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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29)

카지모도 2023. 11. 3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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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동경으로 가야겠소."

강모는 신행 오던 날 밤이 늦어서야 마지못한 듯 건넌방으로 들어와 효원의

맞은편에 다리를 개고 앉더니, 양 무릎에 주먹 쥔 손을 올려 놓고 눈을 약간 내

리뜬 채 말했다. 마치 외어 온 구절을 낭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어 어색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린가. 효원은 마음이 철렁하여 강모를

또바로 바라보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단지, 무슨

동경에 가고 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숨겨진 속뜻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일이오."

강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대실에 가기 전에 할머니께서도 허락을 하셨소."

허락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강조한 뒤에

"얼마가 걸릴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음악을 공부

하러 갈 작정이니까. 지금 이것저것 알아보는 중이니 준비 끝나는 대로, 바로 떠

날 거요. 아마 몇 년 거리겠지만."

하고는 '바로', '몇 년'같은 말에서 머뭇거리면서 한동안 숨을 쉬었다가 잇는

다. 그는 결코 하기 쉬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듣고 있던 효원

은,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친정에서 없는 소식을 기다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캄캄한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 절망은 불길한 예감을 머금고 있었다.

"신부가 가마에서 내릴 때, 시댁 지붕 꼭대기를 보아서는 절대로 아니된다. 그

러니 각별 유념하고 다소곳이 들어가거라."

효원의 어머니 정씨부인이 신행길을 떠나는 여식에게 간곡히 당부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사무쳐 왔다. 그것은 과부가 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물론 정씨부인은

그 뜻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와 같은 언사를 아무리 경

계하는 뜻이라고 할지라도, 새각시가 부정을 탈까 보아 입에 담을 수는 없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효원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그

말의 뜻을 꼭 들어서만 알고 새기겠는가. 또한 굳이 그런 당부가 없었다 하더라

도, 어떤 신부가 감히 우귀일에 시댁의 마당에 똑바로 서서, 구름같이 에워싼 시

댁붙이들 어깨 너머로 그 높은 지붕 꼭대기를 우러러 바라볼 수 있으리오. 그때

후행으로는 효원의 부친 허담과 종조부 허근이 동행하였다. 효원의 일행이 강모

와 더불어 기차에서 내렸을 때, 정거장에는 한필의 나귀와 주렴을 늘이운 가마

가 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댁에서 마중을 보낸 것이다. 가마 곁의 교

군꾼 두 사람은 동저고리에 바지 차림이었는데 머리에는 패랭이를 비딱하게 썼

다. 이미 그들 일행이 정거장에 닿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은 겹겹으로 돌러서서

신부 구경을 나와 있었다. 거멍굴의 매안뿐만 아니라 이웃 아낙들도 두루치 자

락을 거머쥐고 팔짱을 낀 채 입담들을 나누었고, 민상투 바람의 남정네며 타성

들, 문중의 지친 먼 촌들이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서서 기차가 당도하기를 기다

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차가 석탄가루를 날리고 목쉰 소리로 미끄러

져 들어와서는 일행 중에 처음으로 눈에 띈 사람은 허담이었다.

"바깥 사둔 양반잉게비여. 하앗따아, 풍신 좋네에. 저 키 좀 봐."

"그런디, 그 옆에 저 노인 양반은 누구디야? 쉬염도 흐으여니 좋고 아조 점잔

케 생겠그마는."

그것은 허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정거장에 허옇게 나와 선 사람들의 뒷전

에서 옹구네와 평순네도 누구한테 질세라 서로 한 마디씩 하며 고개를 빼문다.

그 틈바구니에 아낙 하나가 어깨를 비집어 넣는다.

"신부는 어딧능교?"

"무신 하님, 짐꾼들만 자꼬 내리쌓네. 하앗따, 기차 하나 사 부렀능게비다. 대

실 사람들 내리고 나먼 기양 텅 비어 불겄다.

"어, 어, 저어그 새서방님 아니여?"

"어디? 어디이?"

"아, 쩌어그... 저."

"참말로오. 학생복을 입어 놔서 못 알아봤그만 그리여 신랑이 왜 사모관대는

안했시까아?"

"머언 기찻속으서끄장 그러고 온당가? 인자 갈아입을 터지."

"저건 누구대? 저 각시가 신부여? 저 노랑 저구리 뿔겅 치매가?"

"아이고매에... ."

한 아낙이 주저앉을 듯이 호들갑스럽게 탄식한다. 때마침 일행은 그 아낙의

앞을 지나가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짜 옳이여... ."

"빌어묵을 놈의 예펜네. 지랄도. 방정을 떨고 자빠졌네 시방."

"아니, 무신 신부가 저렇게 크다냐아?"

"커서 나 거 머이여. 기왕이먼 큰 거이 좋제."

"아이고매. 저래 갖꼬. 어디 신랑이 신부를 각시라고 보듬아 줄 수나 있겄능

가? 몸통이 신랑 두 배는 되겄네이."

"호랭이 물어갈 노무 주둥팽이, 신부가 듣겄다."

옆의 사람이 말한 사람을 윽박지르는 모양이었으나, 효원은 그 말들을 똑똑히

듣고 말았던 것이다.

"세신랑이 엥간치 이뻐야 말이지. 남자 중에도 맵시 나고 이쁘게 생긴 남잔디,

신부는 기양 몇째 누님맹이네."

"하이간에 살집 한 번 좋그만 그리여."

"달뎅이같이 훠언헌디. 머엇이 어쩐다고들 그래싼당가아."

"근디 달뎅이가 너무 무거서 동산에 떠오르다가 가라앉겄는디?"

효원은 목소리도 낯설고 말투도 귀설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하는 말을 그대

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다. 들리지 말라고 소리를 죽여가며 하는 말이라

서 더욱 잘 들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디 성깔은 아조 매섭겄어."

"관상이 대단한 얼굴이여. 저것 좀 보아."

"대가 세겄구만."

"대실서 와서 대가 찼이까?"

"저래 갖꼬 새서방님허고 궁합이 맞으까? 당최 어째 내 눈에... ."

"키익, 속궁합 속이사 누가 알겄어? 들으가 본 사램이나 알 일이제잉. 앙 그리

여?"

"떽끼, 이런 손."

거멍굴의 남정네들은 뒷전에서 따라가며 킥킥거린다. 효원은 가마에 올라앉으

며 비로소, 이곳이 저 나서 살던 곳 대실이 아닌 것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동여

맨 가슴의 어두운 곳에서 무거운 피가 둑근둑근 뛰는 것을 느꼈다. 시댁의 마당

에 내렸을 때, 가마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디딘 효원은 무슨 오기에 치받친 사람

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둘러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 모습은 비장해 보이

기조차 하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효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

다. 그리고 짓눌리는 듯한 어개를 비팅겨 올렸다. 어쩌면 어깨에서 나뭇가지 무

러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처럼 힘이 겨웠었다. 그래서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을

비키며 턱을 세우고 눈을 높이 떴다. 그때, 효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시댁의 검

은 지붕 용마루였다. 용마루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았다. 용마루의 눈과 효

원의 눈이 순간 서로 부딪치는가 싶었다. 아찔했다. 그러더니 효원의 다리에 쥐

라도 난 것처럼 후르르 떨리며 힘이 빠졌다. 하님의 그네를 에워싸듯 부축하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국수 장국에 수정과와 화채가 놓인 입맷

상이 방으로 들어왔으나, 효원은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손가락조차도 남의 것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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