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온이가 노래 한마디를 법제로 부르고 나서 “어떠냐, 잘하지?” “시굴뜨기
가 소리를 들을 줄이나 아나.” 찧고 까불듯 말하고 또 허허허 웃는데 황천왕동
이는 수심에 싸인 것같이 양미간에 주름을 잡고 펴지 못하였다. “젓국 먹은 괴
양이 상호를 하구 앉았지 말구 좀 웃구 지껄여라.” “나는 자겠으니 고만 가게.
” “내가 바루 가 잘 것이지만 네가 혹시 기다리구 있을까 봐서 일부러 왔다.
황송한 줄을 모르구 가라다니 너두 사람 될라면 아직 멀었다.” “진정 말이지
내가 웃구 지껄일 경이 없네.” 황천왕동이가 말하는 것까지 힘담이 없는 것을
한온이는 딱하게 보았던지 홀저에 정중한 말소리로 “여보게 근심 말게. 선생님
일간 가신다네.”하고 말하였다. “기생방에서 그런 말을 다 할 틈이 있던가?”
“기생방은 왜?” “그럼 어디서?” “내가 선생님하구 같이 가면서 말씀을 들
어봤네.” “요전번에 수이 나려온다구 하구 반 달이 지났으니까 그 일간두 또
얼마 동안이나 될는지 누가 아나.” “선생님이 자네들에게 잠뿍 미쁘지 않게
보였네그려. 그렇지만 이번에 두구 보게. 틀림없이 가실 테니. 사오 일 안에 가
시나 안 가시나 나하구 내기라두 하세.” “분명히 사오 일 안에 떠난단 말을
들었나?” “내가 선생님께 말씀하기를 광복산에서 뿔뿔이 흩어질 리는 없지만
서울루들 오기는 쉬운데 우들 오면 수선스러우시겠다구 하니까 선생님 대답이
일간 곧 내려가신다구 하시데. 그래서 일간이야 내려가실 수가 있습니까 하구
내가 뒷수습할 일을 말씀하였더니 뒷수습은 다시 와서 하드래두 사오 일 안으루
떠난다구 하시데. 이왕 이렇게 작정하실 바엔 자네를 묵혀서 같이 떠나시는 게
어떠냐구 여쭈어보지 않았겠나? 선생님 말씀이 가기 싫은 걸 억지루 끌려가는
것 같아서 재미없다구 자네는 자네대루 보내구 나중 가신다구 하데. 사오 일 안
으루 가실 건 정한 일이니까 자네는 다시 긴 말씀 하지 말구 먼저 가게.” “그
렇지 않아두 나는 내일 첫새벽에 떠나갈 작정일세.” “아침이나 먹구 떠나게.”
“아침밥은 가다가 지어먹든 얻어먹든 할 테니까 이른 아침 시킬 것 없네.” “
그럼 조반 요기래두 해야지 잔입으로 떠날 수야 있나. 어떻든지 식전 일찍 떠나
게 해줄 테니 그건 내게 맡겨두게.” “자네가 늦잠 자면 보두 못하구 갈는지
모르네.” “선생님은 보입구 갈 테지. 선생님 오실 때쯤 나두 나옴세. 그런데
여보게 흩어지느니 서울루 올라오느니 하는 것이 자네가 지어한 말은 아니겠지?
” “그건 왜 묻나?” “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먼저 나왔나?” “글쎄 그건 왜
묻느냐 말이야.” “선생님이 벼르시데. 그런 말을 먼저 낸 놈은 그대루 둘 수
없으니까 가시는 날루 곧 채근해서 별반조처를 하신다데.” “별반조처를 하거
나말거나 맘대루 하라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알 일이 아니야. 선생님 벼
르시는 폼이 살육이라두 내실 모양 같데. 자네가 가서 미리 입들을 잘 모아두게.
