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오."
기응은 다시 말머리를 잡는다.
"할머님도 이제는 연만허시다. 어른이 몸소 생산은 못하셨지마는 아드님이라도
손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 하나를 독자로 두었을 뿐이니 마음에 근심이
크실 게 아니냐. 네 위로 누이가 둘이 있었다고 하나, 작은누이는 그렇게 실없이
일찍 죽어 버리고, 큰누리 강련이만 해도 온전타 허기는 어려운 사람... . 집안
내력이 이러고 보니, 네가 아직 나이는 어리다만 어른 노릇을 해야 할 처지다.
그저 종가집이 흥해야 문중도 흥허는 법,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백 리라고 네
한 몸이 너 하나의 몸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지, 이번 일은 할머님 말씀대로
해라. 아, 그러고 할머님이나 네 아버님이나 모두 손자도 기달리시는데, 네가 그
소원을 풀어 드려야지, 안 그러냐?"
강모는 기응이 농담 삼아 덧붙인 끝의 말에, 속에서 불끈한 것이 치밀어 오른
다. 그것이 결코 단순히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도 강모의 심사를 북돋우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살갗을 거꾸로 거스르며 돋아나는 수치심이 소름처럼
끼치는 것은 모를 일이었다.
(아들? 내가... 아들을?)
강모는 가슴이 손바닥만하게 좁아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빨을 물듯이 오그라
들어 주먹이 되어 버린다.
"그만 가볼랍니다."
그 주먹이 목구멍을 치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모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다.
"왜 그새 가게? 저녁이나 먹고 가지. 이얘기도 아직 덜했는데."
"그냥 가지요 뭐?"
기응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럼 그래라."
그의 목소리가 무겁다. 강모는 등잔 불빛을 털고 일어선다.
"어른 말씀 듣는 게 도리다. 심정 상허지 말고... ."
"... ."
"아조 어둡기 전에 그럼 어서 올라가그라."
"예."
강모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컴컴한 마루로 나선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야기를 띤 밤바람이 싸르락 뺨에 닿는다.
"참, 너 인월아짐댁에 세배 갔었드냐?"
강모의 뒤를 따라 나온 기응이 잊었다는 듯이 묻는다.
"... 아니요."
강모가 마루 끝에 선 채 대답한다.
"잊어 버리지 말고 꼭 가서 뵙도록 해라. 적적하실 텐데."
"예."
"사람이 도리를 다 챙기고 살자면 끝도 한도 없는 것이다마는, 그래도 그런 것
을 늘 영념해 두어야지."
"예."
"대답만 허지 말고."
강모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토방으로 내려선다. 밤 기운이 밴 신발이 차다. 그
래서일까. 몸이 오스스 떨린다.
"왜, 갈라고? 저녁 다 해 놨구마는."
마당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오류골댁이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정지에서 나
온다.
"올라가서 먹지요."
"아니 왜 그렇게 금방 일어나? 아무것도 안 먹고는."
"또 내려오께요."
"오기는 언제 또 올래? 말이 쉽지. 그래 너는 작은집이 무슨 몇 천리 길이라고
그렇게 한 번 오기가 어려우냐? 오며 가며 좀 들어오지... . 넘의 집같이 사립문
앞을 그냥 지내가아. 늘."
오류골댁은 아무래도 서운하고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만큼 강모는 모처럼 온
것이다.
"아, 들어가그라아. 내가 금방 저녁 채려 주마."
"괜찮어요."
"너야 괜찮겄지마는 내가 서운해서 안 그러냐... . 들어가그라, 응? 오래간만에
강실이랑도 놀고. 그럼 식혜라도 한 그릇 마시고 가럼."
"집에 가서 먹지요."
"차암, 너도... . 누가 큰집에 식혜가 없어서 그런다냐... ."
그래도 강모는 발끝만 내려다본다.
"기어이 갈래?"
오류골댁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그럼, 저 올라갈랍니다."
"그래라. 정 네가 그러면 어쩌겄냐. 저녁 다 됐는데 밥이나 한 그릇 따숩게 먹
고 가면 좋겄그만."
강모는 그런 오류골댁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사립문 쪽은 더욱 어두웠다.
초생달이 하늘 한 귀퉁이에 걸려 있으련만 어둠을 비추기에는 너무나 가냘픈 것
일까. 찬 별빛만 몇 개 보인다.
"강실아."
오류골댁이 정지에 대고 딸을 부른다.
"오라버니 등 좀 잡아 줘라."
그 말 끝에 강실이는 소리도 없이 등롱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강실이 비
추는 등불의 불빛 때문에 강모의 그림자가 사람보다 먼저 사립문을 나선다.
"... 가시지요."
강실이는 강모 곁으로 다가서서, 한참만에야 그렇게 말했다. 거의 들리지도 않
는 잦아드는 소리이다. 그네가 들고 서 있는 등롱의 창호지 안쪽에서 붉은 불꽃
이 은은하게 비친다. 그것은 불빛인데도 젖어 보인다.
"... 길이 어두워서... 밤길이라... 발 밑에 잘 보고 가시어요."
강실이의 목소리가 귀에 젖는다. 어깨가 금방이라도 손 안에 잡힐 듯하다. 어
쩌면 강실이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목소리만 나를 젖게 하고, 옷자락 빛깔만 나
부끼면서, 강실이는 정말로는 없는 것인지도 몰라. 아아, 강실아,둥글고 이쁜 사
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
냐... . 강모는 사립문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겨울밤의 별빛들은
영롱하게 부서지며 바람에 씻기우고 있었다.
"나 갈라네."
한 걸음을 떼며 목에서 밀어내듯 강모는 말했다.
"조심해서."
"응."
대답 소리가 목에 잠긴 채 갈라진다. 사립문간에 강실이를 남겨 두고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에, 뒤에서 비춰 주는 등올의 불빛이 걸려 긴 그림자를 만들어
준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아."
하고 강모가 손을 들어 보인다. 강모의 눈에는 등롱의 불빛만 어둠 속에서 주
황으로 번지고 있을 뿐, 강실이의 모습은 어둠에 먹히어 보이지 않았다. 컴컴하
게 솟아 있는 솟을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보았을 때도 등롱은 그렇게 아슴하게 비
치고 있었다. 강모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강실이를 향하여 다시 한 번 손을 흔
들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지금 강실이도 나한테 이렇게 손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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