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씨가 머이간디? 일월성신이 한 자리 뫼야 앉어서 콩 개리고 팥 개리디끼
너는 양반 종자, 너는 쌍놈 종자, 소쿠리다가 갈러 놓간디? 그리 갖꼬는 땅 우에
다가 모 붓는 거여? 그렁 것도 아닌디, 사람들이 이리저리 갈러 놓고는 양반은
양반노릇 허고, 쌍놈은 쎄가 빠지고 안 그러요? 그거이 머언 씨 탓이라요?"
"그래도 그렁 거이 아니다. 다 전상에 죄가 많아서 이승에 와. 갚고 갈라고 이
고상을 안허냐. 속에서 치민 대로 말을 다 헐라면, 쌔바닥이 칭칭 필로 갱겨 있
드라도 다 못 풀제잉. 바깥으로 풀어내면 일도 안되고 화만 부르능 거잉게에 속
으다 또아리를 지어서 담어 놔라. 인자 이러고 참고 살자먼 이담에 존 시상도
오겄지."
공배는 담배 연기를 풀썩 뱉어낸다. 연기의 그늘이 얼굴에 어룽거리다가 흩어
진다. 옹구네는 막막한 심정으로 들녘을 보라본다. 들판은 아득한 연두 물빛이
다. 거기다가 막 씻어 헹군 듯한 햇살이 여린 모의 갈피에 반짝이며 숨느라고
여기저기서 그 물빛이 찰랑거린다. 옹구네는 이도 저도 다 귀치않고, 그저 한판
늘어지게 잤으면 싶었다. 그래서 하늘로 고개를 젖히고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구더기 속에 파묻혀 한평생 지낼 일이 순간 아득
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 마을에서 대두레의 농악을 울릴 때는 참
좋았었지. 날마다 그날만 같으면 오죽이나 좋을꼬. 지금도 옹구네 귀에는 그때의
농악 소리가 개갱갱갱거리는 것 같았다. 어깨까지도 들먹여지는 소리가 아니었
던가. 그 두레를 시작하는 날의 농악만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무너지고, 주
종이 한 자리에 어울려들 수 있었던 것이다. 종가나 문중의 부농들은, 두레에 들
어도 직접 모내기에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머슴과 품꾼들이 맡아서 했다. 그렇
지만, 문중에서는 중농 이하가 되는 집은 농사 일을 손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까. 사실 조선조의 엄격한 신분 계
급으로 사, 농, 공, 상이 있었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 사와 농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나라가 망하여 일본의 속국이 된 지금, 어디 출사하여 벼슬을 할 조
정도 없거니와, 정자관 쓰고 들어앉아 글만 읽을 풍류 세월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문중에서는 웬만하여 머슴들과 삯꾼으로 농사를 할 수 있는 집이라면
모르지만, 여의치 않을 집에서는 논밭에 직접 나서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안을 대하거나, 일이 있어 큰 갓을 쓰고 출입을 할 적에는 다시 선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연히, 사와 농은 경우와 때에 따라서 분리된다고
나 할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그 자신이 손수 논밭
에 나서서 땀을 흘리는 일은 광영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문중에서도, 타성들도
축에서 빠지는 이들을 경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빈농에 이르러서랴.
"오루꿀양반, 장구 치는 솜씨 한 번 휘들어지등만."
옹구네는 논배미 저쪽에서 못줄을 보고 있는 기응을 보고는 평순네에게 말을
건넨다. 두레가 시작되던 날의 농악은 대단했었다. 일에 따라 일손끼리 소두레도
짤 것이지만, 모내기는 농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대
두레를 짜는 것이다. 두레를 짜면 모내기 할 순번을 정하는데, '못날 받는다'고
한다. 그 못날을 받은 다음, 쟁기질 할 일이 많은 첫 번째 집의 모내기를 시작하
기 전에, 마을의 모정 앞 공터에서 하루 온종일 농악을 하며, 새로 시작할 일을
위하여 축수하는데, 그것이 볼 만하였다. 마을 전체가 들썩이며 울리게 되는 농
악의 꽹매기 소리가 산천을 두드리며 절정을 오를 때, 온 마을 사람들은 한 덩
어리로 어우러지고, 종가에서는 푸짐한 술과 음식을 모정으로 내보냈다. 으레,
첫 번째 모내기는 종가의 것을 하였다. '두레'란, 서로 서로 개인적으로 품을 맞
바꾸는 '품앗이'하고는 일의 성질부터가 달랐다. 한 마을의 성년 남자 전원이 의
무적으로 참가하는 이 두레는, 경작할 땅의 많고 적음이나 자타의 구별도 없이
공동으로 일을 한다. 품이 열 개 드는 집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쪽에서 미안
해하며 술과 담배를 내놓고 인사를 닦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염려는 안해도 된
다. 행수와 도감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 그냥 내 일 네 일 없이 함께 한 동아리
가 되어 움직이고, 드디어는 맨 마지막 집까지 모두 똑같이 일하고는 끝내기 때
문이다. 거기에, 뼈 빠지게 농사지어 누구 좋은 일 시키는고, 싶은 마음 같은 것
은 끼여들 틈도 없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흙이 덩어리였다. 그저 다만 풍년을
간절히 바랄 따름이고, 날씨가 알맞기를 축수하며, 이렇게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매끌한 논바닥에 모를 꽂을 때, 손 끝으로 전해지는 이상한 뿌듯함이 몸을
