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만 뚫고 말았던가?"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고?"
모여앉은 부인들은 짓궂은 말꼬리를 이어가면서 웃었다. 효원은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드디어 버선을 벗어냈다. 콧등에 땀이 돋아나고 힘이 빠졌다. 갑자기
속박에서 풀린 발이 얼얼했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싸며 주무른 뒤, 그네는 다시
새 버선을 챙긴다. 초록 저고리와 붉은 치마로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큰
비녀를 뽑더니 머리를 풀어 내린다. 숱이 많고 칠흑 같은 머리채다. 그네는 잠시
그러고 앉아만 있다. 네가 나를 어찌 알고... 나를. 그 생각이 다시 한 번 가슴속
에는 부뚜질하며 치밀어 오른다. 숨을 가라앉히려고 경대를 앞으로 당겨 뚜껑을
연다. 귀목판에 생칠을 하고 백동 장식을 붙인 경대의 거울이 일어선다. 거울 속
에는 더 깊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아직 거울을 보기에는 이른 시각인가. 방안은
어느덧 희끄무레하건만 거울은 컴컴하다. 경대 서랍에서 빗치개를 꺼내 가리마
를 타 보려고 하였으나, 손이 떨릴 뿐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제대로 될 리가 없
었다. 그네는 빗치개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등뒤의 신랑을 돌아본다.
아아.
그네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신랑을 바라본 순간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마음의
밑바닥이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퍼엉 뚫리면서 그 한
가운데로 음습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역력히 느껴진다. 뚫린 자리는 동굴처럼
어둡고 깊었다.
아아... 저런 것을 믿고... . 효원이 본 것은 신랑의 민둥머리였다. 배코를 쳤는
가.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드러난 그의 머리통은 어린아이와 다름없이 동그랗고
작은데, 검어야 할 부분이 허옇다. 푸른 기운마저 돈다. 까까머리였던 것이다. 그
민숭한 모습이 효원에게는 그렇게 충격적이고, 까닭없이 절망스러웠다. 손바닥에
서늘한 땀이 배어난다. 이제야 막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지 한두 해 되었으니, 의당 머리를 깎았으련만, 그리고 그런 머리를 처음 본 것
도 아니었건만, 효원은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비릿한 역겨움이 목을 밀어
올린다. 강모는 고개를 돌려 누우며 두 팔을 무겁게 들어올린다. 무엇을 잡으려
는 시늉을 한다. 효원은 의아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힘없이 떨어진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모는 어느덧 매안의 아랫몰 밭둑머리에 서 있었다. 아른아른한 아지랑이가
향불 연기처럼 오르는 마을의 뒤쪽으로, 벼슬봉과 노적봉, 선녀봉들이 물결을 이
루며 마을을 병풍같이 두르고 있다. 그 봉우리들의 소나무 빛깔이 신맛이 돌게
푸르다. 그리고 노적봉 아래 다소곳이 다정하게 엎드린 초가의 지붕 위로 햇살
이 빗질하듯 내리고 있었다. 햇살은 너무나 고요하여 숨이 질린다. 그런데 사람
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소리 죽여 들어앉아 있
는 것도 같고, 어쩌면 온 마을의 집집이 텅 비어 있는 것도 같았다. 괴괴하기까
지 하였다. 강모는 홀로 아지랑이와 햇살 속에 서서 이상하게 숨이 막히고 고적
했다. 그 고적이 우무같이 엉기어 내려앉은 햇살에 어깨가 무거웠다. 무거움에
핏줄이 짓눌린다. 햇살에 짓눌린 핏줄이 석류 벌어지듯 쩌억 소리를 낸다.
... 강실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밭둑머리 저쪽에서 연분홍 빛깔이 팔락 나
부끼는 것이 보였다.
... 강실아...
강모는 그게 강실이인 것을 금방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마음이
잦아들게 간절하여 연분홍 옷자락을 불러냈는지, 아니면 그네의 모습이 거기 먼
저 보여 그가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강실이는 오류골 작은집 사립문간의
검은 살구나무 둥치에 반쯤 가리어져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보였다.
... 강실아...
그러나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강실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를
수가 없으니 마음은 더 간절해져서 헛발을 딛는다. 아무리 발을 떼어도 제자리
였다.
... 이리 와, 강실아.
여전히 햇살은 두꺼운 장벽처럼 흔들리지도 않고, 강실이의 연분홍 옷자락은
그만한 자리에서 보일 듯 말 듯 나부끼고만 있다.
