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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4)

카지모도 2023. 11. 1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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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위태한 일이로다."

결국, 어른 중의 노인 한 분이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근심은, 훗날,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다.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

청암부인이 사무치게 뼈에 새겼던 그 말은, 어찌 보면 사실 인력을 다하지 않

았던 시부에 대한 명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디... ."

옹구네가 목에 걸었던 무명 수건 자락으로 이마를 훔치며 평순네를 향하여 말

소리를 낮춘다. 평순네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이제 해는 어느덕 중천으로

떠오르고, 들판에 엎드린 사람들의 낯빛도 발갛게 대추같이 익어간다. 평순네의

이마에도 땀이 번질거린다. 옹구네나 평순네는 모두 매안의 아랫몰 물 건너, 한

식경이나 벗어난 골짜기 거멍굴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로, 놉이라 할 것도 없이

궂은일, 잔일 마다 않고 문중에서 허드렛일이 있을 때면 으레 맡아 하였다. 굳이

무슨 몫을 구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따로 정해진 새경이 있는 것도 아

니었다. 그저 당하는 대로 부스러기를 얻어먹었다. 오랜 세월 전부터 오늘날까

지, 고목의 언저리에 저절로 버섯이 돋아나듯, 반촌의 그늘에서 그들은 살아왔

다. 아마 거멍굴이라는 이름도, 남루한 그들의 마을 복판에 검은 덩치로 커다랗

게 우그리고 앉은 '근심바우'에서 생겨났다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옷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밤낮없이 흙밭에서 뒹굴고, 험한 잡일에 식구의

연명을 걸고 있자니, 손톱발톱을 깎지 않아도 자랄 틈이 없는데, 의복인들 제때

에 빨아 입고 지어 입을 수 있으며 간수할 수 있었을까. 그저 몸에 꿰고 나가면

석 달 열흘이 지나도 철이 바뀌기 전에는 누더기가 다 되도록 갈아입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어떻게 흰 무명옷으로 떨쳐입을 수 있으리

요. 거멍물 들인 다섯새 무명 치마폭을 무릎까지 드러나 보이기 예사였다. 때깔

나게 발등에 찰랑거리는 치마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치맛자락 여미는

데도 법도가 있어, 거멍굴의 아낙들은 모두 상것, 천민이라 오른쪽으로 자락을

둘러 입었다. 그것이 법이었다. 왼자락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것은 반가의 부인들

뿐이었다. '거들치마'말고는 '두루치'가 있는데, 이것도 폭이 좁고 길이도 짧아

낡아빠진 고쟁이가 드러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치마라고 해야 정강이나

덮는 둥 마는 둥이었다.

"새벽 질삼 질기는 년, 사발옷만 입고 간다."

는 민요가 생길 만한 것이다.

"죽고 살고 엎어져서 논 매고 밭 매도 이년의 목구녁에는 보리죽이 닥상이고,

손톱 발톱 다 모지라지게 베를 짜도, 내 평생에 얻어입은 것은 요 사발만헌 두

루치 한 쪼각이여."

그것은 항상 옹구네가 내뱉는 한숨에 섞여 터져 나오는 넋두리였다. 그렇게

구차한 의복에다, 몇 백 년을 두고 상민들에게는, 값비싼 주옥과 보패를 지니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복색에 있어서도 황, 자, 홍색을 금하였으니, 옷고름

짝 반토막 고운 빛이 없어 거멍굴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거멍굴에도 오색이 찬란한 날이 있었다. 이날만은, 아무도 아무것도

이들의 차림새를 간섭하지 않았으니, 형편만 허락한다면 마음껏 꾸미고 입고 온

갖 치장을 다 해도 좋았다. 문무 백관 벼슬아치가 입는 사모관대와 신분 높은

부녀자의 예장인 화관, 족두리, 원삼으로 얼마든지 치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혼

례가 있는 날이다. 나라에서도, 혼례만은 인륜의 대사라서 특별히 은사를 내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겐들 대례청의 청, 홍이 휘황하게 느껴지지 않으리오만, 이

거멍굴 사람들에게 찍혀 있는 그 찬란한 빛깔은 일생에 한 번이어서 유독 선명

하고, 선명한 만큼 소중하였다. 그것은 옹구네도 마찬가지다. 그네는 언제라도

그날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주욱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 코를 팽 풀어

가면서. 옹구네의 콧방울이 벌름한다.

