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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42)

카지모도 2023. 12. 1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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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울면서, 마침내 시퍼런 치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

다.

"내가 일찍이 식처곡부의 이야기를 왜 모르겠는가, 아녀자 오륜 행실의 본이

되는 그 사람은 열녀로서 가히 장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리

는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아무 흉될 것은 없었지만, 그때 내가 기량식의 아

내 못지않은 기구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나 홀로 져야 할 책임이 있고 도리가 있었던

게야."

청암부인은 효원의 숙인 이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같은 말을 몇 번씩 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 공치사도 같고 부질없는 일도 같

다마는, 너 또한 책임과 도리가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이렇게 새겨들으라

고 자꾸 말하느니, 허나, 처지로 비기면야 어찌 너와 나를 한자리에 놓을 수 있

으리. 우선은 서로 낯이 덜 익어 설다고 하지만 배필과 더불어 한 지붕 밑에 있

고, 위로는 층층이 어른들이 계시고... .끼니를 당하여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매, 이만하여도 너는 호사로다. 다만, 내가 밤이나 낮이나 근심하는 것은 일점

혈육이 무릎 아래 곰실거리면서 노니는 모습을 못 보는 것이구나. 늙은 할미 망

령이라고 속으로 웃을는지 모르나, 나한테는 그 일이 가장 사무치는 일이니라.

아가, 너, 내 심중을 헤아리겠느냐?"

효원은 숙인 이마를 더욱 깊이 수그렸다. 그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

네 자신이 주도하여 하는 일이라면, 두부를 자르듯이 네모 반듯하게 경경하여

어여쁘게 할머님 앞에 놓아드릴 수도 있겠지만, 혼자 앉아 아무리 각골명심 새

겨들어본들 무슨 하릴 있으리오.

(할머님의 심성을 제 어찌 모르겠습니까... . 하오나, 다만 헤아려드리올 뿐 더

어쩌지도 못하고, 제 몸으로 남의 인생 사는 것이 무슨 희롱인지 알 수 없습니

다. 어인 운명이, 제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라고 주어지는 것을 살아야

하는지요. 여인이라 그러한가, 남들도 나 같은가. 만들고 고치고 소망하는 것이

모두 다 홀로 달을 바라봄과 같으니 손발이 있으면 무엇하고, 뜻이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효원의 수그린 이마와 각이 진 어깨에 그 단단한 마음이 글자처럼 드러나 보

였는지 청암부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손부의 손을 따뜻하게 잡는다.

"기다리는 것도 일이니라. 일이란 꼭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지. 모든

일의 근원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즉, 네가 중심을 가지고 때를 고요히 기다

리자면 마음이 고여서 행실로 넘치게 마련 아니냐. 이런 일이 조급히 군다고 되

는 일이겠는가. 반개한 꽃봉오리 억지로 피우려고 화덕을 들이대랴, 손으로 벌리

랴. 순리가 있는 것을. 허나, 나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시절은 흉흉

하여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지라, 어린 너한테 과중한 짐을 부려 저리고자 이

렇게 자꾸 다짐을 하는 것이니라."

청암부인은 쥐고 있는 효원의 손을 조용히 어루만지고만 있었다. 부인 손의

다순 온기가 효원에게로 번지며 스며드는 것을 효원은 느낀다. 그 온기 속에는

추상의 찬서리 기운도, 뇌정의 울음 소리도 아닌 그저 한 아낙의 간절한 심정만

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마당에서 콩심이가 달랑거리며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

가 들려온다. 누렁이와 함께 뛰는지 무어라고 땍땍거린다. 그때 겨우 아홉 살이

된 콩심이는 효원이 대실에서 신행올 때 교전비 몸종으로 데리고 왔으나, 그까

짓 코흘리개가 무슨 수발을 제대로 들겠는가. 저 혼자 제 머리 빗기에도 어린

것이었으니, 말이 몸종이지, 친정 뜨락의 낯익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오는 심정

으로 함께 왔던 것이다. 고것은 안서방네에서 가끔씩 쥐어박히면서도 그 옆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자잘구레한 이야기의 말동무도 되어 주고 낫낫하

게 잔심부름도 곧잘 하였다.

"아이고, 이년아. 너는 무신 노무 목청이 그렇게 때까치맹이로 땍땍 땍땍. 내

귀가 마대. 조신허게 가만 가만 좀 못허겄냐?"

안서방네는 콩심이의 주동이를 향하여 주먹을 질러 보인다. 콩심이는 혓바닥

을 날름하며 눈을 질금 감는다. 알았다는 시늉이다.

"너 이년, 이 댁으 청암마님이 어뜬 양반인지 알기나 허냐? 매급시 천방지축

팔랑거리고 댕기다가, 다리 몽생이 분질러질 중 알어라."

