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암담한 일요일
"흥, 애국금자탑?"
강태는 차락 차락 소리를 내며 넘기던 책장 한 끝에 눈을 박고는 비웃음을 날
린다. 음성 끝이 꼬여서 뒤집힌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애국이란 말이야? 쓸개 빠진 놈들."
"뉘 쓸개요?"
침 뱉는 목소리를 받아 강모가 묻는다.
"이 따위 책을 만드는 놈과,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지."
"뭔데 그래?"
"아주, 고직구(고딕)로 제목을 뽑았어요."
이것 봐라, 이것 봐.
내던지듯 강모의 턱밑까지 치켜올려 들이대 준 책의 첫머리에는, 아닌 게 아
니라 시꺼멓고 굵은 글씨로 제목을 삼아
"애국금자탑"
이라 박혀 있고, 이어서 부제로
"총후의 반도 헌금 삼백만원"
이라고 붙어 있었다.
"총후... 라니?"
"후방도 전선이라는 말 아니냐?"
"그래, 조선 반도에서 소위 애국 헌금이 삼백만 원이나 모금되었다는거요? 이
런 거금이... ?"
"읽어 봐라. 좀."
북지사변이 발발한 이래 군을 위시하야 각방면에 쇄도하는 국방헌금 휼병위문
금은 막대한 금액에 달하고 잇는데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시월말까지 근 삼개월
에 전반도로부터 모인 국방헌금은 조선군과 용산사단에 이백삼십사만육천원 이
외에 총독부를 통하야 한 헌금을 합하면 약 이백오십사만육천원에 달하야 기타
애국비행기 시사기와 다수의 고사기관총 제군사기재도 헌납이 되어 잇다.
"어이구, 대단하네."
"그게 말이 좋아 헌금이지 순전히 조선 사람들 기름을 짜 갈취한 것 아니겠
냐?"
그러니까, 북지사변이 발발한 이래, 군을 위시하여 각 방면에 쇄도하는 국방헌
금과 휼병위문금이, 지난 삼 개월 만에 조선 반도로부터 용산사단으로 모인 것
이 물경 이백삼십사만 육천원, 그리고 총독부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 이십여 만
원, 도합 이백오십사만 육천원이라는 거지?"
"거기다가 애국비행기 열넉 대, 고사 기관총 다수, 외에도 여러 가지 군사 기
재가 헌납되었다는 말을 열심히 써 놨잖어."
"고사 기관총이 뭡니까?"
"항공기 쏘는 데 쓰이는 기관총이지."
강태는 천장을 향하여 조준하는 자세로 앙각을 지어 보인다.
"더 읽어 봐. 점점 더 가관이니까."
또 휼병위문금도 조선군사후원연맹에 약 오십만육천원, 조선군병사단에 약 이
십삼만이천원, 합계 칠십삼만팔천원으로, 이들 반도인의 적성을 말하는 정재는
실로 삼백이십팔만사천원에 달하고 잇다. 또 이밖에 현금 이외에 위문대가 십일
만사천개 기타 위문품도 삼십만정에 달하엿다고 한다.
"도무지 얼른 계산이 안되네."
읽다 말고 어이가 없어, 강모는 실소를 했다.
"어디 한 번 적어 볼까? 이 엄청난 어릿광대짓 놀음비용을."
강태가 백로지 한 장을 뒤집는다.
조선군사후원연맹 약 50만 6천 원
조선군병사단 약 23만 2천 원
합계 약 73만 8천 원
"이들 반도인의 참된 정성을 말하는 깨끗한 재물이 실로 삼백이십팔만 사천
원에 달하고 있다? 아까 것까지 합해서 말이지?"
"또 있잖아요? 현금 이외에."
위문대 11만 4천 개
기타 위문품 30만 점
"그것뿐이냐? 경기도 수원군에서도 양성관이란 작자가 주도해서 비행기값 걷
는 데 앞장을 서 가지고, 볼 만한가 보더라."
애국기 '수원호'
경기도 수원군에서는 양성관 외 삼명의 발기에 의하야 애국기 '수원호'의 헌
납운동을 이르키고 잇는데 거 구월 이십일일의 발기인회 석상에서 일만사천원의
헌금이 모힌 이래 예정액이든 사만칠천원 넘기엇슴으로 허군수가 대표하야 일전
군사령부를 방문, 육군기 일기의 헌금수속을 발벗다. 더욱 칠천원의 잔여기금으
로 다시 해군기를 헌남코저 운동을 이르키고 잇다.
"굉장하군, 굉장해."
"이건, 자진 열성파들 작태지. 오죽했으면 비행기 한 대 값 예정이던 사만 칠
천 원을 휙 초과해서 칠천 원이나 더 걷혀 버렸을까. 기가 막힐 일이지. 정말 기
가 막힐 일이야. 과잉충성에 날넘을 놈들."
"그 칠천 원으로는, 다시 해군기를 헌납코저 모금 운동을 일으키는 기금으로
삼겠다는데?"
"쥐 같은 놈들."
