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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44)

카지모도 2023. 12. 2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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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의 가슴속에는 이 생각이 깊숙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청암부

인은 그때 같지가 않으시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눈에 띄게 초췌하여지는데

다가, 전에 않던 말씀도 힘없이 하시지 않는가.

"여보게,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네."

한 번은 부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붙들이가 마당 쓰는 것을 보며 안서방네에

게 그렇게 탄식하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안서방네는 민망하

여 아무 대답도 못하였지만, 청암부인은 바로 며칠 전에도 이기채를 앞에 하고

또 그 말을 뇌었다.

"인제 두고 보아,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니."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반박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창씨개명이라니, 이기채는 밤이면 잠을 못 이루

었다. 특히 곡성의 유건영과 고창의 설진영이 비장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어찌하면 좋을꼬. 과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이

기채의 생각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옆에서 기표가 말을 던진다.

"사람은 죽어 버리고 성씨만 남으면 뭘 합니까? 몸뚱이도 없는데 빈옷껍데기

만 너울거리는 격이지요."

그러더니 답답한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이와 같은 시국에 이만큼이라도

별 탈없이 집안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은, 기표의 덕분이랄 수가 있었다. 그는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단순히 그냥 친분이 있는 정도의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한 권한이 있는 사람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래서 이기채도 기표의

권유에 따라 기부금이며 군량을 내기도 하였다.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형님, 한푼을 아끼다가 때를 놓치면 아차 집칸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수도 있고, 반대로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는 수도 있으니까요."

기표는 민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기채는 한치도 빈틈없이 어긋남도

없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하는 성격이다. 그 성격은 이재

에서도 그대도 드러났다. 한 번 움켜쥔 것은 놓지 않으려 하고, 마음이 질긴 사

람이어서 쉽게 무슨 일을 포기하거나 새로 시작하지 못한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내 앞으로 모

이지 않겠느냐."

그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치 그런 이기채의 뜻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위장이 실하지 못하였다. 실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무기력하다는

쪽이 옮을 것이다. 본디 체수도 작고, 위장까지 좋지 않으니, 그는 오로지 강단

하나로 자신을 버티면서 집안을 관리해 나갔는데, 그는 언제부터인가 밥을 제대

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주식으로는 녹말가루를 멀겋게 쑤어서 먹고, 좀 괜찮을

때는 마음이나 죽을 끓였으며, 밥은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밖에는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심기가 좀 언짢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소용 없어서 율촌댁이 어

쩔 줄을 몰라했다. 그 대신 이기채의 사랑 마루에는 언제나 웬만한 약재가 갖추

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재를 자르고 써는 작두, 갈아서 가루를 내는 정교한

맷돌, 빻아서 가루를 내는 약절구와 작은 공이가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이어 있

었다. 거기다가 물론, 약을 밭치는 체와 비상도 달 수 있는 약저울이며 약 탕관

도 늘 약장 위에 얹혀져 있었다. 웬만한 선비 사인의 집에는 크고 작은 간에 하

나씩 갖추기 마련인 이 약장은, 그 서랍이 적게는 여남은 개에서부터 많게는 칠

팔십여개에 이르기까지 층층으로 빼곡하여, 그 안에 칸칸마다 썰어 넣어 놓은

약재가 가득 담기어 있었는데. 사랑에만이 아니라 안방에서도 약재를 쓰이어, 머

리맡에 내방 약장을 두기도 하였다. 그래서 집안 안팎 식구들이 용도가 있을 때,

혹은 일가와 문중, 마을 사람들이 아플 때, 화제를 내어 약을 지어 주었으니, 선

비라면 누구라도 스스로 화제를 낼 줄 알았다. 이기채는 의서를 두루 갖추어 가

까이 두고 읽으며, 음식을 멀리 하였다. 그러니 자연 다른 집안 사람들도 따라서

소식을 하게 될 수밖에, 그래서 이 집에 찾아왔던 손님들이 마침 끼니 때가 되

어 함께 상을 받으면 그 소반에 우선 놀라 버린다. 그러기에 율촌댁이 마늘 한

쪽을 반으로 잘라서 아침에 반절, 저녁에 반절 나누어 양념 무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것이다. 물론 율촌댁이 살림 규모가 또 그만큼 알뜰하고 인색한 것도 사

실이었지만, 그러나 기표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어느 때는 기표의 옷자

락 끄트머리에서 칼빛이 번뜩이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혈색과 풍신

때문에 그것은 쉽게 누구의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표를 보고 어쩌다

기응이 미간을 깊이 찡그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 기색을 기표도 놓치지 않고 반

박하였다.

