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참이요오."
논배미 저쪽에서 붙들이가 목청을 돋운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일
어서며, 고개를 앞뒤로 돌려 보기도 하고 어깨를 뒤로 젖혀 보기도 하면서 두렁
쪽으로 나간다. 모두들 반가운 기색이다. 안서방네가, 담살이 붙들이를 데리고
바우네와 더불어 내온 새참 광주리 주변에 하나씩 둘씩 모여 앉은 남정네와 아
낙네들은, 생각난 듯, 배가 출출해옴을 느낀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도,
이렇게 새참 광주리를 보면 한꺼번에 허기가 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새서방님 말이여, 그러다가 대실 새아씨도 인월마님짝 나능 거 아
닝가 모르겄어."
옹구네는 아까 하려다가 미처 못한 말을 논에서 나오며 평순네에게 한다. 그
네는 한 번 하고 싶었던 말을 결코 참는 법이 없었다.
"아이고, 벨 소리를 다 허네, 그래사 쓴당가?"
"누구는 머 그러고 싶어서 그러능가? 아, 저렇게 서방님이 안 볼라고 그러시면
먼 디 어디 있겄능가? 인월마님 정경만 허드라고, 이런 사람보기에도 참 안되얏
등만."
"나 같으먼 도망가 불겄다. 진작에. 사램이 한 펭상을 산다고 한 세상을 그렇
게 살고 만당가? 어디 가서 먼 짓을 못헌다고... ."
"아이고메, 그렁게 양반이제이, 개기는 어디로 가? 우리들허고 어디 같당가?
그림자맹이로 그렇게 살어도 벨 수 없는 일이제, 인월샌님은 서울서 자리잡고
아조 거그서 개밍히여 뿌리 내리싱갑제?"
"하아, 소생도 벌세 셋이나 두셌다는디?"
"그리여이!"
천천히 이야기하며 이랑으로 나와, 두 사람이 새참 자리에 왔을 때 사람들은
벌써 한참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두부를 넣고 끊인 된장 감자국 냄새가 구
수하다. 그새 사발을 비우고 곰방대에 담배가루를 재는 사람도 있다. 붙들이는
술동이 옆에 포개 놓은 흰 사기 대접을 하나하나 내린다. 술동이 위에는 바가지
가 떠 있다. 농주의 새콤한 냄새가 바람에 실린다.
"붙들아, 니가 율촌마님한티 말씀 좀 잘 디리 갖꼬, 술동우도 한 개 더 내오고,
밥바구리도 한 개 더 갖고 오니라."
담배를 재던 떠꺼머리 걱실걱실한 장정이 붙들이를 보고 지나가는 말처럼, 이
런 것은 우스갯고리라는 듯 한 마디 던진다. 아마 그는 생김새로 보아 밥의 양
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붙들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러
그를 본다. 춘복이다. 그라면 씨름으로도 이름난 사람이다.
"사발 밑바닥에 붙은 밥 숟구락 먹고 어디 들일 허겄냐, 허리가 꼬부라져
서. 보나마나 술도, 입술이나 취기다 말티제."
안서방네는 그런 춘복의 말을 못 들은 체한다. 바우네는 등에 업은 아이를 앞
으로 돌려 무릅 위에 앉히고 젖을 물린다.
"천석꾼 만석꾼 부잣댁이서 멋 헐라고 이렇게 밥을 애끼능고."
춘복이는 기어이 할 말을 다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밥을 먹으면서 아무
도 말에 끼어들지 않는다. 밥을 담아내온 대소쿠리도 비고, 술동이도 비었을 때,
안서방네와 붙들이, 바우네는 빈 그릇들을 챙겨 일어섰다.
"욕보시겄소잉."
안서방네가 인사말을 하며 광주리들을 이고는 논배미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난 다음에야,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아이구 이노무 자석아, 너는 왜 그렇게 말을 못 참냐, 못 참기를."
