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설진영은 창씨개명을 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 자신은 대성통곡을
하며 큰 돌을 끌어안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가 조상에게 사죄하며
비장하게 죽어간 이야기는 바람같이 빠르게 퍼져 매안에까지 날아왔던 것이다.
청암부인은 가슴에 맷돌짝을 얹은 것처럼 심신이 무거워 일어서지도 못한다. 이
것이 어떻게 지켜 내려온 종가냐. 어떻게 지켜 내려온... .
"이제는 도리가 없어요. 굳이 미우라니 야마구찌니 하지않고도 이본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씨의 근본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김촌이라 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 왜놈들이 언제 성씨나 제대로 있었습니까? 겨우 명치유신
이후에야 귀족 아닌 서민들도 성을 가지게 된 거지요. 그래서 밭 가운데 산다고
전중 다나까, 대나무 아래 산다고 죽하 다께시다, 이러고들 성이랍시고 쓰는 작
자들인데, 이런 무지한 사람들하고 어떻게 맞서 봅니까? 화살이 어떻게 바위를
뚫을 수 있는가요? 설령 바위를 뚫었다 한들, 뭉개져 버린 그 화살촉을 무엇에
다 씁니까? 곧이 곧대로 일편단심은 지켰을망정 본질을 망치고서야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태산 같은 바위가 앞에 있으면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뒷날을 보존하기 위한 합리올시다."
기표의 말소리가 심지가 박혀 있다. 그 질긴 음성이 청암부인의 귀에 꺼끄럽
게 들린다. 부인은 세우고 앉은 무릎을 내리고, 몸을 돌려 마당을 내려본다. 마
당에는 광목필을 바래는 듯한 햇빛이 눈에 부렸다. 마당 귀퉁이의 앵두나무에
나비가 앉으려다 말고 그냥 지나쳐 날아간다. 흰나비 날개 아래, 앵두가 수줍은
듯 새빨갛게 익어 햇볕에 눈이 부시다. 다닥다닥 열린 붉은 앵두를 한 번 올려
다보고 사발 접시에 물 한 모금 찍어 여린 소리로 구욱 구구 꾸꾸거리는 영계들
이, 누렁이가 다가서자 가냘픈 다리를 짝 벌리며 달아난다. 청암부인은 기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킨다. 이제 그만 이야기
하고 싶다는 표시이다. 이기채와 기표는 서로 잠시 눈짓을 하고 일어선다. 그들
이 방에서 나간 다음, 청암부인은 무거운 이마에 주먹을 받치고 무심한 마당을
내려다본다.
... 순탄치 못한 집안이로다... .
그네는 깊은 한숨을 쉬며, 문득 그렇게도 처덕이 없으셨던 시부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단순히 그 어른의 박복이었던가, 아니면 가문이 그뿐이라서 그리
하였던가.
(인력이 지극해도 천재를 면하기는 어려운 일이런가.)
반남 박씨부인과 재취의 청주 한씨부인을 여의고 난 시부는 몇 년 후, 마지못
하여 이끌리듯 삼취를 맞아들였다. 남양홍문의 처자였다. 그다지 넉넉지 못한 집
안의 처자로 빈한하게 살았지만, 용모와 자색은 앞서의 두 부인보다도 오히려
훨씬 두드러진 편이었다. 그러나 시부는 명색이 초례청에서 신부와 마주서 있다
가, 느닷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사모의 오른쪽 뿔을 쑥 잡아 뽑아 버렸다.
"아니, 저런... ."
혼례 때 신랑이 사모의 뿔을 뽑으면, 신부는 그만 소실로 격하되어 버리기 때
문이다. 안 그래도 삼취는 번듯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관례인데, 뭇사람이
둘러서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처럼 부러지게 표를 내고 마니, 내리뜬 눈으로 그
거동을 훔쳐본 신부의 낯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벌겋게 달아올라, 나중에는 흙
빛이 되었다. 사람이 음양간에 한 번 만나 작배하면, 전생의 인연이 지중하니 백
년을 같이 누려 해로하고, 슬하에 올바른 자식을 많이 두어 후생을 같이 누려
해로하고, 슬하에 올바른 자식을 많이 두어 후생을 기약하는 것이 복록이겠지만,
그리하지 못하고 상처를 하는 경우 재취를 맞이하게 되면, 두 번재 아내인 이
부인은 물론 적처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재취마저 죽어서 다시 혼인해야 할
때, 세 번째 맞이하는 삼취의 여인은 가문이나 지체와 상관없이 무조건 소실로
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자연 삼취 소생은 엄연한 부모 밑에 태어났어
도 서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삼취 부인은 죽어 제사를 지낼 때, 위패도 없이,
제상조차 한 단 낮게 차려 차등을 두었다. 본처가 있는데 첩으로 들어앉는 것도
아니며, 뒷골방에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도둑장가를 드는 것도 아니요, 버젓이
육례를 갖추어 혼인하는 사이건만, 그 어인 까닭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표 안 내더라도 다 알고 있는 것을, 무엇 하러 사람 마음에 앙앙지심
이 돋아나게 하는고."
문장이 아차, 하는 투로 말했다.
"자학인가... ."
