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분복대로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게 아니야. 옛말에도 있듯이, 무는 개를 돌아보고, 우는
애기 젖 준다고, 사람 스스로가 자기 일을 경영해야지 어디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누워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는가?"
"감을 욕심내지 않으면 마음이 초조헐 것도 없지요."
"허허어, 이 사람 말허는 것 좀 보아. 동복의 삼형제가 각각이 다 다르니 무슨
속을 터놓고 어디다 무슨 말을 헐 수가 있어? 꿍꿍 앓드래도 나 혼자만 답답헐
밖에."
기응은 묵묵히 일손을 놀리고 기표는 뒷짐을 진 채로 서성거렸다.
"밖에서 이러면 안에서나 기민해야지. 이건 안팎이 쌍으로 똑같은 성품이니."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거나, 마당에서 덕석을 말아올리는 기응의 뒷 등을
바라보며 기표는 혀를 찼다.
'안'이란 오류골댁을 이름이다. 오류골댁 또한 기응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들을, 별 큰 소리도 없이 묵묵히 할 따름이었으므로 기표의 눈에는 그렇
게 비쳤을 것이다. 논바닥에 엎드린 햇빛에서 놋쇠 익는 냄새가 난다. 탱그르르
소리가 울릴 것도 같다. 그것은 흡사 장구의 울음통에 터질 듯이 차 있는 소리
와도 같았다.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궁글채, 열채, 그 장구채로 바람처럼 건드리
기만 하여도 저절로 울리는 오묘한 음향을, 지금 익을 대로 익어서 벌어지고 있
는 뙤약볕 속에서 듣는 것이다. 장구통이야 오동나모로 만든 것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햇살 좋은 양지 쪽에서 자란 홍송을 따르랴. 몸이 무르고
결이 고와 비단 같은 그 소나무는 무겁고도 부드럽다. 산속에서 뿌리 뻗고 자랄
적에는 어디 무슨 소리 같은 것을 가두어 둘 만한 우묵한 곳도 없는 것이, 일단
장구로 몸을 바꾸기만 하면 어찌 그리 신통한지. 뙤약볕은 장구통이다. 기응은
장구채를 든다. 손끝에서인가, 장구통에서인가, 아니면 햇빛 속에선가, 그도 아니
면 기응의 마음이 차올라 울리는 것인가. 농인은 사월의 달디단 공기를 두드리
며 홑가락 겹가락이 경쾌하게 터져 나온다.
정저긍자그
정저긍자그
징그징그 정저궁자그 정저궁자그
궁자궁자그 구궁구궁 궁자궁자그
순간, 기응이 잡고 있는 못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저쪽에서 힘을 주는 모양
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못줄에 매달린 색색의 헝
겊들이 춤을 추듯이 흔들리며 팔락거린다.
정저긍자그
징그징그 정저궁자그 정저궁자그
사람들도 이제 쉴 만큼 쉬었는지, 괴춤을 추기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서서 논
으로 걸어 들어온다. 물 소리가 철벙철벙 난다. 마을의 집집들이 비어 있다. 그
적막한 대사립문을 녹음이 그늘을 드리워 닫아 준다. 기응은, 갈아 놓은 면화와
수수, 동부, 녹두, 참깨의 모들도 이번 비에 흥건히 물을 먹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강실이는, 집 뒤의 뽕밭에 여린 잎을 따러 나갔을 것이다. 한 잠 자고 일어
나는 누에는 하루에도 열 두 밥을 먹으니, 밤낮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먹여야
한다.
"뽕을 딸 때는,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따지 말고, 뒷그루를 살펴 줘야
한다. 뒷날에 움이 새로 돋을 자리를 다치면 안되지. 말라버린 가지는 찍어 주
고, 새 순에서 핀 햇잎을 골라, 뒤로 젖혀서 따라. 뽕잎 하나라도 그것이 다 목
숨 있는 것이니 함부로 상허게 허지 마라."
봄에 짠 봄나이 필 무명을 빨래하여 볕에 바래던 오류골댁은 뒤꼍으로 돌아가
는 강실이에게 그렇게 일렀을 것이다. 기응은 못줄을 옮겨 꽂으며, 논의 도랑을
치고 물길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붕에 비 새는 곳은 미리 개와를 해 두어야,
곧 닥쳐올 장마철의 음우도 막아 낼 것인데, 꽃 피고 새 닢 나면 벌통에 분봉한
벌들도, 새 통에 옮겨 주어야 한다. 기응의 귀에는 꿀벌들의 닝닝거리는 소리가
햇발에 섞여 감미롭게 들린다. 여왕벌 하나를 모시고, 있는 힘을 다하여 꿀을 물
어 나르며 자기의 직분과 의리를 다하는 평화가 그대로 전해진다. 기응은 고개
를 들어 바람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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