채우는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의 농기 깃발을 호기롭게 펄럭이며 농악대가 동
네 모정 앞에 모였을 때, 사람들은 그 날씨의 화창함과 울리는 소구, 장구 소리
에 진심으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농사일이 부디 순탄하기를 빌었었다. 그날, 상
쇠, 상소고, 상버꾸, 상무동을 섰던 사람들도, 징과 꽹과리, 장구, 북을 두드리던
사람들도 그렇게 신명나게 날라리 호적을 불던 사람들도, 몸에 감았다. 청홍의
띠를 벗어놓고, 지금은 오로지 모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얼마나 즐거웠던가. 논
갈기를 필두로 가래질, 써레질에 못자리하기, 볍씨치기, 거름주기, 피고르기, 모찌
기, 모심기, 그리고 콩심기며 풀하기, 벼베기, 볏단 주워묶기, 굉이기,
타작, 거기다가 흥겨운 방아찧기, 새끼꼬기, 가마니치기 등을 있는 대로 흉내내
며 농악대의 쾌자 자락이 휘날릴 때, 열두 발 상모가 푸른 하늘에 그리던 갖가
지의 하얀 무늬는 또 얼마나 경쾌하고 절묘하였던가. 거기다가 여장을 한 무동
들이 다섯이나 나와서, 삼베 길쌈하는 흉내를 어찌나 앙징맞게 하는지, 그만 복
장을 쥐어 잡고 웃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쪼개기, 삼삼기, 상뭉치기, 물레질,
감는 돌개질, 익히기, 푸는 돌개질, 날기, 베매기, 짜기, 빨래하기 등의 시늉을
감치게도 잘 해내어, 보고 있던 아낙들은 눈귀에 질금질금 눈물이 번질 지경이
었다. 그럴 때의 아낙들은, 집안에서 바깥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왼자락으
로 치마를 여며 입는 반가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렇게 한
평생 농사짓고 베틀에 앉아 손톱 발톱이 닳아지도록 베만 짜며 살다 가는 것이
조금도 원통하지 않은 것이다. 원통하기는커녕 웬일인지 감사하고 까닭 모르게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종가의 종손이
된 이기채와 동복의 형제였으나, 그것과는 관계없이 얼마 안되는 두락의 농토를
소중하게 아끼고 경작하였다.
"동생 주변도 알아 주어야 허네. 어찌 그리, 앉은 방석을 못 돌리고 매양 그렇
게 근근헌 생활을 벗들 못허는고?"
일찍이 전주와 남원을 무시로 출입하며 기민하게 움직이던 중형 기표는 기응
을 핀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어날 적에는 한 어버이 속에서 동복으로 낳았건만, 장형께서는 가문의 종손
이 되시고, 하루아침에 천만석꾼의 상속자가 되지 않으셨는가. 헌데, 우리라고
이렇게 찌그러진 논밭 뙈기나 주무르며 살다가 말란 법이 있는가? 그럴 수는 없
지 않느냐고, 일찍이 선친께서는 본디 문약허신 분으로 우리 형제한테 무슨 변
변헌 재산도 못 남겨 주셨지만, 그때 세상에는 또 그것이 별 흉도 아니었다. 허
나, 지금은 세상이 달러. 이제 두고 보아. 앞으로는 재산 있는 사람이 양반이 될
것이야. 돈이 양반이란 말이지. 동생도 물정을 좀 깨쳐야겄네. 스스로 미처 못
깨쳤을 때는,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오기라도 해야지."
기표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본디 그의 부친 병의씨로부터 물려받는
문장과 필재가 남달랐다. 거기다가 명석, 민활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외처의
바람을 많이 쐰 탓인지,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 그 눈의 형형함은
장형 이기채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채의 눈빛이 강단과 집념에 빛나고 있
다면, 기표는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작고 가늘면서도 각이 진
눈의 안광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아들 강태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고는 하였는데,
그 눈빛은 때때로 남모르게 번쩍이며 푸른 빛을 띠었다. 거기다가 이기채의 깐
깐하고 작은 체수에 비하여, 기표의 풍채는 시원하고 늠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
은, 자칫 그의 풍채와 혈색 때문에, 그 눈이 뿜어내는 각이 지고 날카로운 푸른
빛을 놓치고 잊어 버리는 것이다. 이기채는, 기표를 옆에 두고 오른팔처럼 썼다.
타지에 나갈 일이 있으면, 큰일이건 작은일이건 기표를 불렀다. 기표는 얼마든지
기꺼이 응했다. 응할 뿐만 아니라 먼저 나서기도 했다. 항상 몸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기표로서는 기응의 처신이 못마땅하여 혀를 차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응은 그런 것에는 쾌념하지 않았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1권 (18) (0) | 2023.11.16 |
---|---|
혼불 1권 (17) (0) | 2023.11.15 |
혼불 1권 (15) (0) | 2023.11.13 |
혼불 1권 (14) (0) | 2023.11.12 |
혼불 1권 (13) (0) | 2023.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