하고 중늙은이가 채 못되어 보이는 공배가 춘복이 주둥이를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하앗따, 머, 그런 말도 못허고 산다요? 입은 뒀다 머에다 쓸라고 말이사 바로
말이지, 새참이라고 어디 애들 장난맹이로 한 숟구락씩 엥게 주면, 그께잇거 머,
한 볼때기 깨물고 말 것도 없는디."
"그래도, 배 곯아서 일 못허든 안형게 그렇게 입바른 소리 자꼬 해쌓지 마라.
그래서 졸 거 하나도 없응게에."
공배는 힘을 주어 한 마디씩 한다.
"멩심히여."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말끝을 누르며 그는 한 마디를 더 거든다. 그러자 옆에
서 옹구네가 나선다. 그네는 나서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낙이다.
"그 전에 청암마님 살림하실 적으는 안 그랬다고요. 그 어른이야 참말로 대처
에 밝으시고 훠언허시지요. 아랫사람 다둑거릴 지 아시고, 천헌 것들 불쌍헌 지
아시고, 그때는 차암 등 따시고 배 불렀는디... ."
옹구네의 음성에는 타령조가 섞여 있다. 청승스럽다.
"지금은 머 굶어 죽능가? 율촌마님이라고 머얼 얼매나 인색허시간디? 우리한
테만 그러싱 거이 아닝게비여. 당신이 입고 잡숫는 것도 그렇게 규모가 짱짱허
고 검소허싱게."
아무래도 공배는, 이렇게 새참 뒤 끝에 둘러앉아 그 댁의 인심 공론이나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말도 말어, 이런 년은, 먹을래도 먹을 거이 없응게 먹지마는, 아 그런 부잣집
이서 무신 마늘이 귀헐 거잉가? 썩어나는 거이 마늘이제잉. 그런디도, 저어번 날
봉게는 마늘 한 쪽을 갖고, 칼로 딱 반 토막을 내능 거이여. 멋 헐라고 그렇고,
암 말도 안허고 넹게다 봤제. 그것을 낮에 양념으로 반절 넣고는 두었다가 저녁
판에 그놈 남은 반절을 양념에 넣드라고오. 징해라."
옹구네는 몸서리를 쳐 보인다.
"옛말도 안 있능갑네. 굳은 땅에 물 괸다고 안허등가, 그렇게 그렇게 큰 살림
을 허시겄제잉."
이번에는 평순네도 끼여들었다. 춘복은 칫, 하고 논배미 쪽에 침을 뱉다니,
"시상도 마않이 달라졌단디, 머이 어뜨케 달러졌능가 휘이 귀겡이나 한 번 댕
게오까아? 속 터진다."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야 좀 봐. 달러지기는 먼 놈의 시상이 달러진다냐? 뒤집어지든 엎어지든 상상
놈의 신세는 벤헐래야 벤헐 거이 있어야제잉? 농사철 당해서 매급시 맘 들뜨지
말고 두렛일 소홀허게 말그라. 잉?"
공배가 끝까지 춘복의 말꼬리를 쫓으며 으름장을 놓는다.
"제엔장헐 놈의 시상. 다 똑같은 사람으로 났는디, 쎄 빠지게 일허는 놈은 죽
어라 일만 허고, 할랑할랑 부채 들고 대청마루에 책상다리 앉었는 양반은 가만
히 앉은 자리에서 눈만 몇 번 깜잭이먼 몇 천 석이니, 먼 놈의 시상이 이렁가아.
생각을 숫제 안해 부러야제. 생각만 조께 허먼 기양 속이 뒤집어징게... ."
"허허어. 춘복아, 너 또 왜 그러냐아... 내동 암 말도 않고 소맹이로 일만 잘허
드니, 무신 바램이 또 너를 헤젓는다냐."
"아, 내가 이 나이를 먹어 갖꼬, 힘 좋겄다 머엇이 아숩다고 논바닥에 처백헤
갖꼬는, 새참 밥 한 그륵 갖꼬 가이내들맹이로 이러고 저러고 허니 속이 좋겄
소? 에린 것 붙들고."
"씨가 다릉게 안 그러냐? 씨가... ."
공배의 그 말에 춘복의 눈꼬리가 위로 찢겨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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