"아앗따아, 워찌 고렇코롬 무선 양반이다요."

"이년, 이 주둥팽이, 어른이 무슨 말을 허는디 그렇게 비얌 셋바닥맹이로 날름

말을 받아먹냐? 그렇다먼 그렁갑다, 허고 속으로만 알어들을 일이제."

안서방네는 옆에 놓인 사기대접의 물을 한 입 물더니, 푸우우, 물먹은 이불 호

청 위에 뿜어낸다. 푸른 빛이 도는 광목 호청에 순간 부연 안개가 어리는 듯싶

다.

"내가 내 눈으로 보든 안했는디, 아조 유명헌 이얘기가 하나 있제잉. 너 들어

볼래?"

안서방네의 말에 콩심이의 눈이 반짝한다. 이야기라면 무엇을 마다하리. 고것

은 턱을 추켜들고 침까지 꿀꺽 삼킨다.

"마님이 이 댁으로 신행오실 적으 이얘긴디... ."

비록 반겨 줄 이 없는 애통하고 적막한 집으로 가는 초상길의 가마였으나 명

색이 신행이므로, 청암의 친정에서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어 교군꾼과 하님들을

챙겨 보냈다. 그러나 다만 호화롭고 아름다운 청홍의 술을 늘이운 꽃가마가 아

니라, 이 서러운 신부의 가마는 흰 덩이었다. 그 흰 덩을 따라서 이고 진 사람들

의 행렬은 사흘 밤낮을 걸어, 드디어 하루 해만 걸으면 될 숲말에 당도하였다.

마침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파, 잠시 객주집 근처에서 일행은 쉬게 되었다. 그때

근방에 사는 민촌의 아낙 하나가, 일행들 행차로 보아서는 신행길이 분명한데

난데없이 웬 가마가 하얗게 길목에 앉아 있는 것이 흥미로웠던지, 가마문을 벌

컥 열어젖히고는 고개를 쑤욱, 안으로 들이밀고 청암부인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고메, 신부가 과분가아? 벨 일이여이. 무신 노무 신부가 이렇게 생겠당가,

흐윽허니 참말로 요상허그만, 무섭게도 생겠네에. 호랭이맹이로. 하나도 이쁘도

안허고, 구신도 같고?"

아낙은 질겁을 하며 가마 문짝을 꽈당, 닫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속에

앉아 있는 신부는 어두컴컴한 가마 안에서 허연 소복을 하고 있었으며, 그 용색

또한 굵직하고 매서웠으니, 아낙이 소리를 지른 것은 순간의 일이었으리라. 호들

갑스러운 비명에 요란한 몸짓으로 달려드는 아낙의 수선에, 객주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틀어 돌아보았다. 교군꾼 하나는 막걸리 사발을 기

울이던 손목을 꺾은 채 눈이 동그래져서 깜박이지도 못하였다. 하님 하나는 아

예 일어서 버렸다. 무슨 일이 난 줄로 알았던 것이다. 아낙은 그만큼 야단스럽게

놀라며 낄낄거렸다. 일순 가마 주변에는 정적이 돌았다. 그것은 고즈넉한 것이

아니라 터질 듯이 팽창해 오르는 정적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민촌 아낙은 치

맛자락을 거머쥐고 배를 내밀어 뒤뚱걸음을 걸으며, 금방 구경거리를 본 것에

대하여 호기롭게 자랑하려는 듯 궁둥이를 내둘렀다. 그때였다.

"네 이녀언."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쩌엉, 울리며 공기의 폭을 갈랐다. 뒤꼭지를 할퀸 사람

처럼 자지러지며 돌아선 민촌 아낙은, 가마 문을 열고 나와 우뚝 서 있는 청상

을 보았다. 얼른 보아도 이십 미만의 여인이 분명한데 어디서 그런 서릿발이 돋

는 것일까. 마흔이 훨씬 넘었을 아낙은 주춤,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객줏집 평상과 마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두렵게 웅숭웅숭 일어나 길

목으로 나왔다. 햇발 아래 청상의 소복은 날이 선 푸른 빛을 눈부시게 뿜어냈다.

"저년을 잡아 오너라."

부인은 말끝을 칼날같이 잘랐다. 아직 부인이라기에는 애띠고 어린 여인의 분

부라지만, 감히 누구도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위엄이 전신에 어렸다. 그래서 교군

꾼 두 사람이 가까이 그 아낙의 곁으로 걸어가지도 전에, 아낙은 저절로 주저앉

고 말았다. 비실비실하는 아낙을 가마 앞까지 데리고 왔을 때, 부인은 아낙의 머

리채를 잡아 낚아 그 얼굴을 쳐들게 하였다. 아낙의 낯빛이 노랗게 질리는 것을

역력하게 보였다. 반면에 청상의 안색은 새파랗게 바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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