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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33)

카지모도 2023. 12. 5.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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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혀까지 찼다. 그만큼 이미 시부와 흥씨부인의 일은 비밀도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각각 조금도 자기를 감추지 않은 채 성질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시부는 날이 갈수록 집안 일이나 흥씨부인에 대하여 점점 더 무심해지고, 때로

는 무심을 지나쳐 이상한 증오의 심정을 품기도 하였다. 그는 차갑고 음산한 사

람으로 변해갔다. 물론 한 해 농사 소작미가 들고 나는 것이나 집안 살림, 그리

고 종토 같은 것에 마음을 둘 리가 없었다. 재취 한씨부인 생전에도 이미 절반

이상이나 축이 났던 가산은, 부인의 사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줄어들기만 하

였다. 관리하는 사람이 정신을 모으지 않으니,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 나가는 것

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살림은 기울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삼취 홍씨부인이 들

어오고 나서는 종가가 몰락해가는 모습이 누구의 눈에라도 금방 띄게 되었다.

집안의 주인인 시부가 가솔을 돌아보지 않는데 홍씨부인이라고 무슨 정이 있어

알뜰하고 살뜰하겠는가. 그네는 싸늘한 얼굴에 새침하고 냉랭한 비웃음을 머금

은 채 치맛자락을 걷어쥐고 깎은 듯이 앉아 있었다. 남노여비는 두고 있으되, 그

들도 주인 양주의 그러한 기미를 눈치채고 자기 앞길 가리기에 오히려 더 마

음이 바빴다. 그러니 걸레질 제대로 살이 오를 리가 없었다. 여름철에 꼴이며 겨

울철에 여물죽을 때맞추어 먹이지 않는 탓이었다. 안되는 집은 그러는 것인지,

제 발로 돌아다니며 흙을 파고 먹이를 쪼는 병아리들조차도 픽 하면 죽어 버렸

다. 수챗구멍이고 구정물통이고, 죽은 병아리가 떠 있기 일쑤였다.

"예에이, 빌어 처묵을 노무 삥아리새끼."

구정물통에서 건져낸 병아리의 젖은 날개죽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구정물도 더

러웠지만, 왠지 애처롭게 빠져 죽은 병아리에서 불길한 재수를 예감하였던지, 상

머슴이 욕을 내뱉으며 병아리를 휙 텃밭 모퉁이로 내던져 버린다.

"집구석이라고 사람 사는 것 같도 안허고, 양반이먼 멋 허고 종갓집이먼 멋 헐

거이여. 훈짐이 돌아야제. 아이고오, 나도 인자 이 집 머슴살이 더는 못허겄다.

문서 매인 종도 아닌디. 허리가 뿐지러지게 일을 해도, 일 같은 해야 잠도 잘 오

고 밥도 잘 먹고오."

상머슴은 병아리가 떨어지는 텃밭에서 눈을 거두며 침을 퉤 뱉는다. 서방님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홍씨부인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홍씨부인은 시집와서 처음

이태, 그 이듬해까지만 하여도 몹시 심사 편치 않아 성질을 못 이기는 것 같았

다. 달결처럼 갸름한 얼굴의 하관이 좀 빠른 것이 얼핏 흠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눈썹이 나비수염인데다가 살짝 내리뜨는 눈에 교태와 교색이 함께 섞여 있고,

입술이 볼록 나온 듯하면서 통통하여 윤기가 흐르는 홍씨부인은 아무래도 자색

이 분명하였다. 그 모습은 인근에 소문이 날 만했다. 그런 부인을 두고 곁에 나

란히 앉지도 않는다는 시부는 확실히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낯바닥 값 헌다고, 저러다가 종내 먼 일이 나고 말 거잉만."

"일은 무신 일이 날리라고? 어쩌튼지 양반으 댁 마님이?"

"양반 아니라 더 헌 거이라도 사램이 사램 구실을 허고 살어야제."

"서방님이 뭘 주도 안헌디 멋 헐라고 그렇게 날이 날마둥 머리 빗고 분 발르

고 그러까요?"

"안 봐 중게 더 허지맹?"

"이래도 안 바? 이래도 안 바? 허고잉?"

"헤기는... 젊은 날에 님 두고 독수공방 처량헝 신세에, 헐 일이 머있겄능가."

"오기가 나서도 단장을 허겄네. 분풀이로."

