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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8)

카지모도 2023. 11. 2.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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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야."

청암부인이 목소리를 누르며 부드럽게 불렀다. 이기채는 크흐음 헛기침을 했

다. 기침 소리에 송곳 같은 힘이 들어있는 것이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

고 있었다. 마침 세배꾼이 뜸한 틈을 타서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섣달 들

면서부터 끊임없이 들고나던 사람들과 정초의 세배꾼 무리에 밀려 강모는 집안

어른들과 얼굴 마주칠 시간조차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던 깃인데.

"너, 대실에 다녀와야지?"

청암부인이 말끝을 누른다. 그러면서 윗몸이 강모 쪽으로 기울어진다. 강모는

그 서슬에 몸을 흠칠하며 뒤로 물러앉는다. 지금 청암부인의 말은 묻는 형식이

지만 속은 명령이나 한가지다. 강모는 묵묵히 장판을 내려다보았다.

"설을 쇠었으니, 빙장어른, 빙모님한테 세배하러 가야지."

대답이 중치에 막힌다.

"그간 편지는 한 번이라도 했었느냐?"

"... ."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어찌 네 형편대로만 한단 말이냐."

방안 사람들도 모두 말이 없다. 특히 이기채의 입술은 더욱 가느다랗게 힘주

어 다물렸고, 눈살이 꼿꼿하다. 그는 청암부인의 분부가 마땅치 않기라도 한 것

인지. 기표와 기응은 상체를 보이지 않게 좌우로 흔들고만 있다.

"사람이 그러허면 못쓴다. 모진 마음이란 서로 안 먹는 것이 좋으니라. 남남끼

리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러자 이기채가 입을 열었었다.

"신행까지 아직도 창창허게 남었는데 천천히 가지요, 뭐. 저도 아직 학생이니

헐 일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헐 일이 많다손 치더라도 사람으로서 인륜의 근본을 어기면서까지 헐

일이란 무엇인고."

"아직 나이 저렇게 어린 것이, 인륜이며 음양이 무언지 알겠습니까?"

"모르면 가르쳐야지."

"가르친다고만 되는 일인가요? 다 때가 있는 법이지요. 묵신행 이삼년 걸리기

예산데,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르다니... , 저 애 혼행 다녀온 것이 벌써 작년 가을 이얘기 아닌가. 해를

넘겨 보름에 가까운데 아직까지 재행도 안 가고 있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어?

편지 한 장도 없이 . 그런 것을 나이 탓으로만 돌린단 말인가. 열다섯이 적은 나

인가? 인제 설도 쇠고 했으니 열여섯이야. 열여섯이면 호패를 차는 나이야."

"억지로야 그것이 되는 일입니까?"

이기채는 확실히 무엇인가 사돈댁에 대하여 틀려 있었다. 혼행길에서만도 그

러지 않았는데, 상객을 다녀온 뒤, 말로는 하지 않았었지만 몹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강모야, 할미한테 말해 보아라, 언제 가겠느냐?"

청암부인이 강모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며 물어 본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러나, 눈매에 엄격한 서리가 서려 있다. 그 눈매의 서리 때문에, 사람들은 부인

앞에서 말할 때 보통은 고개를 잘 들지 못한다. 멋모르고 이야기하다가 부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까닭 모르게 이쪽이 얼어붙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소가에

서나, 호제, 하인, 비복들이나 과객이나 마찬가지로 그랬다. 그래도 비교적 양자

이기채는 그 깐깐한 성품답게 자기 할 말을 하는 편이었으며, 청암부인 또한 그

런 그의 언행을 나무라지 않았다. 강모는 아직 연소한 탓도 있었으나 부인의 보

살핌을 지극하게 받은 고로 할머니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

도 그는 청암부인의 심기가 지금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네의 심중 밑바닥에 고여 있던 어떤 힘이나 노여움이 솟구칠 때의 추상 같고

도 뇌성 같은 기세를 강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모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렵기도 했다.

"말을 해 보아라."

강모는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모님. 제가 사랑으로 데리고 가서 타일러 보지요. 알아듣게 이르겠습니다."