” “자기 앞이 뻣뻣하구 큰소리를 해야지.” “저 사람 보게. 선생님 성미를 잘
알면서 저런 소리를 하나?” “자네 졸리지 않는가? 나는 눈 좀 붙이구 일어나
야겠네.” “내가 올 때까지 자네 자지 않았었나?” “지금이 어느 땐가 닭이
벌써 몇 홰째 울었네.” “자, 나는 갈 테니 어서 자게.” 한온이가 간 뒤에 황
천왕동이는 참말 눈을 붙이려고 이불을 끌어덮고 누웠으나 눈이 반들반들하고
잠이 오지 아니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파루 치는 소리가 나며 곧 누구에게
간다 온다 말도 없이 남소문 안에서 떠나나왔다.
황천왕동이가 서울서 떠날 때는 곧 아침결에 광복산을 들이대일 것같이 빨리
걸었으나 불과 삼십 리 다락원을 왔을 때쯤부터 일신의 맥이 풀리는 듯 걸음이
스스로 느려져서 겨우 연천 와서 점심 참을 하고 놋다리고개를 해동갑하여 넘고
이천읍내를 캄캄하여 들어와서 저녁밥을 새로 지어먹고 밥 먹고 나서 한참 늘어
지게 앉아 있다가 광복산 육십 리를 밤길로 걸어나오니 벌써 한밤중이라 파수
보는 졸개들 외에는 모두 잠들이 들었었다. 황천왕동이가 먼저 이봉학이 처소에
가서 자는 것을 일으켜 앉히고 서울 갔다 온 희보를 대강 말한 뒤에 자기 처소
로 왔다. 안해 백씨가 아들아이를 끼고 자다가 남편 목소리에 놀라 일어나서 “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하고 등잔에 불을 켜고 “진지 한 그릇은 솥 속에 넣어
두었지만 해잡수실 것이 없는데 국이나 끓여서 잡수실까요?”하고 관솔에 불을
당기는 것을 황천왕동이는 배고픈 것보다 첫째 졸려서 못 견디겠으니 불을 끄고
자자고 말하고 안해보다 먼저 자리에 드러누워서 자는 아들을 어루만지다가 잠
이 들었다. 이튿날 식전에 황천왕동이가 잠은 일찍 깨었으나 노독이 났는지 몸
이 무겁고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고 안해가 갖다 주는 조당수 한 그릇을
자리 속에서 어린 아들과 같이 나눠먹고 해가 한나절이 되도록 누워 있는 중에
신불출이가 와서 여러 두령이 모여 앉아서 오기를 기다린다고 통기하였다.황천
왕동이는 처음에 “골치가 아파서 어디 일어나겠다구.”하고 말하였다가 다시
말을 고쳐서 “소세하구 밥 좀 떠먹구 갈 테니 여러 두령께 가서 그렇게 말씀하
게.”하고 일러 보냈다. 신불출이 간 뒤에 황천왕동이가 일어나서 세수하러 나오
는데 세숫물을 놓아주는 백씨가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놀라며 “한쪽 뺨이 부셨
으니 웬일이에요?”하고 물었다. “인제 봤어?” “아까도 보았겠지만 무심했지
요. 뺨을 뉘게 맞으셨어요?” “그랬어.” “뉘게요?” “나중에 이야기할께 밥
상이나 얼른 채려노우.” 황천왕동이가 부지런히 세수를 다하고 곧 밥상을 받아
서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그 누님 백손 어머니가 보러 왔다. “어제 밤중에
왔다지? 나는 이때까지 까막히 모르고 있었다. 식전에 와보지 못하겠으면 기별
이라도 좀 해줄 게지.” “몸이 아파서 인제 일어났소.” “어디가 아파?” “골
치가 아프구 다리팔두 아프구.” “노독이 난 게다. 왜 밤길을 걸어오니? 중간에
서 자구 오지. 시급한 일도 없을 텐데.” “이천읍내에서 자구 올까 하다가 고만
그대루 왔소.” “서울서 늦게 떠났든가?” “떠나기는 첫새벽 떠났지만 걸음이
야숙히 안 걸려서 놋다리고개서 해를 지웠소. 겨울해에두 그런 일은 없었는데.”
