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큰사랑에 사람들과 앉아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문득 목에 가래가 막힌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나
숨이 끊어지게 간절한지, 듣는 사람은 정말로 그가 준의 장가를 들이고 나면 그
대로 절명할 것처럼 느껴졌다. 종가의 운수가 그러니, 문중도 따라서 빈한하여지
고 말았다. 그래도 한 삼백 석은 하던 종가의 농토는 어느덧 모조리 탕진되어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안방의 장롱에 그렇게도 그악스러울 만큼 모아들이던 패
물 장식은 홍씨부인과 함께 사라져, 말 그대로 집안은 귀 떨어진 빈 농짝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그 재산이 홍씨부인의 치장으로 다 소모된 것
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지붕의 이엉 이을 볏단조차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썩은 지붕을 몇 삼 년씩 손도 못 대던 그네의 친정이 어느 날은 기와지붕을 올
리고, 또 어느 날은 머슴을 두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계집종을 부리고, 하면서
살림이 윤택하여졌는데, 그것이 무슨 조화이겠느냐고 수군거렸다. 어떤 사람은
홍씨부인이 자취를 감춘 뒤에
"청춘을 팔아서 효도했다."
고도 빈정거렸다. 아무렇든 준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문중에서는 어느덧
당혼한 그의 혼인 때문에 몇 차례 의논이 오고 갔다. 혼주가 실심을 한데다가
모친도 없는 낭재 준의는 염려와 달리 누가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차일피
일 미룩미룩 하면서 날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혼사를 치르자면 명색이라고 어머니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의논 끝에 문장은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박복한 사람... ."
문중의 사람들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누구랄 것 없이 측은한 마음으로 시부
의 운명을 한탄하였다. 아무리 가문이 있다 하나, 이제는 논밭 몇 두락도 쓸 만
한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세 번씩이나 상처를 한 시부에게 차마 사취를 권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으며, 또 그렇게 시집을 올 동제간의 규수가 세상 어디에 있겠
는가. 의논만 분분하게 오가고, 모여앉으면 쌓이느니 근심뿐이었다.
"이러다가 하릴없이 세월만 가겠네. 벌써 동짓달이니 곧 눈이 내리면 설을 쇠
지 않겠나. 준의 나이가 그러면 열여섯인즉 혼인도 서둘러야지. 준의가 작배를
하고, 종손을 보면 차츰 집안도 일어날 것일세. 아무리나 혼인이 급하이. 허나...
저 사람을 어쩐다... ."
"나이 사십 중반이면 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우자 없이 어찌 여생을
살 수 있겠는가. 종가에 안주인이 안 계시매 폐옥이 다 되어서 보깅에도 스산하
고, 실제로도 그 살림이 말 아니고."
그러고 있는 문장에게 급한 소식이 들이닿았다. 물 건너 삼계에 참한 과숙이
수절을 하는데, 이미 삼년상까지 마치고, 자손도 없이 홀로 지내고 있다는 것이
다. 그네의 성씨와 친정의 문벌이 모두 남에게 뒤지지 않는데다가 성품까지도
무던하여 온화한 사람이다. 보쌈을 하자고 했다. 순간 방안에는 긴장이 돌았다.
"보쌈을?"
한참만에 문장은 낮은 소리로
"보쌈이라... ."
하고 생각에 잠긴 말을 뇌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노안이 지혜롭게 빛
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동짓달 스무이렛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가르고 바
람처럼 장정 몇 사람이 삼계를 향하여 떠났다. 돌아오는 그들의 어깨에는 보쌈
자루가 무겁게 메어져 있었다. 그날 밤부터 여인은 허물어져가는 종가의 안방에
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네가 김해김씨 부인이었다. 청암부인이 신랑이 없는 빈
집으로 신행을 왔을 때 맞이해 준 과수댁, 그 여인이다. 이상하게도 김씨부인은
보쌈으로 업혀 온 매안에서도 소복을 벗지 않았다. 지아비 삼년상을 다 마친 후
에도 한 번 남편을 잃은 여인은 다시 고운 물 색옷을 입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제 남의 집으로 업혀 와 할 수 없이 훼절을 하게 된 처지에, 새로 만난 사람
의 앞에서 전에 입던 소복을 입고 있는 것은 또 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데도 김씨부인은, 업혀 오던 그날 밤의 그 소복을 벗지 않았다. 벗지 않았다기보
다는 색 있는 옷으로 바꿔 입을 일이 없었다고나 할까. 시부는 보쌈하여 온 과
수댁에게 무슨 말 한 마디 붙여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냉대하지도 않고, 마치
큰방의 웃목에 웬 여인 하나가 낯설게 앉아 있는 것을 전혀 보도 듣도 못한 사
람처럼, 청맹과니 눈 뜨고 눈 먼 사람처럼, 무관하게, 남의 정신으로 앉고 서
는 사람같이 저만치서 지냈던 것이다. 그러니 굳이 스스로 나서서 무슨 고운 옷
으로 갈아입을 일도 없었고, 또 그네가 그렇게 당치않은 흰옷을 입고 지내는 것
을 들추어 시부가 상관을 하지도 않았다. 시부는 오직 무슨 날짜를 채우려고 마
지막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어서 준의 장가를 들이고 나면... 그러면 죽어도 되지."
