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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5)

카지모도 2023. 12. 3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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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매, 저것이 혈이지. 혈."

그런데 지금 그 혈이 마르고 있는 것이다. 인월댁의 피가 마른다.

"청암마님 근력은 어떠시든가?"

인월댁은 안서방한테 그것부터 물었다.

"실섭을 허셌지요."

안서방은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실섭을... 언제부터..."

인월댁의 목소리가 툭, 꺼져 내렸다. 그 목소리를 따라 안서방의 수그린 고개도

아래쪽으로 무겁게 떨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인월댁의 얼굴빛이 바

랜다. 그네는 진정을 하려는 것처럼 저고리 소매끝을 손가락으로 오그려 잡는다.

"실섭하신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 사날 되능만요."

"대서에."

인월댁은 손가락 마디를 짚으며 날짜를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예."

"어떻게?"

"그날 아침으 누우신 자리서 기양 못 일어나시고 말었답니다. 첨에는 아무도 그

렇게 끄정 되신 중을 몰랐지요."

"그럼 오늘까지 벌써 나흘째나 되지 않었는가."

"예"

"그런데 왜 인제서야 그 말을 허는가? 그날로 올 일이지."

"일어나실지 알고요"

"원, 사람... 참"

인월댁은 쯔쯔 혀를 차고, 소식을 전한 안서방은 근심스럽고 송구스러운 낯빛으

로 두 손을 맞잡고만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인월댁은 그 걸음으로 원뜸의 청

암부인에게 서둘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런 뒤로도 지금 벌써 몇 차례인지 모르

게 종가에 다녀온 것이다. 그네의 걸음걸이는 초조하고 빨랐다.

"이날 펭상에 질쌈만 허시제 덧문 한 번을 활짝 안 열고, 마당에도 제대로 안 나

오시든 인월마님이 저렇게 자조 원뜸에 오르내리시능 거이 암만해도 청암마님

오래 못 사실랑갑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소복을 하고 아랫몰에서 원뜸 사이를 오르내리는 인월댁의 모습에서 까닭 모를

불안을 느낀 평순네는 놉들과 같이 중뜸의 고추밭을 매다가 공연히 몸 둘바를

몰랐다.

"이날 펭상, 그림자맹이로 사시는 양반이..."

그것은 인월댁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인월댁은 청상의 과수도 아니면서 자신이

소복을 입기 시작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잊을 수가 없는 것만이 아니라

그날을 생각하면 뼛골이 사무쳐 왔다. 그날로부터 입기 시작한 올 굵은 무명옷

은, 살아있다 할 수 없는 그네의 반생을 그렇게 허연 빛으로 표백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월댁은 원뜸의 청호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고샅을 훑고 지나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찬 방바닥에 망연히 누워만

있었다. 미영씨 기름 등잔의 빛이 바래어지는 것으로 보아 동이 트고 있는 모양

이었다. 인월댁은 기진한 듯 눈을 감는다. 청호 저수지의 물이 마르다 마르다 못

하여 뻘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내장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허옇고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다리를 걷어 붙이고 소쿠리며 삼태기, 물통에 물

고기를 건지는 모습 또한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뙤약볕이 하얗게 내리

쪼인다. 둥그렇게 드러난 조개방위가 뙤약볕을 받아 불덩어리처럼 달구어진다.

이글거리며 달구어진 조개바위가 타오르면서, 그 불길에 뜨겁게 끓어 넘치는 청

호에 사람들이 와글거린다. 흡사 장바닥 같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 나

온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손에 손

에 횃불을 들고 있다. 불빛이 넘실거린다. 횃불이 햇빛을 가리운다. 햇빛이 가리

워지자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관솔불, 횃불들이 어지럽게 쏟아진다. 가슴의 복판

에 쏟아진 불덩이로 꺼멓게 뚫리는 인월댁의 가슴이 써늘하게 식는다. 달도 없

는 깊은 밤이었지. 천지는 무거운 어둠에 쓸리며,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지고 있

었다. 그날따라 소쩍새는 온 산에서 음울하게 울었다. 그 울음의 울림이 밤바람

을 타고, 번뜩이는 방죽의 수면으로 젖어 내리었다. 봄이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

져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밤이면 그렇게 목이 갈라져 쉰 소리로 소쩍새는 울었

다. 그 몹쓸 소리. 컴컴하게 핏속으로 잦아드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에 홀린 듯이

앉아서 해마다 몇 봄을 그렇게 그네는 쓰라리게 넘겼었는지. 내게 아무러면 소

쩍새만한 한이 없으랴. 기미년, 그때 서른 살을 막 넘기었던 그네는 아무 미련도

없이 초가삼간을 나섰다. 그네가 시집이라고 와서 십여 년 동안을 의탁하였던

집이었다. 그 사립문을 지그려 닫고 허청허청 원뜸의 방죽을 향하여 걸어가던

인월댁은 어둠 속에서 초가를 돌아보았다. 집은 마치 벗어 놓고 온 신발처럼 봄

밤의어둠을 슬어 안고 있었다. 하기야 그네가 매안의 이씨 문중으로 오게 된 것

부터가, 기구하다면 기구하였고 억지라면 억지였다.

"사람의 한평생이란 뜻 같지만은 않은 것이네. 뜻밖의 일이란 항상 뜻밖에 일어

나는 법 아닌가. 비록 지금은 이와 같이 서러운 신행을 왔네마는, 참고 살자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 것인가. 나도 빈 집으로 신행을 왔었네. 오 속의 가까운 일

가도 없이, 의지하고 살 사람 하나도 없는 집에 흰 옷 입고 왔었지. 이 사람아,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줄 아는가? 자네 나이와 꼭 같은 열아홉이었어. 나는 그

때 ... 속으로 그랬었네...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신랑을 두고, 죽지만 않

았다면 좋겄다. 한평생 만날 일 없이 살어도 좋고, 평생토록 소식 한자 못 듣고

살어도 좋으니 어디서든지... 아무 곳에서라도... 나 모르는 어떤 곳에서라도... 살

아만 있었으면 원이 없으련만... 하였더라네. 지금도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

아. 목숨이 살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설움을 갚어 줄 수 있을 것만 같

더란 말일세."

(차라리 죽고 없으면 심정이 이와 같으리오. 청암아짐은 마음속에 한은 있으되

원이 없으시니, 원한을 함께 품고 있는 저와 같으시겠습니까?)

"내가 남의 일이라서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세. 사람이 살어 있으면 마음에 품은

원이건 한이건 대상을 삼을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주는

끈이 되는 것이야."

(그 끈이 나를 동여매고, 목을 조이고, 한평생을 속박하는 것은 또 어쩌리까? 지

난 봄, 삼일운동에는 남원 읍내 온 사람이 다 나와서 목이 메이게 대한독립만세

를 불렀다 하더이다만, 나는 무엇에 묶여 있길래, 무엇에서 벗어나고자 이리하는

것이리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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