“너 간 뒤에 이번에는 그 애 아버지가 너하고 같이 오리라고 모두들 말하더라
만 나는 안 올 줄 알았다.” “일간 온답디다.” “너를 따돌려 보내느라고 일간
온다고 한 게지. 수이 온다고 하고 보름이 넘어도 안 오는 걸 봐라. 일간이 또
보름이 될지 한 달이 될지 누가 아니?” “왔다가 다시 가더래구 오긴 곧 온답
디다.” “서울에 무에 못잊어 또 가? 한번 오기만 하면 누가 그렇게 문문이 다
시 가게 둘 줄 알구. 썩 틀렸다.” “자기 발루 가는 걸 누님이 어쩔 테요?” “
내가 허리띠에 목을 매더래도 못 가게 할 테니 두고 보려무나.” “이번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님이 환장된 사람입디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
얘기를 하자면 자연 말이 길 테니까 내가 여러 사람들 모인 데 가보구 나중에
누님께루 가리다.” 황천왕동이는 곧 일어나서 의관을 차리고 처소에서 나왔다.
여러 두령이 모이는 곳을 도중 상하가 입에들 익은 대로 도회청이라고 부르지
만 대청이 열두 간이던 청석골 도회청과는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간반통 삼 간
방 하나인데 그나마 꺽정이가 따로 거처하느라고 꾸민 방을 도회청으로 겸하여
쓰게 된 것이었다. 청석골 도회청에서 위의들을 갖추고 앉을 때와 달라서 일을
의논하다가 잡담을 섞기도 하고 앉아 있기가 싫으면 비스듬히 눕기도 하였다.
명색 도회청이란 곳에 여러 두령이 모여서 혹 눕고 혹 앉아 잡담들 하고 있는
중에 황천왕동이가 들어왔다. 누워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일어 앉으며 여러 사
람이 각인각색으로 인사들 하였다. “잘 다녀왔나? 이리 와서 앉게. 자네가 조금
만 더 늦게 안 오면 우리가 자네게루 제진했을지 모르네.” 늙은 오가는 수다하
고 “며칠 될 줄 알았더니 속히 왔네.” 박유복이는 말수가 적고 “서울 갔다오
신 회보는 이두령 말씀으루 대강들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구 오시기
를 기다리구들 있소.” 서림이의 말은 요령이 있고 “이번에두 대장 형님을 못
뫼시구 오구 혼자 와?” 배돌석이의 말은 되바라지고 “밤길 좀 걸었다구 해가
똥구녁까지 치밀두룩 잔단 말이오?” 길막봉이는 말이 별미쩍고 “오는 길루 우
리 이쁜 아주머니를 못살게 하느라구 발을 새운 꼴이구려.” 곽오주는 입이 마
구 난 창구멍이었다. 인사 수작들이 끝난 뒤에 이봉학이가 황천왕동이를 보고
“올 때 대장 형님을 못 보입구 왔다구 했지?”하고 물어서 황천왕동이가 “보
입구 더 할 말두 없구 늦두룩 기다리구 있기가 싫어서 그대루 와버렸소.”하고
대답하니 좌중에서 어찌하여 뫼시고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또 안
보입고 와서 화를 내시지 않겠느냐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천왕동이는 여
러 사람이 괴상히 여기도록 한참 동안이나 입을 봉하고 앉았다가 한 번 좌중을
돌아보고 나서 “지금 내 생각에는 우리 대장이란 이가 꼭 오장이 바뀐 것 같은
데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이번에 내가 보구 듣구 온 것을 조금두 숨기
지 않구 죄다 이야기할 테니 다들 생각 좀 해보시우.” 허두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꺽정이가 기생년을 끼고 방에 들어앉아서 내다보지도 않고 방에 들
어가서 절을 하여도 눈도 거들떠보지 않던 것과 한온이와 시비를 차리는데 꺽정
이가 한온이 편을 들어서 뺨치고 떠다박지르던 것과 꺽정이가 한온이와 같이 기
생방에 놀러가서 한온이만 돌려보내고 자기는 자고 오지 아니한 것과 꺽정이가
기생방에 가기 전에 틈을 타서 같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오겠다고 분
명히 날짜를 말하여 달라고 조른즉 내가 너희들에게 매여 지내는 사람이냐 소리
지르고 도중에서 다 서울로 올라가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는지 모른다고 말한 즉 갈 놈들은 다 가거라 소리지르던 것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노밤이의 이야기와 한온이의 수작을 옮기어서 여럿에게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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