"아직도 끝이 안 났어. 헌금 이야기는 더 있는데요?"
강태가 벌떡 일어선다.
"너 혼자 읽어라. 나는 간다."
"아니, 왜? 더 있다 가지요."
엉거주춤 따라서는 강모를 남겨 두고, 강태는 언제나처럼 칼로 자르듯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강태는 강모한테 놀러 왔다가
도 갈 때는 느닷없을 만큼 순식간에 사라진다. 강모는 항상 그런 강태의 모습에
무춤해서 망연해지곤 하였다. 강모는 무렴을 지우고자 아까왔던 책을 다시 펼
친다.
경기도서만 백만원
사변 발발 이래 경기도와 관내의 부군 경찰서를 통하야 도민으로부터 헌납된
애국기관총, 방공기재비와 황군 위문금은 합계 백사만일천원에 달하엿다.
온 나라 조선 강토가 열성적인 애국심에 불타 오직 일본을 위한 헌금에 몸 바
치고 있는 것 같은 글이었다. 그것은 드디어 한 여학생의 편지를 정점으로 애절
하게 북받쳤다.
장병을 울닌 여학생의 편지
일지사변과 반도의 전성기
얼마 전에 피로 물드린 일장기를 진정하야 만인을 감동식힌 강계공립보통학교
에 또 총후의 미담. 어린 정성의 결정인 마흔일곱 장의 센닌바리를 앞에 노코
헌병 분대장을 위시하야 감격의 눈물을 흘니게 한 일이 잇다. 그 모든 사정은,
교장에게 보낸 다음의 의뢰문에 의하야 알 수 잇다.
교장 선생님.
장절하다고 할는지, 용맹하다 할까요, 포악무도한 지나 병정과 싸우는 무적 황
군 용사들의 용감한 전투를 선생님에게서, 신문에서, 라듸오에서 듯고, 우리들은
황군 병정들에 대한 보은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업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
본에 난 것을 마음으로 깁버하며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갓치 아모러한 걱
정 없이 공부할 수 잇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 머리가 숙으러집니다. 사변 이래,
전 반도에서도 많은 센닌바리를 보내엿습니다. 누구이든지 모다 옷는 얼골에도
비장한 결심이 보이엿습니다. 그래 센님바리를 보낼 때마다 우리들도 무엇을 하
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불갓치 이러낫듯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녀자이고, 보
통학생입니다. 우리들도 할 수 잇는 일이 없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하야 보앗습
니다만 조흔 생각이 나지 안엇습니다. 그러하든 중, 어느 때 선생님께 어느 학교
생도들이 매일 아침 일즉 니러나, 신사에 가서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도한다는
말삼을 드럿습니다. 그래 우리들은, 그러한 것이면 우리들도 할 수 잇다고 생각
하고 그 잇흔날 아침부터 신사에 보여 황군의 무운장구와 일본 국민으로 난 감
사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지성껏 신사 소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엿습니다. 그리
하는 중 싸흠은 점점 더 커져서 병정들의 고난은 일층 더하야, 저 황군의 눈물
겨운 전투 상황과, 어린 보통학교 생도들의 열성을 매일갓치 선생님에게서 듯고
신문에서 보앗습니다. 그리하야 우리는, 신사참배만으로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
고, 자치회 때, 우리들이 일하야 번 돈으로 센닌바리와 위문주머니를 만들어 보
내자고 약속하엿습니다. 그 말을 선생님께 엿주었드니
'참 조흔 일이니 최후까지 그와 갓흔 성심으로 하야 봅시다.'
하시고 대단 깁버하시면서 여러 가지로 격려하야 주시엿습니다. 그래 우리들
의 결심은 점점 더 강하야졌습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 교실의 한 모퉁이에는 삐
루 병과 사이다 빈 병이 하나둘 모여지기 시작하엿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
로 많은 돈이 모여지지 않엇습니다. 그리하야 우리는 어느 월요일 날 틈을 리용
하야 모다 각각 호미를 갖고 산으로 갓습니다. 산에 가서 도라지를 캐엿습니다.
그때 날은 퍽으나 더웠습니다. 모도 다 땀을 흘리며 열심으로 각각 자긔 것을
모으니 겨우 한 바게쓰 가량 되엿습니다. 하로에 모은 것이 한 바겟쓰나 되니
다 깃거워하며 학교로 도로가 손과 발을 깨끗하게 싯첫습니다. 잇흔날은 그것을
팔러 나갓습니다. 대동병원으로 가니, 고맙게도, 십 전 어치 되는 것을 일 원이
나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깁버하면서 학교로 달녀갓습니다. 그리하여 그 돈을 선
생님에게 맛기고 그 다음에 또 며칠 동안, 집집이 도라다니며 리유를 말하고는,
헌 잡지, 신문, 빈 병 등을 어덧습니다. 오후에 나갓든 터이라 밤이 되어서야 도
라왔읍니다. 우리의 손에는 빈 병이, 세 개 네 개씩 들리워졌읍니다. 그리고 신
문지를 판 돈이 사 원이 넘게 되니 우리는 너무도 조하서 선생님을 돌너싸고 깁
버 뛰엿읍니다. 이러케 모흔 돈이 오 원이 넘는지라
'인제 한 사람이 일 매식의 센닌바리도 될 수 있소, 침으로 수고들 하엿소.'
