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형님 내외간에 쌈이 나면 내가 어디 말릴 수 있소.” “그야 누군 가면 말
릴 수 있나.” “이두령 형님!” 황천왕동이가 불러서 이봉학이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었다. “내가 아까 들으니까 산상골 아주머니가 편치 않으시답디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데 박두령 형님이 가실 수 있소. 그리구 형님이 가셨으면 누구버덤
두 낫겠소.” 이봉학이가 황천왕동이의 말은 대답 않고 다시 박유복이를 돌아
보며 “아주머니가 병환이 났어?”하고 물었다. “배가 좀 아프답디다.” “대단
친 않아?” “대단친 않아요.” “그럼 긴말 할 것 없이 너하구 나하구 둘이 가
기루 작정하구 가보자.” 황천왕동이가 먼저 “그러면 더욱 좋겠소.” 말한 뒤에
다른 두령들도 다 좋다고 말하였다. 이봉학이가 서림이를 뒤에 남기며 졸개 하
나에게 길양식을 지워서 곧 보내라고 이르고 그 나머지 두령들과 같이 백손이
모자의 뒤를 쫓아나섰다. 산에서 내려와서 거의 오릿길이나 오도록 백손이 모자
의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여 황천왕동이를 먼저 가서 붙들고 있으라고 앞서 보
내고 다른 두령들은 뒤에 오는데 십리를 훨씬 넘어 와서 황천왕동이에게 붙들려
앉은 백손이 모자와 서로 만났다. 가려는 사람은 외곬이요, 붙드는 사람은 두동
싸니 붙들릴 리가 없다. 이봉학이가 박유복이가 마침내 백손이 모자와 같이 서
울까지 가게 되었다.
백손 어머니가 이십 년 동안 먼 길을 걸어본 일이 없으나 백두산 속에서 들짐
승같이 자랄 때 연골에 배운 걸음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일행 중에 앞설 때가
많고 뒤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광복산서 떠나던 날부터 나흘 되는 날 저녁때 일
행이 남소문 안 한첨지 집으로 들이닥치는데 이때 마침 한첨지 부자는 불일간
작별할 꺽정이를 청하여 점심에 술대접을 하고 술 뒤에 서로 한담들 하고 있었
다. 광복산에서 손님들이 오셨는데 아낙네가 한 분, 총각이 한 분, 전에 한두 번
보인 듯한 어른이 두 분, 그외에 짐꾼이 하나라고 바깥 심부름꾼이 거래하는 것
을 서사가 받아서 한온이에게 말할 때 이때까지 화평하던 꺽정이의 얼굴이 갑자
기 험하여졌다. 한온이는 꺽정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가눔이 도망하듯 몰래
가더니 가서 무슨 소리 지껄인 게로군. 모두 서울루 올 작정하구 이번에 선진이
왔나, 어째 안부인네가 다 오셨을까?” 혼잣말로 지껄이고 한첨지는 꺽정이의
눈치를 살핀 뒤 아들을 보고 “네가 나가서 안으서는 안으루 들어가시게 하구
두령들은 사랑으루 들어오게 하렴.”하고 말을 일렀다. 꺽정이가 한첨지에게 “
그럴 거 없습니다.”하고 말한 뒤에 곧 한온이더러 “심부름꾼 시켜서 옆집에
갖다 들여앉히게 하게.”하고 말하였다. “안부인네가 누구시까요?” “글쎄, 우
리 누님이 왔는지두 모르겠네.” “나가보시지 않으렵니까?” “누님이 왔더라
두 이따 가서 보일라네.” “그럼 내가 나가지요.” “고만두게, 자네두 나갈 거
없네.” “심부름꾼만 시켜서야 어디 대접이 됩니까? 저 사람이라두 나가 봐야
지.”하고 한온이가 서사더러 오신 손님들을 옆집으로 인도하라고 말하여 내보
냈다. 꺽정이가 공연한 늑장을 부리고 앉았는 중에 마당에서 “여보 형님, 우리
들 왔소.” 이봉학이의 말소리가 나는데 한온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아이
구, 이두령 박두령 두 분이 오셨네. 어서 들어보십시오.”하고 방으로 청하였다.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방에 들어와서 꺽정이와 한첨지에게 각각 절들 하고 한
온이의 절 한번을 둘이 함께 받고 자리에 앉은 뒤에 꺽정이가 체증기 있는 말소
리로 “왜들 왔나?”하고 물으니 이봉학이가 선뜻 “서사에게 말을 들으니까 세
분이 한담들 하구 기시다기에 주인 부자분을 보입기 겸해서 형님 오시기를 기다
리지 않구 우리가 왔소.”하고 옆집에서 온 것을 발명하여 대답하였다. “시굴서
왜 왔느냐는 말이야?” “시굴서는 안 올 수가 없어 왔소.” “안 올 수 없는
일이 무슨 일이야?” “우리가 형님하구 쌈질하러 왔소.” “쌈질? 못할 소리
없군.” “쌈질을 해두 톡톡히 하려구 대장 한 분을 뫼시구 왔소.” “한다 할수
록 점점 더하네그려. 안식구하구 같이 왔다니 안식구가 누군가? 우리 누님인가?
