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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9)

카지모도 2023. 11. 3.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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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여기, 용을 그리다가 말었네. 마저 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오니라. 식

혜나 한 그릇 먹자. 이얘기는 그때 허기로 하고."

기응은 꼭지연을 강모 쪽으로 밀어 주며 그렇게만 말하고 나갔다. 기응이 나

간 뒤, 벼루를 끌어당겨 붓을 적시었으나, 도무지 머리 속이 어수선하여 용이고

무엇이고 마음에 없었다. 그래서 나와 버렸다.

"다 되얏네요. 이리 주시지요."

안서방은 부레풀에 개어 넣던 사기가루를 털며 강모의 손에 들고 있는 자새를

달라고 한다. 손바닥에서 푸르르 가루들이 반짝이며 날아 떨어진다. 어느새, 짧

은 겨울 해가 설핏 지려고 한다. 지대가 높은 산 밑의 집이라 그늘이 드리워지

기 시작하고 있다.

"마님 지싱가... ."

대문을 들어서는 것은 아랫몰에 사는 타성 두 사람이다. 아마 세배를 오는 모

양이었다.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안서방이 풀그릇을 토방에 놓고 일어선다.

"나, 오류골 작은집에 가."

강모는 일어서는 안서방의 뒤에 그렇게 말하고, 공례하여 강모에게 고개를 수

그리며 웅숭웅숭 마당으로 들어서는 사람들과 엇갈려 솟을대문을 나선다. 저만

큼 눈앞에 보이는 논밭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기우는 저녁 햇빛에 주황으로

물들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지붕들의 한쪽에도 녹다 남은 눈이 쓸쓸하다. 강모

는 발로 돌멩이를 차 본다. 그래도 웬일인지 마은은 허전하다. 대문 양쪽에 서

있는 늙은 대추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스산한 잔가지를 덩굴처럼 늘이운 채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춥다... . 암,수가 마주보고 서 있는 은행나무도, 앙상

한 가지를 손가락같이 뻗치며 겨울 하늘을 향하여 떨고 있다. 강모는 목을 한

번 움츠렸다 펴고는 명주목도리를 다시 감는다. 오류골 작은집은, 대문을 나서면

바로 내려다보인다. 종가의 대문 아래 두 번째 집은, 추천 작은집, 기표가 살고

있고 그 건너 나지막하게 엎드린 초가가 기응의 집이다. 허물어질 듯한 토담에

저녁 황혼이 쏠리고 있다. 강모가 살구나무 아래서 한 번 멈추어 섰다가 마당으

로 들어갔을 때, 마침 강실이는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 손에 기명 물이 담

긴 함지박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 앞에 수채에 물을 버리려고 나온 모

양이었다. 함지박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었다. 그릇을 씻은 물인가... . 강실이는

함지를 든 채로 강모를 바라보았다. 그네는 연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강모에게는 낯익은 빛깔이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강실이는 설빔으

로 같은 옷을 입었었다. 솜씨가 음전한 오류골 작은어머니는, 강실이의 키가 크

는 것에 따라 입었던 옷을 뜯어 다시 짓는데도, 언제나 마치 새 옷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물론 청암부인이 세안에 미리 강실이의 설빔 몫으로 명주를 내

리기도 했었으나, 오류골댁은 강실이한테 곱게 한 번 대보기만 하고는, 보자기에

싸서 반닫이에 넣어 두고 말았다. 혼수로 아끼는 것이리라. 재작년 강모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정초에, 강모는 연분홍의 치마에 연노랑 명주저고리를 입

은 강실이와 마주치면서, 무엇에 호되게 맞은 것처럼 순간 정신이 혼미했었다.

늘 보던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랄 수가 있는 일일까.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청

암부인 옆에 앉아 세배꾼들과 더불어 화롯불을 쪼이며 홍소를 터뜨리고 있을

때, 강실이가 세배를 드리러 올라온 것이다. 장지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실이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네가 아니었다. 아아. 강모는 가슴의 핏줄을 갬치 먹인 실

로 베이게 동여매는 것 같은, 이상한 아픔을 느꼈다. 가슴을 오그렸다. 막힌 핏

줄이 펄떡펄떡 뛰는 소리가 자기 귀에도 역력히 들렸다. 사람들은 그런 강모에

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둘러앉아 항렬대로 돌아가며 강실이의 세배를

받는 것이었다.

