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실이를 어찌 볼고... .)
강모는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었다. 어쩌면 강실이는, 그 우무질의 속속 깊숙
이 감추어지고 숨겨져 버려서 다시는 얼굴마저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도 마을은 낯설고 어색하였던가. 아아. 강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
다. 그리고, 구로정의 둔덕에 서서 강실이의 집, 살구나무를 내려다보았다. 각성
바지들이 호제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민촌 거멍굴을 지나올 때도, 그들은 나락
을 찧다 말고 일손을 멈춘 채, 혹은 콩 타작 한 것을 도리깨질하다가, 연자매를
돌리다가, 강모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무엇인가 부러운 듯한 시
선과 함께, 자기들끼리 한 말이지만 강모에게도 그대로 들리는
"얼매나 좋으까이... ."
그러더니, 아랫물, 중뜸을 지나 구로정에 이르자, 문중에서도 마중을 나왔다.
"새신랑 오는가?"
"장가드는 것이 좋기는 좋구나. 그새 신색이 휘언해졌구나."
"밤새 안녕허시난다드니, 강모야말로 밤새 어른이 되어 버렸네에."
그러나 강모의 귀에는 그런 말들이 한낱 바람 소리와도 같이 들렸다. 원뜸으
로 올라가는 고불고불한 고샅만이 하옇게, 멀고 먼 길처럼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구로정에서도 한눈에 들어와 보이는 오류골 작은집의 늙은 살구나무 둥치만이
어두워지는 만추의 하늘을 떠받들며 거멓게 드러나 보였다. 혼례를 올린 후 인
재행을 마치고 삼일 만에 신랑과 함께 신부가 시댁으로 신행을 오는 집안도 더
러 있기는 하였지만, 반가의 법도로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삼일신행은 상민
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의 신부는 신랑을 홀로 보낸 후
친정에 남아 있다가, 다시 좋은 날을 받아 우귀를 하는 것이다. 시댁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 보통은 일 년이 걸리기도 하고, 길면 삼 년도 걸린다. 물론
양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몇 달 만에 신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웬만한 경우에는 일 년 정도는 묵히는 것이 상례였다. 사람들은 그런 풍습을 '묵
신행'이라 불렀다. 그러니 강모는 신부를 데불지 않고 혼자 돌아왔지만, 대소가
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온 것이나 진배없이 하례하였다.
"큰일났구나. 이제 몸은 매안에 있고 마음은 대실에 가 있을 것이니, 강모 키
가 삼천 발이나 되겠다."
"베갯머리 허전에서 밤이면 잠을 어찌 들꾸?"
"하릴없는 노릇이지 별 수 있겠나? 만리 같은 남도 땅 대실에는 혼자서 남 몰
래 몽중에나 오갈 수밖에."
"처음엔 다 그런 것이니라. 그 고비에 정 들으라고 떨어져 있는 것이매, 너무
상심은 말 일이야."
"그나저나, 학생 서방님, 이제 콩밭에다 혼을 다 뺏기게 생겼으니, 서안을 멀리
하면 장래 일이 근심이로세."
떠들썩한 하객들의 웃음 소리에, 문득 대실의 초례청과 음식 냄새. 기러기 코
에 걸려 있던 청실 홍실이 나부끼며 강모의 뒷머리를 휘감아 짓눌렀다. 강모는
웃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슬그머니 방안에서 빠져 나와
마당에 섰을 때,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소맷자락과 목 언저리로 싸늘한 밤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때 강모는 중문 곁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막 중문으로 들어서려는 것도 같았고, 중문을 나서려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
렇게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며 들지도 나지도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워진
반공에 우두터니 서 있는 중문의 기둥은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거기 서 있는
사람을 감추어 주고 있었다.
"... 강실아."
강모는 그렇게 불렀다. 그림자는 순간 멎은 듯이 조용해졌다. 강모는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왜 안 들어와? ... 들어와."