” “형님이 누님하구 쌈할 일이 있소? 어째 누님으루 생각이 드실까?” “그럼
누구야, 백손이 모자하구 같이 왔나?” “인제 옳게 아셨소.” “천왕동이란 눔
이 가서 그 누이를 충동인 게군. 그러나 그것들이 오는 것을 너희들이 못 오게
안 하구 되려 따라온단 말인가. 사람들이 지각이 있나 없나?” “아주머니 모자
만 오게 내버려 두었더면 우리는 지각 있는 사람이 될 뻔했구려.” “왜 내버려
두어! 못 오게 못하구.” “대판 쌈하러 오는 사람을 뉘 장사루 못 오게 막겠소.
” “누구하구 쌈을 하러 와? 그년이 죽구 싶은 게지.” “우리들 듣는 데는 아
주머니께 년자두 놓지 마시우. 우리 둘이 다 아주머니 편이오. 형님 있구 형수지
만 형님이 그르구 형수가 옳은데야 형수 편을 안 들 수가 있소?” “자네가 나
를 싯까스르는 모양인가? 무에 그르구 무에 옳다구 잔소린가?” “형님이 서울
와서 한 일을 속으루 생각해 보시우. 잘했나 못했나.” “잘했으면 어쩌구 못했
으면 어쩌란 말이야?” “잘못한 건 잘못했다구 말하는 게 옳지, 그래 잘못하구
두 염체없이 뻗대야 옳소? 형님이 잘못했다구 한번 고패만 빼면 우리들은 말할
것 없구 아주머니두 부득부득 쌈하러 덤비지 않을 게요. 몰골사납구 수퉁스러운
꼴이 나구 안 나는 게 형님께 달렸으니 생각해 하시우.” 이런 말이 황천왕동이
같은 사람 입에서 나왔으면 벌써 듣기 싫다고 소리를 질렀을 것인데 꺽정이가
이봉학이를 황천왕동이 등대로 홀대하지 않는 까닭에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꺽정이의 내외간 쌈을 미리 방지할 생각으로 이봉학이가 꺽정이에게 실없는 말
쇰직하게 여러 말 하는 것을 박유복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더니 이봉학이의 생각
을 꺽정이가 잘 모를까 염려가 되든지 “형님, 아주머니를 욱대길 생각 말구 잘
달래시우.”하고 당부하듯 말하였다. “너희들이 짜구 와서 나를 흔드는 모양이
냐?” “흔들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발명두 듣기 싫다.” 박유복이는
다시 말을 못하고 이봉학이는 더 말을 아니하여 좌중에 말이 그
치게 되었을 때 한첨지가 이봉학이와 박유복이를 보고 “어디서 점심들을 자셨
는지 시장하시겠소.”하고 말한 뒤 곧 아들더러 “저녁이 어떻게 되었나 재촉
좀 해라.”하고 말하여 한온이가 녜 대답하고 일어서며 꺽정이에게 “저녁을 어
디서 잡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어디서 먹다니 나는 저녁을 안 줄 말인가?
” “내외분과 부자분이 모쪼록 와서 단란하게 잡수실라느냐구 여쭤 보는 말씀입니
다.” “허 그 사람 참.” 꺽정이가 어이없어 하는 것을 한첨지는 보고 웃으면서
다시 아들더러 “모자분 저녁만 저 집으루 내보내게 해라.”하고 일렀다. 한온이
가 안으로 들어간 뒤 박유복이가 이봉학이를 보고 “아주머니가 기다리실 텐데
우리라두 좀 갔다와야 하지 않소?”하고 의논하는 것을 꺽정이가 “고만두구 여
기 앉았게.”하고 일러서 가지 못하게 하였다.
