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흔들리는 바람
"창씨라니, 도채체 그게 무슨 말인가? 대관절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게야?"
청암부인의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방안에 앉은 기채와 기표는
책상다리를 한 발바닥을 쓸고만 있다. 이기채는 흰 버선발이고, 기표는 엷은 회
색 양말을 신었다. 기표는 그 차림까지도 양복이다. 하기야 문중에서 맨 먼저 상
투를 자른 사람이 기표였고 보면, 그의 저고리가 단추가 여섯 개씩이나 달린 양
복으로 바뀌고, 신발이 숭숭 뚫린 구멍에 검정 끈을 이리저리 꿰어 잡아당겨서
묶어 매는 구두로 바뀐 것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이제 오히려 기표
의 그런 모습은 당당하기까지 하고, 그 나름대로 차림이 몸에 익어, 보는 사람의
눈에도 익숙해져 버린 터였다. 이기채는 그런 기표와 달리, 아직도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다니지만 내심 기표를 나무라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과 기표의 처지
가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중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상투를 자르면서,
이제 망건이니 탕건이니 하는 것들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한테나 소중한 물건처
럼 여겨질 정도로 차차 변해가고 있었으나, 이기채는 종가의 종손으로서 그 체
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고집이라기보다는 도리였다.
"일시동인이요, 팔굉일우라고 하니,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주장이지요.
또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기표의 말허리를 부인이 자른다. 그 어조가 너무 강경하여 비스듬히 방바닥을
바라보며 말하던 기표가 눈을 번쩍 치켜든다.
"도대체 사람에게 가장 큰 욕이 무엇인가? 성을 간다는 게 아닌가? 금수도 제
종자 자기 조상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이름 또한 그렇게 불리거늘, 우리가 소를
돼지라고 하고 돼지를 닭이라 부르는 일이 있는가? 하물며 사람이 어찌 조상의
성을 버리고 근본을 바꿀 수 있을꼬. 같은 성씨의 사람들이나 종항간에라도 그
부모의 제사는 따로 모셔 섬기거늘, 보도 듣도 못한 일본 귀신들을 참배하게 하
는 것도 내 우습게 여기었는데, 이제 와서는 창씨를 하라니, 이게 무슨 변괴야...
."
청암부인의 눈매에 푸른 서리가 서린다. 노기가 전신에 팽팽하다.
"성씨도 바꾸고 이름도 일본인같이 다 부른대도, 호적에 본관은 그대로 남겨
둔다 합니다."
기표가 말한다.
"그게 무슨 조선 사람 근본을 챙겨 줄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데. 문제가
생겼을 때 조선인, 왜인을 구별하기 위해서라던데?"
기채가 버선발 쓸던 손으로 수염을 쓸며 기표를 보고 대꾸한다. 기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씨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이름인들 제대로 간수하며, 쓰지도 못할 호적이
문서 귀퉁이에 엎어져 있다 한들 어찌 대수가 있겠는가. 축대에 작은 쥐구멍 하
나 뚫리면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라. 성씨를 잃어 버린 다음에 무
엇으로 무엇을 지킨단 말인고."
청암부인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쉰다. 창씨개명의 법령은 이미
소화 13년, 서력으로 1939년 11월, 조선 민사령이 개정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듬해인 올 이월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중이다. 남차량 총독은 도지사,
군수, 면장, 동장, 그리고 심지어는 말단의 순사들까지도 동원하여 창시개명을
강행하고 있었다.
"장래가 걱정입니다. 저희들이야 이제 나이 들고, 뭐 별로 이름짜 쓸 일도 없
겠습니다만, 아이들이 걱정 아닙니까? 우선 강모나 강태만 해도 학교에 안 다닐
수 없는 노릇이고, 교육 문제뿐이 아니라 사회적인 진출에도 막대한 지장이 있
을 겝니다. 서류 작성할 일이 한두 번이겠습니까? 그때마다 까탈이 생기고 진도
가 막힐 것이니, 집안에 들어앉아 농사짓고 사서삼경만 어떻게 앞날이 번창허겠
습니까... ."
기표의 말씨는 격을 갖추어 공손하지만 말투에는 이미 결심이 서 있는 것 같
았고, 자기 주장을 쉽사리 굽힐 것 같지 않았다.
"번창... 자기의 근본을 내버리고 금수의 흉내를 내면서 하는 번창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고."