홍씨부인은 놀랍도록 치장에 열중했다. 우선 가락지와 반지와 하여도 패물함

으로 저렁저렁 소리가 나게 하나 가득이었는데, 철을 따라 겨울에는 금가락지,

봄이 되면 은칠보 반지, 오월이 되면 단오에 맞추어 견사로 갈아입으면서 옥가

락지에 마노 지환을 끼었다. 그러다가 한여름 염간에는 모시에 옥색 물을 놓아

날아갈 듯 차려입고 칠보 반지로 장식을 하였다. 결코 여름에는 금을 끼지 않고,

겨울에는 옥을 지니지 않았다. 산호, 진주, 밀화 반지말고도 노리개는 더욱 현란

하였으니, 박쥐, 거북, 오리, 붕어, 매미, 자라, 해태 같은 동물들의 모양과 포도송

이, 목화송이, 도토리, 천도, 연화 같은 식물의 모양을 이리저리 꾸며 놓은 대삼

작, 소삼작, 향낭들이 장에 가득했다. 노리개의 매듭과 요소도 어찌나 섬세하게

고르는지 딸기술, 봉술, 끈술, 갖가지마다 갖추어 가지고 있었는데, 한양의 시구

문안에 실이나 끈, 매듭의 장인들이 이름나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러 그곳까지

인편을 연락부절 보낼 정도였다. 은장도와 염낭은 아녀자가 으레 지닐 것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비녀에 이르면 가히 그네의 치장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었

다. 금은, 주옥의 비녀는 비녀꼭지에 아로새긴 문양과 생긴 재료를 따라

산호잠, 매죽잠, 목련잠, 석류잠, 호도잠, 민잠, 모란잠, 국화잠, 연봉잠 들이 두

손으로 비어지게 그득 틀어 쥐어도 모자랐다. 거기다가 국화꽃이 막 벌어지려는

모양의 과판 뒤꽂이,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를 본떠 만든 연봉 뒤꽂이, 나비, 화

엽 뒤꽂이들이 산호, 비취, 밀화, 파리, 진주 색색깔로 오색이 영롱하니, 실로 흐

드러진 자색의 젊은 부인 홍씨는 날마다 그렇게 철 맞추어, 일기 맞추어, 기분

맞추어, 가지각색 온갖 보패를 몸에 장식하였다. 장신구가 그러한데 의목은 말하

여 무엇할까. 그래서 항간에, 젊은 마님 귀목 경대 유리같이 반짝이고, 빗치개,

참빗, 얼레빗, 빗접, 쪽집개, 살적밀이, 분통 들은 눌 위하야 영롱한고, 진주 남원

기생들이 형님, 형님, 하겠다는 야유가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씨부인은 누

가 보든지 말든지, 무어라고 하든지 말든지, 마치 홀로 넋들린 사람처럼 달고,

끼고, 감고, 밀고, 바르고 하였다. 날이 갈수록 요요하여지던 홍씨부인의 아름다

움이 허리가 휘게 팽팽하여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사람들의 입살에도 그만큼 찰

지게 오르내렸다. 입이 싼 거멍굴의 아낙들이나 아랫몰 타성만이 아니라, 말하기

조심스러운 문중의 부인들조차도 목소리를 낮추고 불길한 눈빛을 번뜩이며 훔

쳐본 그네의 얼굴은, 차츰 푸르러지면서 검은 빛을 띠다가, 어느 하루 아침에 어

이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시집온 지 구 년 되던 해였다.

"내 그럴 줄 알았었다."

단 한 마디, 시부는 그렇게 말했다. 문중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시부는 아

무 말이 없었다. 으레 내 그럴 줄 알았었다. 하는 체념과 무심한 낯빛이 홍씨부

인이 쓰던 경대를 한순간 열별하고는 그만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었다.

내 그럴 줄 알았었어.

그때 열네 살이 된 아들 준의와 열두 살이 된 병의를 앞에 두고 마주앉은 시

부는 그 말만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리 될 줄 알고, 그다지도

마음을 날카롭게 세우고 조심하여, 행여라도 정 들었다가 정이 엎질러질까 보아

아예 인색하였던 것일까. 마음이 기울어진 다음에 그네가 홀홀히 떠나 어찌 감

당할꼬 싶어서, 정을 미리 떼느라고 그랬었는가. 시부는 이제 거의 폐인이나 다

름없었다.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셈이었다.

"내가 준의 장가라도 들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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