숙부 기응이 결국 강모를 모면시켜 주었다. 본디, 이기채와 기표, 기응은 동복

형제였다. 그러나 대종가의 종손인 준의가 그 나이 열여섯 살을 가까스로 넘기

고 세상을 떠났을 때, 청암부인은 열아홉의 나이로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준의의 아우 병의가 성혼하여 그 장자 기채를 큰집으로

양자하였다. 부인이 스물다섯 살에 기채를 양자로 맞이하였는데, 기채도 벌써 사

십을 넘어 서너 고개에 이르니, 청암부인은 어느덧 예순여덟이라, 고희 일흔의

가파른 마루턱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딸 가진 쪽의 마음은, 아들하고는 또 다른 법이니라. 사람의 마음을 근심으로

졸아들게 하는 일이란, 몹쓸 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봐라. 당장에 우리들도

강련이 일로 얼마나 근심을 허는고, 딸자식이란 키울 때도 정성이 열 배나 더

들지만, 시집을 보내고 난 다음이 더 근심거리인즉."

강련은 강모의 큰누이로, 멀리 황씨 문중으로 혼인하여 간 사람이다. 강련의

이름이 나오자 이기채의 미간이 날카롭게 찌푸려진다.

"나가 보아라. 사람의 마음이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만, 안 가는 마음이

라도 그저 자꾸 기울이면 자연 흐르고 고이게 마련이니라. 물길이나 같지. 어찌

되었든, 이번 정초에는 대실에 꼭 다녀오너라. 늦어도 보름을 넴기지 말고."

큰방에서 기응을 따라 대청으로 나오는데, 건넌방의 문이 열리며 율촌댁이 내

다본다. 기응은 그 기척을 알아차리고

"이따가 사랑으로 나오니라."

하더니 혼자 토방에 내려선다. 율촌댁은 큰방에서 나는 소리를 내내 듣고 있

었던 것이다. 혼자 이쪽 방에서 마음을 조이고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그네는

강모를 가만히 부르고 싶어 내다보았다. 강모는 건넌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책

상다리를 한 채 입을 다물고만 앉아 있었다. 율촌댁이 모반에 강정이며 약과를

담아 내놓는다.

"좀 먹어라."

입맛이 당길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율촌댁은 말이 없는 강모의 손에 약

과 한 개를 굳이 들려 준다. 보름이 지나고 언뜻 며칠 뒤에는, 학기가 시작되어

전주로 가 버릴 아들이다. 무엇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심정에 그네는 강모만

보면 먹을 것을 내놓지만 그는 거의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손에 들려

준 약과를 다시 모반에 담아 버리고 강모는 일어선다. 율촌댁이 앉은 채로 아들

을 올려다본다. 한 말이 있다는 얼굴이다.

"사랑에 나갈라요. 오류골 숙보 기다리실 텐데."

겨우 밀어낸 한 마디를 남기고 강모는 그냥 건넌방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러

나 바로 사랑으로 들지 못하고 누마루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안서방이 사기가루

빻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강모 안 들어오냐?

작은사랑방에서 기응의 목소리가 토방으로 들려왔다. 아마, 강모가 밖에서 서

성거리는 것을 눈치로 느낀 것 같았다. 강모는 짜증이 역력한 발짓으로 신발을

댓돌 위에 팽개치고 작은사랑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부친 이기채에게보다 숙부

기응에게 훨씬 친근하게 마음을 놓는 강모의 속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차다. 이 아래로 내려오니라."

"괜찮아요."

"이리 와아. 여기는 뜨시다."

강모는 아랫목으로 내려가 기응의 곁에 앉는다. 기응은 모색이 잘 생긴 편은

아니다. 그저 순후질박한 모습이라고 할까, 꾀가 없는 천성을 말하듯 그의 눈은

항상 담담하고, 입술에도 욕심이 물려 있지 않다. 그러나 결단력이 없어 자기 앞

에 각단지게 꾸려나가기 힘든 사람처럼도 느껴진다. 어쨌든 강모는 오류골 숙부

를 대하면 마음이 푸근하다. 은연중에 청암부인의 서릿발 같은 기상, 이기채의

놋재떨이 같은 강단에 짓눌리며 가슴을 제대로 못 펴고 자라난 탓일까. 그래서

자연 틈만 나면 오류골 작은집으로 내려가게 되고, 가면 그곳에는 강실이가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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