이러케 선생님이 말씀하셧슬 때는 참으로 여간 깁부지 안었음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센닌바리를 시작하여 하로 밧비 우리 용사들에게 보내려고 정터로, 또는
여러 가정으로 도라다니며 참마음이 싸힌 한 바눌, 한 바눌을 뀌여매 바쳤읍니
다.
황국신민의 서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 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강모는 보던 책장을 덮었다. 탁, 소리가 나게 덮은 책을 방 구석으로 던져 버
리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미끄러지듯 드러누웠다. 오른팔로 머리를 받친 채
물끄러미 장지문 쪽을 바라본다. 아자살창에 투명한 햇살이 밀려와 있었다. 창호
지가 하얗게 눈이 부시다. 며칠 전, 하숙의 부인이 문짝을 떼어 내다가 물을 발
라 벗겨내고 새로 바르더니, 아직도 방안에는 갓 바른 풀냄새가 은근하게 떠 있
다. 강모는 손가락으로 창호지를 퉁겨 본다. 탱탱하게 탄력 있는 문종이에서 둥
둥 소리가 울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서글픈 여
운이 남는다. ... 우울한 시대, 우울한 인생. 강모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린
다. 낮은 구름에 비를 머금은 것처첨 축축하고 무겁게 강모에게도 덮여오는 것
을 느낀다. 바깥은 쾌청한 날씨 같은데, 그는 발끝부터 적시워 오는 구름의 습기
때문에 전신이 후줄근해지고 있었다. 베개를 하고 있는 팔도, 물 먹은 솜같이 무
겁다. 도무지 자기의 한 몸이 천 근 같다. 그러다가도 이 한 몸, 흔적도 없이 형
체도 없이 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흡사 안개나 연기처럼. 어쩌면, 얼었던 산 비
탈의 황토흙이 해토가 되면서 버슬버슬 부스러지며 무너져내리듯, 몸뚱이가 그
렇게 흐무러지는 것도 같다. 강모는 천장을 바라본다. 그의 눈은 둥그렇게 쌍꺼
풀이 졌으면서 큰 편이다. 크고 둥근 그 눈에는, 무엇을 경계하는 빛이 없었고,
오히려 유순하면서도 불안스러운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몽상적이었다.
그 물기에 젖은 몽상의 그늘에는, 남성적인 어떤 힘보다도 따스하고 서글픈 친
화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숙의 부인도 늘
"우리 도련님."
이라고 부르며 강모를 어여뻐하였다. 이제 열여섯 살, 고등보통학교 삼학년이
니 결코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강모의 전신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그렇게 아직도 어여쁜 '도련님'을 못 벗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 비하여 입술은
가늘고 붉었다. 얼핏 이기채를 닮은 듯하였지만, 이기채 쪽이 날카로운 기상을
견고하게 품고 있다면, 강모의 강면하고 가느다란 입술은 고와 보이면서도 내성
적인 고집을 단단히 물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흰 얼굴에 큰 눈이 보여 주는
허가 있다면, 그것을 입술의 빛깔과 선이 막아 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 입술은,
한 번 다물리면 그뿐일 것 같았다. 좀체로 헤프게 열리지 않고, 여간해서는 속에
있는 심정을 잘 쏟아놓지도 않을 듯싶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얼른 보기에는 무
척 곱고 다감한 인상이었지만 어쩐지 냉정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강모는 창
호에 어리는 햇살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암
담함이 햇살로 하여 더욱 짓눌리어 온다. 문득 그는, 벽에 걸어 놓은 만돌린과
기타에 생각이 미쳤다. 아아, 그렇지. 강모는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선다. 그리고
벽에 걸린 기타를 내려 들고, 구석 자리에 기대어 앉았다. 몸통을 끌어안은 그의
손 끝에, 부드럽고 탄력 있는 기타의 줄이 닿자, 몸의 긴장과 그 탄력이 서로 알
맞게 솜을 맞추며,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아진다. 이상하게 허전한 가슴에 안기
는 양감이 있어서인가. 강모는 숨을 들이쉰다. 두웅. 튕겨져 나오는 음률이, 창호
지를 두드렸을 때 울리던 음향처럼 낮은 공명을 일으킨다. 공명은 방안이 아니
라 몸 속으로 울려들었다. 강모는 줄을 고르며 속으로 읊조린다. ...글루미 썬데
이... 마당에서는 누가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 모양인지 신발 끄는 소리들이 들리
며, 배웅하는 인사말이 오간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1권 (20) (0) | 2023.11.18 |
---|---|
혼불 1권 (19) (0) | 2023.11.17 |
혼불 1권 (17) (0) | 2023.11.15 |
혼불 1권 (16) (0) | 2023.11.14 |
혼불 1권 (15) (0) | 2023.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