그 일 하나를 하고 죽으려고, 사력을 다하여 지탱하고 있는 사람처럼, 삭은 음
성으로 버릇처럼 말하던 시부는,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렇게 벼르던 일을 가까스
로 마치고는, 참척으로 아들을 앞세우고 말았으니, 청암에서 돌아온 준의가 그만
열병을 얻어 단 며칠 앓더니, 시부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누
구라서 그런 일을 믿을 수 있으랴. 기진한 아버지의 식은 숨이 아들에게 끼쳐진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인지. 어린 나이 아직 여물지도 않은 새신랑 준의는, 혼
례만 치르고 청암에 남겨 놓고 온 신부를 두 번도 다시 더 보지 못하고 거짓말
처럼 이승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토록이나 쇠잔해진 부친의 빈 속을 한 번 더
모질게 훑어 내고.
"몹 쓸 놈."
시부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청암에서 이 느닷없이 비보를 듣고는 혼비하
여 소복으로 들려온 신부, 며느리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 다정히 못해 준 채, 바
깥사랑에 시신처럼 거멓게 누워 있던 시부는, 어느 하루 유언도 없이 운명해 버
리고 말았다. 그는 푸석, 쓰러지면서 재가 무너지듯 부스러져 버리었다. 마지막
힘을 놓아 버린 것이다.
"저 사람, 내 저럴 줄 알았네."
마치 시부가 그의 삼취 홍씨부인이 흔적없이 사라졌을 때 말하였던 것처럼,
문장은 시부의 정황을 보고 그렇게 탄식했다. 치상에 모인 사람들도 뜬 정신에
넋을 놓았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지낸 것도 어디 그것이 산 목숨이었습니까... . 눈을 뜨고
있으니 살었는가 부다 했었지요."
"차암... . 애석한 인생이로다."
"진즉 세상 떴을 사람이, 그래도 준의 성혼허는 걸 보고 죽으려고 이날까지 버
틴 것이었는데. 이런 참상이 있어 그래."
"그 사람도 마음 고생 많이 허고 가는 사람이네. 죽기 직전까지."
"배궁에 눈물 많이 뿌리고."
누가 짐작이나 하였으리.
"준의야 이제 장가들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어련히 어른 노릇헐라고요?
세월만 가면 아들 낳고 딸 낳고, 대추나무 대추 열리듯이 자손 많이 낳을 겝니
다. 두고 보세요."
"아암, 그래야지. 이 집안에서 한 대에 죽을 만큼 죽었으니, 인제 새로 나는 사
람도 그만큼 많어야지... ."
하는 덕담을 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아이고... 이 냥반이 어디만큼이나 지금쯤 가고 있는고... 가다가, 먼저 가신 마
나님들이랑 만나서, 이 이얘기, 저 이얘기 허며 쉬엄쉬엄 가는가아. 이 기막혔던
이승 이얘기를."
"자식 못 잊히어 어찌 눈을 감었는고."
문중의 동항 하나가 하염없이 노적봉 너머의 낮은 구름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 쉽게는 못 갈 것이네. 그 사람, 이 집에 맺힌 원통한 시름이 오죽한데
그렇게 얼른 갈 수가 있겄는가?"
시부 숙항의 한 사람이 무거운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그렇기는 하이, 그래도 다 천지의 기운을 받아 인간으로 나서 자기 한평생을
살다가 가는 집인데... 그냥 왔다 가는 정리만으로도 가벼이는 못 갈 길을... 회한
도 많은 인생... 한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한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헐
것이네. 초립동이 신랑으로 저승길 앞세운 자식에, 미장가 소년으로 부모없이 두
고 가는 어린 자식 생각을 해도 그렇고, 공연히 죄만 하나 더 지었다 싶은, 저
보쌈마님을 생각해도 그렇지 않겄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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