아마도 그네는 숙부 내외를 따라 큰댁으로 올라왔던 길인 듯싶었다. 그런데
오류골 숙부 내외와 강태는 사람들이 들어차 웃음 소리로 넘치는 큰방에서 보았
지만, 강실이는 눈에 띄지 않았었다. 강모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어 서 버리
자 강실이 쪽에서 주춤주춤 움직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혼행길은, 무사하... 셨어요?"
그 더듬거리는 말의 끄트머리 때문에, 강모는 순간 아찔하였다. 무사하... 셨어
요? ... 셨어요... ? 마음이 서늘하게 식으며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렇게 강실이가
멀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강모의 탓이 아니라, 그네가 그만큼 멀찍
이 비켜 버린 탓이었을까. 강모의 혼인으로 인하여 강실이의 말투가 바뀐 것이
다. 그것은 그를 어른으로 대접하는 당연한 절차였건만,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던
가. 무거운 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았었다. 그런데 그 강실이가 지금 그때처럼
머뭇거리며 함지박을 들고 저만큼 빗기어 서 있는 것이다.
"누구 왔냐?"
방안에서 기응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때서야 강모는, 저예요, 하고 걸음을 떼
었다. 저녁 까치가 집을 찾아오고 있는지 허공에서 까작까작 소리가 울린다. 잔
설을 스치는 바람 끝이 차다.
"그래, 개학은 언제 허는고... ."
기응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의 허두를 그렇게 꺼낸다. 아까 참에 큰집에 들렀
던 강태도 강모와 두 학년 차이로 전주고보에 다니고 있어서 학교 소식을 들었
던 것이다.
"암만해도 객지란 내 집 같지 않은 법이라 고생 많이 될 것이다." 기응의 말
사이에 바람 소리가 섞인다. 강모는 그런 말들을 듣고 있지 않았다. 기응도 들으
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숙질은 서로 말이 끊긴 채 앉아만 있다. 말이 끊어진
사이로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그릇 씻는 소리가 달가락 달가락 들려온다. 그 소
리는 강모의 마음에 음향을 울리며 얹힌다.
"낯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으로 만나서, 무슨 정이 그렇게 샘문같이 솟아난다
냐. 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그저 성심껏 물주고 보살피고 맏어
두면, 어느새 잎사귀도 나고, 꽃도 피고, 언제 그렇게 됐는가 싶게 열매도 여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울안에 갖다가 심어 놓고 천대허면
못 크는 법이 아니냐... . 정도 그와 꼭 같으다. 이왕에 정해진 일, 이제 와서 물
릴 수도 없는 것이고... . 내 맘 하나 먹는 것에 따라서 여자의 한평생이 죽고 사
는 일이 달렸다면, 어쩌든지 내가 맘을 다숩게 먹어야지... 안 그러냐... . 사람 하
나 잘못되는 것... 순간의 일이지."
한참만에야 입을 연 기응은 등판을 달겨 부싯돌을 그으며, 한 마디 한 마디씩
끊겨가며 천천히 말한다. 목소리에 등잔불의 그을음이 섞여든다.
"생각허면... 네가 여느 손자하고 어디 같은 손자냐. 그게 이렇다. 이름이 같다
고 몫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지. 너는 이 집안의 대종손이란 말이다. 너도 알다
시피 청암할머니가 그 어떤 분이시냐. 비단 이씨 문중에서만 어른이신 것이 아
니지 않느냐. 이 남원 군내에서는 그 이름이 울리지 않은 데가 없으니, 일찍이
소년의 나이에 청상으로 홀로 되셔서 오늘날을 이루기까지 그 양반의 고초가 어
떠했는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른의 의지는 누가 감히 흉내를 못내게 대
단한 것이지. 그런 양반의 손자로서 너도 남달리 처신을 해야 할 것이다."
바깥에 잔바람이 지나가는가. 문풍지가 더르르 울리더니 등잔불이 흔들린다.
자박 자박 자박. 정지에서 헛간 쪽으로 가는 발자국 소리가 불꼬리를 밟는다. 강
모는, 검은 그을음을 뱉으며 잦아드는 작은 불이파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강실이
가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난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이렇게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사무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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