백손 어머니가 광복산서 뛰어나올 때는 꺽정이와 사생결단하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었으나 이봉학이와 박유복이와 길에 오면서 이런 말 저런 말로 마음을 얼마
쯤 눅여 줄 뿐 아니라 나흘 날짜가 지나는 동안에 마음이 절로 조금 석어져서
꺽정이가 얻은 계집들을 다 보내고 광복산으로 같이 간다면 쌈도 이심스럽게 아
니할 생각이 나게 되었다.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꺽정이를 데리고 온다고 나갈
때 백손 어머니는 곧들 올 줄 알았다가 오래도록 오지 아니하여 겁겁한 성미에
곧 쫓아가 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중에 방안이 침침하여지며 아이 하
나가 촛불을 켜놓고 바깥이 컴컴하여진 뒤 여편네 하나가 겸상인 밥상을 가지고
왔다. 백손 어머니가 “우리하고 같이 온 양반들 어디 있소?”하고 물어보니 상
가지고 온 여편네가 “앞사랑에들 기신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앞사랑이
어디요?” “큰사랑방을 앞사랑이라고 한답니다.” “여기서 가찹소?” “가찹
고말고요. 한집안 속인데요.” “거기서들 저녁을 먹는답디까?” “우리 젊은 서
방님까지 겸상겸상 네 분 진지를 앞사랑으로 내갔습니다.” “그럼 이건 우리
모자 먹을 밥상이오?” “녜, 그렇습니다.” 백손이가 밥상을 보더니 시장기가
갑자기 나는지 “어머니, 얼른 먹어치웁시다.”하고 밥상으로 대들었다. 그 여편
네가 “우리 주인 아씨 동서분이 나와 보일 텐데 자제 도령이 기시다고 해서 못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디다. 시장들 하실 테니 어서 많이 잡수십시오.” 전갈과 인
사를 뒤섞어 하고 나가자 백손이가 먼저 숟가락을 들기 시작하였다. 백손 어머
니는 두서너 술 뜨다가 고만두고 백손이는 저의 밥을 다 먹고 부족하여 부리만
헐다 만 어머니의 대궁까지 마저 다 먹었다. 저녁상을 내간 뒤에도 또 오래 있
다가 꺽정이가 비로소 오는데 그 뒤에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따라오고 또 백손
어머니의 낯모를 사내 하나가 따라왔다.
꺽정이가 여러 사람의 앞을 서서 방안에 들어설 때 백손이 모자가 모두 윗간
에 올라와 있는데 백손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휩싸고 살천스럽게 앉아 있고 백손
이는 떡 일어서 있다가 들어서는 발밑에서 절을 하였다. 꺽정이가 뒤따라온 세
사람과 같이 아랫간에 내려가서 앉은 뒤에 이봉학이가 백손 어머니의 낯모르는
젊은 사내를 가리키며 백손 어머니께 “이 친구가 이 집 젊은 주인인데 아주머
니를 보이러 왔습니다.”하고 인사를 붙이고 한온이가 일어서서 “절하구 보입
겠습니다.” 말하고 공손히 절하는데 백손 어머니는 일어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일어나듯 가까스로 일어나서 절을 맞았다. 한온이가 다시 앉으며 이봉학이를 돌
아보고 “저 총각이 선생님 자제 백손이지요? 선생님을 많이 닮았습니다.”하고
인사를 시켜 달라는 눈치로 말하여 이봉학이가 백손이를 한온이에게 절하고 인
사하게 하였다. 꺽정이는 아랫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고 백손 어머니는
아랫간을 등지고 돌아앉아서 서로 보지 않고 백손이는 골난 사람같이 뿌루퉁하
게 앉았고 박유복이는 어리석은 사람같이 덤덤히 앉아서 모두 말이 없고 오직
이봉학이와 한온이가 몇 마디 수작을 하다가 말다가 하고 한동안이 지났다. 한
온이가 더 앉았기 재미없든지 이봉학이와 박유복이더러 “우리는 도루 나갑시
다.”하고 말하니 이봉학이는 선뜻 한온이와 같이 일어서고 박유복이는 무춤무
춤하고 잘 일어서지 않은 것을 이봉학이가 가자고 끌어서 세 사람이 같이 마루
로 나가서 수군수군 공론하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백손 어머니가 이제 좀 말
을 해보려고 꺽정이를 향하고 앉아서 말시초를 시비가락으로 낼까 인사조로 낼
까 주저하는 중에 꺽정이가 몸을 일으켜 꼿꼿이 앉으며 큰기침을 한번 하고 “
너희들은 내 말 없이 어째 서울을 오는 거냐!” 아들과 안해를 한데 껴잡아서
말을 내었다. 백손이는 말대답을 아니하여도 좋을 것인데 아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은 것같이 얼른 “나는 아버지를 보이러 왔소.”하고
대답하였다. “누가 보구 싶다구 오라드냐?” “보입구 할 말씀이 있소.” “할
말이 무어냐?” “나두 장가 좀 들여주시우.” “장가? 이눔 뻔뻔스럽게.” “아
버지는 장가를 자꾸 드신다며 나는 안 들어주실라우?” “네가 뒤어지구 싶으
냐, 이눔!” 담 작은 사람은 초풍을 할 만큼 꺽정이가 큰소리를 질렀다. 백손이
는 본래 무섭게 구는 아비 앞에서 할 말 다하는 위인이라 조금도 겁내지 않고
“아버지더러 장가들여 달라는 게 무슨 죽을 죄요?”하고 들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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