곁에서 말을 받은 이도 무거운 고개를 혼자 보이지 않게 저었다. 다만, 순서,
나중에 만난 것뿐인데. 그럴 줄 알면서도 시집오는 여인을 깔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할 만한 사연이 처녀의 집안에는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은 겉돌았다. 우선은 겉모습만 보더라도 홍씨부인은 시부보다 여
남은 살이나 아래인데다가,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도톰하여 도화빛이 돌고 있어
서, 그 두사람은 내외간이라기보다 숙질간처럼 보였다. 그만큼 시부는 몸도 마음
도 이미 곰삭어 시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어느 곁엔지 황토빛이 돋으
면서 검게 졸아들어 냉혹해 보이고, 거기다가 좀체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말도
없었다. 무엇에 흥미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참 요상도 허지. 꼭 허깨비한테 씌인 사람맹이네잉."
"날이 갈수록 더 허시능 거이 예삿일 아니여."
"왜 그러까아... . 아니, 남정네들은 지 지집이 죽으먼 몰래 뒷간에 가서 혼자
웃는다는디, 또 얻으먼 될껄. 한 번 가신 마나님들을 마냥 그렇게 못 잊혀라 허
게잉. 양반이라서 그러까?"
"하이고오, 지집이야 양반들이 더 빠치제에. 양반 치고 소실 없는 양반이 어딨
당가? 소실허고 취처는 다르다지만."
"그런디 왜 그러까아? 삼취댁 마님은 돌아보도 않는다대?"
"돌아보도 않능 거이 다 머이여어? 아 초례청으로서 그렇게 사모 뿔따구를 기
양 모래밭으 무시 뽑디끼, 쑥 뽑아 부러 갖꼬, 정 없단 표시를 딱 해 부렀는디
머."
"긍게로 왜 그랬으까."
"아앗따아. 그렇게 저엉 알고 자프먼 가서 직접 물어 바아. 머엇이 까깝해서
그리싸아? 남녀가 유별헌디 넘으 집 일에, 왜."
"아, 누가 까깝허디야? 삼취댁 마님도 미인 박복이라, 청춘에 인생이 아까웅게
그러제에. 원 이런 상녀르 인생만도 못헝 것 같등만."
"아이고매, 오지랍이 삼천리네. 아깝기는 머어이 아깝당가? 암만 삼취라고도
해도 어엿헌 가문으 종부로 시집와아, 또 자기 한 몸 호강은 냅두고라도 친정
살림끄장 어깨 피게 해 주어, 그만허먼 헐 노릇 다 헝거이제 머."
"친정으다 땅을 많이 줬드람서? 데꼬 올 직에."
"얼매나 줬디야?"
"얼매먼 멋 헐라고? 깨깟이 때 벳기고 사취로 갈랑가?"
"아이고매 잡상맞어라. 예펜네. 지랄허고 자빠졌네."
"니께잇 것은 상년이라 받아 주도 않는단다. 그나저나 종갓댁 마님이 먼 멋 허
고 친정에다 퍼다 주먼 멋 헐 것이냐. 이녁은 청상 과부 한가지로, 밤마둥 시름
만 서방님 대신 씰어안고 잘 거인디."
"그 댁으 친정집도 양반은 양반인갑등만. 목구녁이 포도청이라 딸 팔어묵은 것
이제 머. 숫처녀로 시집온 양반 체면에 소실이라고 호가나 부렀으니. 양심도 생
길 만히여."
"사실, 정 떨어질 일은 일이제."
"아예 첨부터 소실 첩이라먼 또 그렁갑다 허지마는."
"양반이 망해서 먹을 거이 없으먼, 돈 많은 상놈의 집이서 메누리를 본다대.
논밭 뙈기나 받고, 돈냥이나 받고 해서 데꼬 온디야. 양반 혼사다, 이거지. 상놈
은 양반 사돈을 얻응게로 웬 떡이냐 허고잉. 그런디 이번 일은 꺼꾸롱가? 아니,
머, 꼭 그것도 아니고."
거멍굴의 우물가에는, 거들치마, 두루치를 입은 아낙들은 물을 긷거나, 나물을
다듬고 보리쌀을 씻으면서, 모여앉으면 원뜸의 종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자고
새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분분하였으니 그들은 수군거리다가 말고 힐끗 원뜸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하였다. 얼핏 보면 마치 눈을 흘기는 것 같기도 하였다.
"두고 바라. 저러다가 인자 무신 일이 나고 말 거이다."
"호랭이 물어갈 노무 예펜네, 누가 들을라."
"들을라먼 들으라제. 사실이 그렁 것을 어쩔 거이여? 새각시 얼굴이 아깝제에,
얼굴이, 그만헌 인물도 흔찮허겄등마는."
"얼굴만 아깝냐? 청춘이 더 아깝제잉. 한 번 가먼 다시는 못 오는 것인디 무정
세월이 어디로 가능고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1권 (34) (0) | 2023.12.06 |
---|---|
혼불 1권 (33) (0) | 2023.12.05 |
혼불 1권 (31) (0) | 2023.12.02 |
혼불 1권 (30) (0) | 2023.12.01 |
혼불 1권 (29) (0) | 2023.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