... 나 좀 보아.
어쩌면 그것은 강실이가 아닐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강모는 어찌할 길 없는
마음이 뒤엉기어 사무치면서 핏줄이 때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는 두 손
을 내밀어 팔을 뻗어 본다.
그러나 무거운 햇살을 가로막을 뿐, 손이 닿기에는 너무나도 아득한 자리에
강실이는 서 있었다.
... 나 좀 보아.
목소리가 터지면서 마음 놓고 부를 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투
명한 물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처럼 허위적거려지기만 할 뿐, 강모는 한 발자국
도 더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햇살이 물엿처럼 녹는다. 그대로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다리와 가슴과 머리 위에 채우고 그보다 더 아득한 공중까지 넘치
는 간절함이 강모의 목을 누른다.
... 나 좀 보아.
손간, 강실이는 강모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살구나무 저쪽에서
홀연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강실이의 모습이 선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네가 다가온 것도 아니었는데 , 그렇게 아주 가까이서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강실이는 연분홍 치마에 연두색 명주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네는, 자주 고름을
손가락에 감은채, 고개를 갸웃 돌리고 있어서 금방 돌아서 버릴 것만 같은 모습
이었다. 햇살이 아지랑이에 일렁거리면서 강실이를 에워싸고 있다. 마치 그네도
아지랑이가 되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연분홍 치마와 연두 저고리의 애달픈
빛깔이 흔들린다. 햇살은 강실이의 검은 머릿단에 푸르게 미끄러진다. 그 머리
위에는 눈부신 자운영 화관이 씌워져 있었다. 진분홍과 흰색이 봉울봉울 어우러
진 자운영 화관은 햇무리마냥 휘황하고도 아련하게 강실이의 머리를 두르고 있
는 것이다. 그 햇무리가 광채를 뿜으며 강모의 눈을 아프게 쏘았다.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것은 초례청의 신부가 쓰고 있던 오색 찬란한 화관과 뒤범
벅이 되어 강모의 가슴팍으로 쏟아진다. 흙더미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사태가
난 것도 같았다. 햇살이 무서운 속도로 쏟아지며 무너진다.
... 강실아아.
가슴 속살에 자운영 꽃잎이 톱날처럼 박힌다.
... 아아.
강모는 가슴을 오그린다. 톱날에 베인 자리에서 피가 빠짓이 배어난다. 그러나
그 아픔은 어깻죽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누군가 강모의 어깨를 장작으로 후려쳤
다. 한 번만이 아니라 정신없이 내리치는 그 매는,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뭇
사람이 한꺼번에 때리는 몰매였다. 강모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덕석에 말어라.
쉬어 갈라진 그 목소리는 오류골 숙부의 것이 분명하다. 이놈, 이 인륜 도덕이
무언지도 모르는 천하에 못된 노움. 짐승 같은 놈, 네 이노오옴. 가문에 먹칠을
하고 상피붙은 네 놈이, 그래 사람이란 말이냐. 사람의 가죽을 쓰고 네가 이놈,
감히 어디서. 햇살처럼 몰매가 쏟아진다. 비명도 없이 강모는 매를 맞는다. 돌팔
매가 날아온다. 찢어지고 깨진 강모의 피투성이가 된 몸을 누가 뒤에서 순식간
에 덕석으로 덮으며 두르르 말아 버린다.
허억
강모는 숨이 막혀, 두 손으로 덕석을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에서 깬
그는 비로소 긴 숨을 내뿜었다. 식은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아직 방안은 날이
채 밝지 않아, 땀이 번지어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감추어 주고 있었다. 그는 무
망간에 웃목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녹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받쳐 입고,
장지문 쪽으로 돌아앉아 머리에 비녀를 꽂는 중이었다. 강모에게는 그 뒷모습만
보였으나, 그가 일어나는 기척이 있었는데도 그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비녀를 다
꽂고 나서도 밀기름 바르는 시늉을 하며 쪽 지은 머릿결을 침착하게 다듬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단호해 보인다. 꿈에서 막 깨어난 탓일까. 그보다는
낯설고 어려운 그네의 뒷모습 때문일까.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다. 강모는 문득
꿈에 자기를 숨막히게 감았던 것은 덕석이 아니라, 어쩌면 강실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햇무리가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깨어난 지금도 그 햇무리는 온 몸을 에
워싸고 동여매면서 드디어는 모가지까지 감아 올리며 숨을 조이는 것 같기만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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