"새서방님은 아직도 재양을 안 가셌담서?"

"그러셌다대... ."

새서방님이란 강모를 이르는 말이다. 평순네는 지나가는 말로 대꾸를 한다. 옹

구네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해진다. 혼인하고 돌아온 신랑이 처음으로 처가에 다

니러 가는 것이 재행인데, 강모가 그 일을 미루고 있다는 소문이 그네를 근지럽

힌다.

"어쩔라고 그런디야?"

"그 속을 누가 알겄능가잉?"

"핀지도 안허겟스까?"

"아, 핀지 허실 양반이 그러고 지겟스까잉, 여그서 거그가 머 천릿질이라

고."

갑자기 평순네가 한 다리를 들며 손바닥으로 철썩 내려친다.

"아이구, 이 호랭이 물어갈 노무 거마리."

핏방울이 맺히는 다리에 진흙을 발라 문지르며 그네는 논바닥에 침을 탁, 뱉

는다.

"거마리만 없어도 농사짓기 일도 아니지 머. 참, 근디 요새 율촌샌님도 벨라

심기가 안 좋으싱갑대."

옹구네는 옮겨진 못줄을 따라, 뒤로 한 발 물러나며 말한다.

"그 어른은 머 어지 오늘 그러시간디?"

"그렇게 말이여. 왜 대실로 상각 갔다 오세 갖꼬는 더 무서진 것맹이데. 원래

는 그러시기는 허지마는."

"저번에 봉숭 돌릴 때 봉게는 신부댁이서 채리기는 아조 딱 부러지게 때깔내

서 걸판지게 채렛능갑드만."

옹구네는, 신부집에서, 신랑상과 상객상에 고였던 음식을 하인 노복들이 끝도

없이 이고 지고 줄을 서서 마을로 들어오던 때를 떠올린다. 입이 벌어지게 긴

행렬이었던 것이다.

"아앗따아... 겁나데에, 참말로오. 그날 대실서 온 음석들 보고 안 놀랜 사램이

있었이까아? 지체 있는 지안은 달르데잉."

대실에서부터 매안으로 이고 지고 온 그 혼례의 큰상물림 음식들은 봉숭 돌린

다고 하여 온 마을에 돌려졌었다. 대소가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깍듯하게 한

상씩 보냈으며, 아랫몰 타성바지들에게까지도 인심스럽게 돌아갔다. 호제, 머슴

들은 심부름에 땀이 났다.

"대실은 곡성서도 더 한챔이나 내리가는 전라남도 어리다등만, 어뜨케 갖고 왔

간디 이렇게 식도 안했이까아?"

"긍게 말이여, 어직도 음석이 따숩그만 그리여."

"아앗따아 그러고, 무신 음석이 그렇게 한 줄로 줄줄이, 정그정서부텀 원뜸 꼭

대기까지 허옇게 서서 들고 가겄게 많당가이."

"그렇게 다 부자고 양반이고 안 그렇게비여?"

"겁나데에. 우리 펭생에 자석들허고 꼬약꼬약 배야지가 터지게 먹고 먹다가 죽

어도 그만큼은 다 못 먹지 싶으데."

음식은 그러고도 얼마만큼이 남았다던가.

