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청에 난데없는 불이 붙어서 붉은 불길이 용솟음을 치는데 불을 잡는 사람
도 없고 구경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라고는 씨도 없더니 별안간 꺽정이 한사
람이 땅에서 솟아나듯 나서는데 얼굴과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보기가 끔찍하였
다. 한온이가 소스라쳐 잠을 깨었다. 방안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몸에는 정한 이
불이 덮이었다. 방안 사람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몰랐으니
잠시일망정 잠이 곤히 들었던 모양이다. 꿈속에 본 광경이 생시 일 아닌 것만은
다행이나 헛꿈이 아니고 전조인 듯 생각이 들었다. 이번 순경사 손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인데 청석골 앉아서 대항하는 건 공연한 객기다. 객기인 줄 번연히 알며
객기 부리는 사람들 따라서 신명을 그르치면 그런 원통할 데가 어디 있을까. 자기는
다른 두령과 달라서 우선 청석골을 간 것이 잠시 피신길이고 또 같은 두령이로
되 예닐곱 사람처럼 사생동고할 의리가 없는 터인즉 함께 몰사죽엄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왕 서울 온 길에 눌러 있고 다시 가지 말까? 그런 신의 없
는 짓은 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집안 식구가 다 청석골 있는데 혼자 빠질 수
도 없다. 사명맡은대로 서림이 뒤를 속히 알아 가지고 가서 대항 말고 피신하
자고 주장하다가 주장이 서지 않거든 아주 여럿에게 공언하고 식구를 끌고 나오
겠다. 한온이가 잠이 깬 뒤에 얼마 동안 이런 생각을 하고 누웠다가 갑자기 이
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 앉아서 “만손이?” 하고 부르니 만손이가 건넌방에서
녜 대답하고 곧 건너왔다. “지금 해가 어떻게 됐나?” “승석때가 거의 다 되
었습니다.” "이리 와 앉아서 내 이야기 좀 듣게. “하고 한온이가 무릎 밑을 가
리키니 만손이는 한온이 할 이야기가 밀담인 줄 짐작하고 선뜻 가까이 와서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편히 앉게.“ ”네.“ ”내가 이번 오긴 서림이의 뒤
를 파보러 왔네.” “서림이란 이요, 청석골 두령으루 조정에 귀순한 사람 말씀
이지요?” “그래, 서림이의 뒤를 잘 알자면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던 치선이 김
선달을 만난봐야겠는데.” “김선달을 지가 가서 불러올까요?" "어디 가서 불러
온단 말인가?" “지가 김선달객주를 전에 가본 일은 없지만 남대문 밖에
나가서 물으면 알겠습지요." "이 사람이 참말 우복동 속에서 살다가 나온 것
같애. 김치선이가 서림이 동티루 객주를 못하구 지금 피신해 다니네." ”
피신해 가 있는 곳을 대강 짐작하십니까?" "난 몰라." "그럼 어떻게 만나십니
까?" "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가 치선이 숨어 있는 데를 안다니까 손동지에게
말을 들여보내서 물어볼 생각일세." "남이 피신해서 숨어 잇는 곳을 잘 알기루서
니 여간 믿는 처지에야 모른다구 떼기가 쉽지 일러주기가 쉽습니까?" "그렇기에
손동지에게 다리 놓을 사람을 지금 자네하구 의논해 보잔 말일세." "제 주제에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전갈이나 편지 심부름을 해드릴 테니
상제님께서 그러럴 만한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은
덕신이 어른일세. 덕신이 어른이 손동지를 아는지 모르나 영부사댁 차지 하나하
구 절친하게 지낸는 건 내가 잘 아니까 덕신이 어른더러 그 차지를 다리 놓구 물
어보라면 어떨까?" "그럼 덕신이 어른을 내일 가 불러오겠습니다." "내일 가서
불러올 게 아니라 지금 곧 가서 이야기하구 속히 알아보라구 부탁하게." "상제님
께서 보시구 부탁하시지요." "자네가 가서 내 말루 부탁하게그려.“ ”그럼 지금 곧
가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만손이가 나간 뒤 한온이는 다시 누웠는데 만손이
어미가 건넌방에 있다가 건너와서 청석골서 지내는 형편을 묻는데 미주알고주알
다 캐어물어서 묻는 말을 이루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해가 져서 어둡기 시작할
때 만손이가 돌아와서 “덕신이 어른더러 다 이야기하구 부탁했습니다.” 하고
말하여 “대답이 무어라든가?” 하고 한온이가 물었다. “그만 일은 물어봐 달
랄 수 있다구 대답합디다." "속히 회답을 듣게 해달라구 말했나?” 덕신이 어른
이 곧 와서 보일 것인데 오늘 영부사댁에 가서 차지를 보구 부탁해 두구 내일
아침에 아주 회답을 들어가지구 와 보입는다구 합디다." "잘됐네. “ 일이 이렇
게 요량한 대로 다 되면 내일 낮에 김치선이를 만나서 서림이 이야기를 듣고 저
녁때라고 곧 도로 떠나가려고 한온이는 속으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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