"사람의 한평생이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어.

기회와 수단, 이것이 서로 잘 맞어 주면 뜻을 한 번 이루어 볼 만도 하지."

기표는 오류골 동생 기응에게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분북대로 살지요."

기응은 중형 기표의 하는 일이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분복? 그것도 다 사람이 짓는 대로 몫이 돌아오는 게야. 큰집의 농토며 소작

미만 해도 그것이 가만히 앉아서 지켜지는 것인가? 분복대로 산다고 하늘만 쳐

다보고 앉어 있었더라면, 진즉에 무슨 일이 났을 것이야.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렇게 말하는 기표가 큰집을 위하여 여러 모로 힘 쓰고 있는 것은 기응도 알

고 있었다. 일본은 최근, 양정 계획으로 일만자족정책을 세우고, 지난 1937년부

터 연간 천만 석 이상의 미곡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동안 일본의

식량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자, 제7대 조선 총독 남차랑은 작년 1939년부터는 양

곡 반출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웠다. 즉 조선에서 나는 양곡의 총 수확량을 지

금까지 책정하였던 실 수확량보다 이할 오푼이나 높여서 허위로 책정한 것이다.

"인자는 조선사람한티는, 일년 양식으로 한 사람 앞에 쌀 서 말 여덜되 여덜

홉만 냉겨 놓고, 나머지는 다 공출헌다네."

"아니고매, 쥑일 놈들.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깟낫애기 암죽만낄일라도 그

께잇 거 갖꼬는 어림 택도 없겄다."

"아니, 지어 바치라는 것은 숫짜가 눈깔이 돌아가게 엄청나고, 먹으라고 냉게

놓는 것은 싸래기만큼배끼 안된디, 그나마 아홉 말에서 서말 여덜 되 여덜 홉으

로 먹을 양석을 깎어 내리머언, 우리는 기양 앉아서 비툴어져 죽으라는 말이구

만잉."

"아홉 말썩 쳐서 냉게 놀 때도, 그거이 어디 사람 먹는 거이였간디. 밀지울 섞

어 먹고, 깻묵 섞어 먹고, 똥이 안 빠져서 똥구녁 찢어진 놈이 어디 한둘이었가

니? 인자는, 똥구녁끄장 갈 것도 없이 창새부터 짝짝 찢어지겄네."

"나무 껍닥 벳게 먹고, 풀뿌랭이 캐 먹고, 또랑물 퍼 마시고 살어야제잉.... . 개

짐생만도 못허게."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미곡 수급 계획에 의하여 각

농가마다 할당량을 정해 주고, 할당 수확량에서 정해 준 소비량을 뺀 나머지 양

곡은 모조리 공출해 가 버렸다. 그러니 농민들은 실제 수확량보다 엄청나게 높

은 할당량 때문에 기가 질렸고, 거기다가 도저히 그것만으로는 입에 풀칠하여

살 수조차 없는 적은 양곡 때문에, 헤어날 길 없는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부황이 났다. 오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은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

떠서 밀룽밀룽해져, 서로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이 젊은 축은

좀 나았지만 병약한 노인이나 어린 것은 버치어 내지 못하고, 허깨비처럼 픽픽

쓰러져 힘없이 죽어 나갔다. 말이 천만 석이지, 평년작을 전제로 할 때, 오백만

석 이상은 조선에서 반출할 능력이 없었음에도, 일본 본토로부터 배정받은 공출

할당량은 요지부동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에서는 단 한 평의 땅이라도

놀리지 말자고, 소위 '일평원예'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학교 마당, 가정집의 뒤

뜰, 그리고 도로변이나 자갈밭까지도 개간을하여 식물을 심게 하고는, 농업 생산

책임제를 강행하여 쌀과 보리 종류, 잡곡, 소채, 누에고치 할 것 없이 책임 품목

을 지정하고, 그 책임수량을 할당하였으니, 조선인은 설령 자기가 굶어 죽은 한

이 었어도 서슬이 시퍼렇고 찰거머리 같은 공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임실의 중

농인 한 남정네는 넋이 나간 사람 모양으로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마른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 담뱃대 꼭지를 연방 빨더니

"에에이 빌어 처묵을 노무 시상."

하면서 연기 대신 한숨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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