"좌우간에 창씨하지 않은 다음에는, 지금 당장 목숨이 왔다갔다 할만큼 큰 곤
욕을 치를 뿐만 아니라, 앞날에도 커다란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졌
어요."
"세상... 세상... 모두가 세상 탓이니, 참으로 괴이쩍은 세상이로다. 무슨 이런
세상이 있단 말인가."
청암부인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작년 올 들어 눈에
띄게 수척하고 부쩍 늙어 버린 모습이다.
"보절면에 송씨네가 면사무소에 갔다가 순사한테 연행까지 되고, 죽도록 두들
겨 맞았다면서?"
이기채는 기표에게 묻는다.
"그랬다고 합디다."
"창씨 하러 가서 그랬다던데 무슨 연고였던가?"
"그 사람이 장난을 좀 한 모양이에요. 창씨를 한다고, 일본 황실의 성과 이름
을 따서 적당히 와까마스 진이라고 했다고, 능멸한 죄로 유치장에까지 들어갔던
게지요."
청암부인이 허리를 펴며 혀를 끌끌 찬다. 양미간이 깊이 패인다. 이마에 땀이
배어나는 것은 초하의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어디선가는 성을 바꾸는 것은 개나 하는 짓이라고, 그 성짜를 이누노꼬라고
고쳤다가, 호적 계원한테 벼락을 맞고 호통을 당했다는 말도 있드구만."
그런 일뿐이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면장이나 주재소 순사들이 제멋대로 창씨
개명을 하여 실적을 높이느라고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니, 실제로 그 본인은 자기
가 어떻게 창씨개명이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심지어는 소송
중인 사람에게 재판소에서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호출을 하여, 본인은 그게 자기
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궐석하여 버렸으니, 그냥 유죄판결을 받는 일까지도 비
일비재였다.
"곡성의 유건영 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청암부인은 장지문을 열어제치며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에 이마를 맡긴다. 부
인의 이마에는 진땀이 맺혀 있다.
"시절도 사람 속을 아는지... ."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정은 미풍 정도로 시원해질 까닭이 없다. 마당에 깔담살
이 새끼머슴이 꼴망태에 낫을 찔러 메고, 바쁜 걸음을 치며 중문을 나서는 것이
보인다.
"보리밭에 누른 빛도 밤 사이에 났겄구마는."
청암부인은 문득 들에 나가 보고 싶어진다. 불어오는 이 남풍에 맥추를 재촉
하는 듯해서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유건영의 비장한 자결 소문이 가슴을 짓누르
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단호히
"나 건영은 더러운 짐승이 되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노라."
하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창씨개명에 대한 부당함을 낱낱히 밝히
고, 남차랑 총독과 중추원 경학원에 엄중한 항의서를 제출한 직후에 스스로 자
결함으로써, 남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
가 또 다른 소문을 들었다. 전라북도 고창군의 설진영이라는 중산 지주의 이야
기였다. 그는 부농인데다 시류에도 아주 반하지는 않아서 한 해 소작미 이천 석
을 군량으로 총독부에 바친 일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양반의 가문이라하여 끝끝
내 창씨개명만은 하지 않고 버티었다. 물론 인근의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본받아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설시 문중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작인들까지
도 설진영의 영향을 깊이 받으니, 당국에서 볼 때는 이것이 설진영이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인근 부락민 몇 십, 몇 백,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드
디어 당국에서는 설진영의 아들이 다니고 있는 보통학교 교사를 모두 동원하였
다. 교사들은 돌아가며 그의 아들을 위협하고, 소외시키며, 설진영을 학교로 호
출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집이 막무가내로 꺾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창씨를 하지 않는 자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아니오. 신민이 아닌 자가 어떻
게 천황 폐하께서 세우신 학교에 다닐 수가 있겠소? 자격도 권리도 없는 거요.
이 아이를 퇴학시키겠소."
하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의 뒤를 쫓아 교사들이 한 떼거리
로 몰려왔다.
"단순히 이 학교에서만 퇴학을 당하고 마는 것도 아니오. 이제 이 아이는 더
이상 어디로 전학하거나 전학도 할 수 없어요. 물론 일체의 공직에도 나설 수
없게 될 것이요."
"폐인이 된 거나 다름없어요."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1권 (33) (0) | 2023.12.05 |
---|---|
혼불 1권 (32) (0) | 2023.12.04 |
혼불 1권 (30) (0) | 2023.12.01 |
혼불 1권 (29) (0) | 2023.11.30 |
혼불 1권 (28) (0) | 2023.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