그때, 마을에서는, 음식의 양이 많은 것에도 놀랐었지만 그 솜씨의 알뜰하고도

미려 준절한 품격에 더 감탄했었다. 집성촌으로 자작 일촌을 이루고 살아오던

이씨 문중의 마을 매안에도, 서원이 헐리면서 속량이 된 노비가 눌러앉은 것 말

고 또 언제부터인가 타성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근년에도

그 수가 제법 늘어서 십여 호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각성바지로, 거멍굴보

다는 조금 더 마을 바짝 양지 쪽에 모여 살았으나, 문중으로부터 온전한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저, 조상의 뼈가 묻히고 그 혼백이

깃들어 있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와, 남의 문중에 있는 마을에 눈치 보며 얹혀사

는 일이란 어느 모로 살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상

에 대한 무서운 배신이요. 후손에 대해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니, 그러한

것을 감당하고라도 고향땅을 등지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근본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근본을 팽개치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설령 상놈이 아니라 성짜가 있다 해도 이미 선비는 아니요, 천한 불상놈이나 다

름없으며, 그가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면, 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는 금수와 같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덕석말이를 당하지 않고

서야 웬만한 일로 파문에 이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문에

서 당하는 파문은, 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을 탈당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

론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고향을 떠났다 하더라도 대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매안으로 흘러들어온 타성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하여 함구한 채 묵묵히 천역을

감당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가꾸기도 하고, 놉일도 했

으며 원뜸의 이씨 종가와 다른 문중 사람들의 논밭을 얻어 부치기도 하였다. 물

론 길쌈도 빼놓을 수 없는 생업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한 집, 두 집이었으나,

이제 십여 호를 넘으니, 그런대로 그들은 서로 한 덩어리를 이루며 등을 부비었

다. 그들도 강모의 혼례 후에는, 모이기만 하면 대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청암마님댁보다 가세가 훨씬 더 번창허능갑등만, 소문이 그러데."

"이씨들이 손해 나는 혼인은 안허는 집잉게로, 가문이 있는디?"

"거그는 만 석이나 헌다간디?"

"소문만 갖꼬는 잘 모리겄등만, 말로는 만 석이라고도 허고, 한 칠팔천 헌다고

도 허고 말이여."

"하이고, 그러먼 이쪽허고는 대도 못허게 차가 지능 거이그만잉."

"아매, 한 오천 석은 헝갑데."

"아니여, 말로는, 만석꾼이라든디?"

"만 석은 머언... 말이 만석이지 만 석 살림이 어디 그리 쉽간디? 옛말에도 만

석 부자는 나라가 알고, 하늘이 낸당 거이여."

"모올라. 우리들이야 어치케 자세헌 내막을 알 수 있당가?"

"그런디 말이여, 그 오천 석이랑 것도 선대쩍 이얘기지 지금은 말만 그런당갑

데. 가문만 빛났지 실속은 없다고들 그러데."

"차암, 사람덜 겁없네. 어서 가마니들이나 짜드라고오. 오천 석, 만 석이 무신

지내가는 갱아지 이름이등게비."

"그렇기는 하네. 부지런히 새끼 꼬아서 짚세기라도 한 커리 더 삼어야제. 그

양반네들 재산 타령 해 봤자 머엇에다 쓴당가. 내 땅, 내 논도 아닐디 말이여.

계산 잘허먼 누가 노나준대?"

"참말로... 손바닥 반절만헌 논빼미 한 마지기 땅이라도 내 것이라고 이름붙여

보고 죽으먼 얼매나 좋으까... ."

"씨잘 디 없는 소리. 눈 깜빡새라도 손모가지 놓지 말고 어서 일들이나 허드라

고. 없는 사람은 그저 주딩이가 웬수고 손이 보배여."

한동안은 그렇게 아랫몰이 술렁거리었었다. 감탄과 부러움과 한숨이 남모르게

엉기면서 침묵속으로 가라앉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지 않아도 카랑카

랑한 이기채의 기침 소리가 혼행 후에 더 쇳소리를 내며 높아진 것을 들었다.

옹구네가 평순네를 보고 막 무엇이라고 입을 열려는데, 못줄이 위아래로 춤을

춘다. 매달린 색색의 헝겊 꼬리들이 날린다. 엎드렸던 사람들이 못줄 잡은 남정

네를 기웃기웃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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