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감히, 누구를."
청암부인은 옆사람에게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숨을 잘라 뱉어내듯이 말했
다. 그러더니 동댕이치듯 머리채를 놓아 버렸다. 아낙이 휘청하며 그만 길바닥으
로 동그라졌다. 아무러면 어린 여인의 힘 때문에 그네가 쓰러졌을까. 아마도 창
졸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탓에 그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사람이란 엄연히 상하가 있는 법이거늘, 너 이년,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로
누구한테 그런 막된 행실을 하는 게냐. 내, 네년을 단단히 가르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청암부인은 길바닥의 아낙에게 일별을 던지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 마디
로
"가자."
하더니, 몸을 돌려 가마에 탔다. 그네가 소복 입고 오는 신행길에 버릇없이 민
촌 아낙을 끌고 와, 마당에 꿇어 엎드리게 해 놓고는 불칼 같은 호령으로 나무
란 일은, 훗날에까지 두고두고 안팎에 일화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몇 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타관 땅에서 몸종으로 주인을 따라온 아홉 살짜리 교전비
콩심이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 한 마디 잘못허고 행실 한 가지 비끗허먼 그렇게 큰일 나능 거이여. 알겄
냐? 어른 뫼시고 사는 사램이란 것은 언제든지 조심을 해야 헌다. 그저 어쩌든
지 입이 무거야고, 놀리는 일손은 번개같이 빠름서도, 그렇다고 눈치없이 아무
디나 촐랑촐랑 나서지 말어야고오."
안서방네는 눅눅해진 이불 호청을 네모 반듯하게 개키며 콩심이에게 다짐을
둔다. 그러면서, 새앙쥐 꼬랑지만한 콩심이 머리꼬리에 웃음이 나와 다시 한 번
대가리를 쥐어박아 준다. 그러나, 사람들 모두가 그 이야기를 안서방네처럼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혼인허고 사흘 만에 신랑을 잡아먹었으먼, 원 하늘이 무섭고 세상이 부끄러서
고개도 못 들고, 어디 쥐구녁 없능가, 삿갓을 씨고 있어도 모지래겄그만. 서방
죽어 초상난 신부가 겁도 없이 고래고래 남 다 듣게 외장을 침서 멀 잘했다고
죄인끄장 이바지맹이로 끄집고, 시집으로 온당가. 첨 오는 질에. 아이고, 배짱도
무서라."
"쌍것으로 태어난 설움을 톡톡이 받었그만 그리여. 그께잇 가매 뚜껑 조께 열
어 봤다고 그렇게까지 헐 거 머 있당가? 하도 요상허게 뀌민 가매라 지내감서
한 번 디리다 봤을티제잉. 가매란 거이 보통 호사시럽제, 그렇게 흰 덩을 탄 신
부가 어디 흔헝가, 머? 나라도 디다 보겄네. 아 자네 같으먼 안 보고 싶겄능가?
난생 첨 보는 거인디. 사람 귀경도 죄가 되는 노무 인생. 무신 좋은 날을 볼라고
이러고 사능고."
그때 당시에나 몇 년이 지난 후에나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른 뒤에나, 거멍
굴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
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처지를 그만큼 절실하게 깨우쳐 주면서도, 매안의
문중에 대하여서는 일종의 두려움을 새로 일깨워 주는 이야기인 때문이었다. 그
들은, 이씨 문중과 청암부인의 서슬에 금방이라도 살을 베일 것 같은 아찔함을
한두 번 맛본 것이 아니었다.
"가매를 열어 본 사램은 또 얼매나 놀랬겄능가잉.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녹이
홍생을 떨쳐입은 꽃각시가 앉었능게미 재미로 열어ㅂ다가, 무신 구신맹이로 흐
옇게 앉았는 젊은 여자를 ㅂ이니, 그것이 나였드라도 놀래 자빠졌겄네. 아, 누가
안 놀래겄능가? 거그다가 지금은 그 냥반이 늙어잉게 보타져서 그만이라도 쬐깐
해졌제, 옛날으 젊었을 적으는 무신 지둥맹이로, 가매 뚜껑을 뚫어 불라고 앉은
키가 우뚝허니 솟았을 거인디 말이여. 거그다가 엥간치 매섭게 생겠능가? 참말
로 자개 생긴 것은 생각도 안허고, 넘보고 놀랜 넘보고만 허물을 따지자니이... ."
옹구네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그네
로서는 매안 동구에 서 있는 열녀비라든가 피투성이같은 시뻘겋게 칠갑을 한 창
살의 나무기둥 정문을 바라만 보아도 울컥, 아니꼬운 심정이 드는 것이었다.
