한온이가 자아낸 골에 꺽정이 외 계집들에게서 옮겨온 골이 엄치어서 상글상글
웃어가며 농담을 주고받고 하던 전날 사람과는 딴판이라 한온이가 도리어 어이
없어 하며 “자네와 나 사이에 농담한다고 성낼 줄은 몰랐네.” 하고 말하였다.
“농담도 분수가 있지. 멀리서 온 친구를 보고 나와 인사 한마디 않구 대뜸 농
담을 시작해! 게다가 기집년을 끼구 방에 들어앉아서, 그것이 친구 대접이냐? 친
구는 고만두구 수하 사람이라두 그따위루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황천왕동
이가 한온이를 토죄하는데 꺽정이에게 피침한 소리를 하였더니 이때껏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꺽정이가 별안간 “듣기싫다. 지껄이지 마라!” 하고 소리를 질렀
다. 되지 못한 계집년들 보는 데서 꺽정이의 위풍 부리는 것을 황천동이는 비위
사납게 여겨서 눈을 똑바로 뜨고 꺽정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노려보면
어쩔 테냐?” “형님은 좀 가만히 계시우. 이 자식하구 말 좀 해보구 나서 이야
기합시다.” 황천동이가 다시 한온이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그래 네가 잘했느
냐 잘못했느냐 말 좀 해라. 들어보자.” 하고 소매를 거드치고 팔을 뽐내었다.
“내가 잘못했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단 말이냐?” “자네두 잘한 건
없단 말일세. 자네가 나를 붙들구 조용히 책망하면 자네 책망을 내가 고맙게 들
었을 것인데 곧 드잡이를 놓을 것같이 팔을 뽐내고 덤비니 자네가 팔을 뽐내면
누가 기절할 줄 아나? 앗게, 저리 물러나게.” “네가 되잡아 나를 책망하는 셈
이냐?” “되잡구 바로잡구가 없지.” “네가 무얼 잘했다구 뻣뻣이 구느냐?”
“잘못했다는밖에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녜, 죽을 때라 잘못했으니 용서하십시
오” 한온이의 비꼬는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황천왕동이의 손길이 번개같이
한온이 볼치에 올라가서 찰싹 소리를 내었다. “이놈이 뉘게다 손질을 하나!”
한온이가 일어서고 “오냐, 해볼 테면 대들어라.” 황천왕동이가 일어서는데 황
천왕동이의 뺨에 육중한 손이 와서 떨어지며 눈에 불이 번쩍 나고 정신이 얼떨
떨하였다. “당장 도루 가거라.!” 꺽정이의 언성이 귀에 들릴 때 황천왕동이가
비로소 꺽정이에게 뺨 맞은 줄을 알았다. 대장이요, 자형이요, 사생을 같이 하자
굳게 맹세한 의형제 꺽정이가 한온이의 편을 들어서 자기의 뺨을 치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 황천왕동이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왔다. “얼른 나가거라!
” 꺽정이가 떠다 밀어서 황천왕동이가 방구석에 가서 쿵 하고 넘어졌다. 황천
왕동이는 뺨도 아픈 줄 모르고 벽에 부딪뜨린 머리도 아픈 줄 모르고 일어 앉아
서 물끄러미 꺽정이를 치어다 보는 중에 이십 년 동안 친한 정분과 앞으로 사생
을 같이 할 굳은 맹세가 일시에 없어지고 사라지는 듯 생각이 나며 부지중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온이가 꺽정이 앞에 가서 “선생님, 자리에 가서 앉으시지
요.” 하고 권하며 일변으로 아랫목에 몰려 섰는 계집들을 돌아보고 “왜들 죽
섰나? 소홍이 이리 와서 선다님을 뫼셔다가 앉으시게 하구 자네들도 다 앉게.”
하고 말하여 꺽정이와 계집들을 모두 앉힌 뒤에 윗간 구석에 앉아있는 황천왕동
이게 와서 “여보게 저리 가세.” 하고 말을 붙이고 “자, 일어나게.” 하고 손
목을 잡아 일으켰다. 황천왕동이는 서울 온 사연이나 꺽정이에게 이야기하고 해
빠지기 전에 떠나가려고 생각하고 한온이 끄는 대로 앞으로 나와 앉았다. 한온
이가 옆에 와서 앉으며 “하윗술이나 한잔씩 먹어야지.” “먹다 남은 찌꺽지루
친구 대접한다구 꾀까다름 부리기 전에 술을 새루 내와야겠다.” 하고 혼자 지
껄이고 나서 건넌방을 향하고 “이놈들, 이리 좀 오나라.” 하고 상노아이들을
불렀다. “나는 술 생각이 없으니 그만두게.” 황천왕동이의 말을 “이 사람 하
윗술 싫다는 데가 어디 있나?” 한온이가 대답하는 중에 상노아이들이 건너와서
한온이는 곧 상노아이들보고 방에 있는 주안상을 내가고 안에
들어가서 새로 한상 잘 차려 내오라고 말을 일렀다. 상 내가는 수선이 끝난 뒤
에 황천왕동이가 꺽정이를 향하고 앉아서 “인제는 내가 오구 싶어 온것이 아니
지만 이번은 어째 그렇든지 오구 싶지 않은 것을 하두 갔다 오라구 말들 해서
할 수 없이 왔습니다. 내가 오죽 오지 않으려구 해야 이번만 갔다 오면 다시 가
란 말 아니하마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겠습니까. 나는 이번만 오구 다시 안 오게
될 줄까지 생각 못하구 왔더니 인제는 참말루 다시 올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입찬 소리는 못할 것이지요만 이번이 내 일생의 마지막 서울길이 될는지도 모르
겠습니다. 내가 이번 온 사연은 말씀 안 해두 아실 테니까 긴 말씀 할 것 없구
여러 사람의 하든 말이나 대강 전해 드리구 곧 떠나가겠습니다.” “여보게, 잠
깐 내 말 좀 듣게.” 한온이가 황천왕동이의 말끝을 무질뜨리려고 하였다. “말
씀하던 것 마저 다 하구 나서 자네 말을 들을 테니 조금 가만있게.” “아니 내
말부터 듣게. 자네 떠나가긴 어디를 떠나간다나. 그리구 서울길이 마지막이라니
내가 보기 싫어 서울 안 오겠단 말인가?” “아니.” “아니면 무언가? 사내자
식이 그만 일에 꽁해 가지구 친구를 끊다니 말이 되나. 저런 색다른 친구들 듣
는데 창피하니 우리 다른 이야기나 하세. 뒤늦게 묻기는 계면쩍지만 여러분들
다 평온하신가?” 황천왕동이가 고개만 끄덕이고 나서 “오늘 가든 안 가든 말
씀하든 것이나 다 하구.” 하고 다시 꺽정이보고 말을 이어 하려고 하는 것을
한온이가 손을 내저으며 “이런 자리에서 말씀이 무슨 말씀이야. 말씀은 두었다
나중에 하게.” 하고 가로막아 못하게 하였다. 아무 소리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더러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 하고 말하는데 말소리가
제법 부드러웠다. 황천왕동이는 꺽정이의 말이 한온이의 뜻을 받아 나온 것이거
니 고깝게 생각하여 부드럽게 하는 말을 평소에 홀뿌려 하는 말만큼 못 여기었
으나 계집년들 듣는 데서 이런 말 저런 말 할 것 없이 꺽정이 말대로 이따가 나
중에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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