"아이구, 인제 우리 강실이가 처녀가 다 되었구나. 시집가야겄다."

청암부인이 모반에 엿을 담아 내주며 강실잉의 손을 잡았다. 강실이는 손을

잡힌 채 고개를 외로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네의 검은 머리단 끝에는 검자주

제비부리 댕기가 물려 있고, 수줍음에 물이 든 귀와 흰 목의 언저리에는 살구꽃

빛이 돌았다. 그리고 거기에 몇 오라기의 잔머리가 애잔한데, 그네의 둥근 어깨

는 강모의 마음에 야릇한 충격을 주었다. 휘어잡아 보고 싶은 심정을 내리누르

는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장지에 은은히 비쳐드는 밝은 햇빛을 등지고 앉은 그

네의 연노랑 어깨 너머로, 완자 살창은 햇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모

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도 스스럼없이 드나들던 작은

집에, 이제는 한 번 가려면 몇 번이나 마음을 다져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럴

수록 얼굴이 꽃빛으로 물들며 고개를 외로 돌리던 모습과 그 목 언저리 둥글고

어여쁜 어깨가 숨막히게 떠오르곤 하였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

정이었다. 때로는 그 심정 때문에 그대로 오그라져 버릴 것도 같았고, 어쩌면 터

져 버릴 것도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대문까지 내려왔다가, 작은

집의 검은 살구나무 둥치에 마음이 부딪치면서 덜컥, 자물쇠통 잠 는 소리가

나 더는 못 가고 그대로 돌아서곤 하였다. 그러면서 강모는 고보에 가기 위해

매안을 떠났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강모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작년 설에, 지난 해와 같은 설빔을 입고 강실이가 종가에 세배하러 왔

을 때, 강모는 콧날이 찡해지면서 반갑고도 애처러운 심정을 금하지 못했다. 형

언할 길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주고 싶은 간절함이기도 하였다. 강실이는 한 해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

다. 둥글고 도톰하던 두 볼이 갸름하게 흘러내리고, 눈매의 그늘은 잠잠하면서도

깊어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강모는 가슴이 사무쳤다. 한두 번 마주쳐도 강실이

는 강모를 바로 안 보고 비스듬히 얼굴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왜 지난 가을, 대

실의 신방에서 꿈에 본 강실이는 연두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연두의 빛깔이 지금도 선연히 가슴에 번지고 있는 것을 강모는 느낀다.

"... 오라버니."

강실이는 부엌 바라지 앞에 선 채로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김이 서려

있었다. 그네가 들고 있는 함지에서 김이 오르고 있는 때문일까. 그네의 얼굴도

김에 부옇게 어리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강모는 사립문간에 붙박인 듯

서서 차마 발을 옮기지 못하고 그런 강실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도 자욱

한 김이 서린다. 그것이 속에서 식으며 물방울로 맺힌다. 그대로 눈물이 배어 나

올 것만 같다.

"추운데... 들어가세요."

그래도 강모는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한다. 가슴에 서렸던 물방울이 차갑게 줄

을 그으며 복판으로 미끄러진다. 강실이는 강모와 한 살 차이일 뿐이었다. 그리

고 얼마나 허물없는 소꿉친구였으며, 정다운 오누이였던가, 지난 가을까지만 하

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놓고 지냈었는데. ... 지금은 다르다. 아니, 그것은 '

지금'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바로 그때부터 달라졌었다. 지난 시월, 대

실에서 혼례를 바치고 매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토록이나 마음 무겁고, 선뜻 동

구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어려웠을 때. 마치 달걀의 흰자위처럼 우무질로 투명

하게 엉겨 있는 것같이 느껴지던 마을은, 이상하게도 강모를 혀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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