"허엉. 열녀? 니가 멋으로 열녀를 했능가는 모리겄다마느은, 너도 참말로 불쌍
헌 헛세상을 살다가 갔다. 인생이 한 번 왔다가 죽고 말먼 그거뿐인디 어디 눈
에 맞는 머심 등짝엘가도 엡헤서 밤도망을 갔다먼 또 말도 않겄다. 속절없이 죽
어간 것은 누구 보라고 헌 짓이냐고오. 너도 매급시 넘으 비우 맞출라고 애간장
녹게 아까운 목심을 덜컥, 끓었겄지마는, 그거이 무신 지랄이냐. 나는 지발도 먼
저 죽은 서방 따러 죽었다고 누가 열녀라고 해 주도 않지마는, 내가 죽도 안헌
다. 내가 왜 죽겄냐. 나느은 살라안다아."
언젠가 옹구네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는, 홀짝 홀짝 따라마신 음복주에 흥건
하게 취해서 허벅지 장단을 두드리며 타령조로 사설을 하다가, 열녀비 쪽을 향
하여 코를 팽, 풀어 던졌다. 그러면서도 그네는 찰진 입심만큼 손끝도 야물어,
원뜸 일이라면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궂은일 잔일을 잘 찾아 하였다. 거멍
굴에서 나서면 공방담배 석 대는 피워야 겨우 아랫몰로 건너가는 도랑물에 닿는
다. 그 도랑을 건너고도 또 그만큼이나 걸어가야 겨우 아랫몰에 이르는데, 기운
없는 여름에는 팍팍하고 힘 팽기는 거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옹구네는 도랑물
을 건널 때마다, 이것이 서로의 신분을 금 긋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 물을 건
너면서는 말씨도 조심하고 걸음걸이도 안존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고샅에 돋
아나는 풀포기 하나라도 뽑아내고,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 한 개라도 골라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의 성품이,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서려 있기 때문이었
다. 고샅을 지나는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진대, 그 댁의 마당은 말하여 무엇하겠
는가. 그대로 맨발로 디뎌도 흙이 묻어나지 않을 만큼 반드럽고 탄탄하였다. 네
모진 귀퉁이의 날카로운 각은 누가 보더라도 그 집안의 서슬을 느끼게 하였다.
그 마당을 쓸어내는 새끼머슴 붙들이 솜씨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
선 대빗자루로 초벌을 쓸고, 다음에 부드러운 싸리비로 재벌을 쓸었는데, 바깥에
서 안쪽으로 먼지 한 점 일우지 않고, 마당이 세수라도 한 것마냥 매끄럽게 일
을 해냈다.
"집안에 먼지 일게 허지 마라. 마당 하나 쓰는 데도 정성이 들어가야 합심이
되는 법이거늘, 쌓인 흙이라고 마구 쓸어내면 종당에는 마당이 돌짝밭 되고 마
는 것이다. 세상에 그저 되는 일은 없느니."
그렇게 단속하는 청암부인의 성품 탓으로 큰일, 작은일, 큰손님, 작은손님이
끊일 사이 없는 종가의 부엌 행주에서는 언제나 맑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
자니 심지어는 이런 일까지도 있었다. 본디 침착한 안서방네가 그날은 웬일이었
는지, 청암부인이 마실 냉수를 받쳐 내오다가 발목이 비끗하면서, 물을 부엌 바
닥에 흘리고 말았다. 물론 그릇을 엎은 것도 아니도, 다만 자칫 잘못으로 한 모
금이나 될까 한 물을 엎지른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두면 바람에
마를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안방에 앉아 있던 부인이 부엌 바라지 앞에 서 있
었지, 그런 안서방네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막 시집와서 얼마 안되었던 안서
방네는 청암부인에게 죄송스러운 몸짓으로 허리를 굽히고는, 급히 냉수 한 대접
을 다시 뜨려고 하였다.
"바닥에 물을 닦아야지."
청암부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안서방네는 그 말에 당황하여 부뚜막과 살강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뜨는 것은 행주뿐이었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딸린
뒷방문을 열고는 방걸레를 지어 들었다.
"허허어, 살림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로고, 방에 쓰는 것, 부엌에 쓰는 것, 마
당 헛간에 쓰는 것이 다 용도가 있고 자리가 있는 법 아닌가. 어찌 방걸레로 부
엌 바닥을 훔칠까."
안서방네는 부인의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황망히 행주치마를 벗어 바닥
의 물을 찍어냈다. 그때 청암부인의 나이는 안서방네와 별반 차이 나지 않는 이
십 중반이었다. 안서방네는 그 일을 오래 잊지 않았다.
"상전은 다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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