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2권 (4)

카지모도 2023. 12. 29. 06:17
728x90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허신다는디, 이런 난세에, 내비두어도 물이 없어 말러 죽

어가는 물괴기 조께 건져 먹었다고 설마 호통이야 치겄어? 안 그리여?"

저것은 춘복이 소리다. 평순네는 울컥 억하심정이 치민다. (아무리 그런대도 청

호는 우리 꺼이 아닌디, 거그서 살고 있는 물괴기를 건져다 먹는다먼 도적질이

나 한가지여. 잘허는 짓은 아니라고. 주신다먼 몰르지만... 그래도 어쩔 거이여?

넘들은 다 허는 짓을 나만 발 개고 앉어 있다고 누가 상 주도 안헐 거이고. 아

이고 모르겄다. 덕석말이를 당허먼 모다 같이 당허제 나만 당헐라디야? 그거는

그렇다치고. 아이고메, 저 년놈들은 낯빤대기 두껀 것 좀 바.) 평순네의 마음은

도무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일은 저 예펜네가 저질렀는디 왜 속은 내 속이 이

렇게 시끄럽다냐. 됩대로 내가 무신 들킬 일이라도 있는 것맹이로, 두근두근,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능가 모리겄네.) 그 시각은 인월댁이 막 베틀에서 내려와 앉은

시각이었다. 인월댁은 고샅을 지나가는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에 마음이 어지러

워진다. 그리고, 어떤 무서운 예감을 느낀다. 논바닥에서 흙먼지가 누렇게 일고,

수숫대 울바자에 올린 호박 덩굴들이 애호박 한 덩이도 제대로 달지 못한 채 잎

사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는 날씨는 어째서인지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고.) 처음에는 가뭄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근심은 하지 않았었다. 그

만큼 청호는 크고 넓고 깊었다. 그리고 물 밑바닥에 거대한 몸집을 누이고 있는

조개바위의 영험을 또한 믿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이 나이 마흔을 바라보면서 서

른아홉의 몸으로 일으킨 관수 공사가 아니었던가. 순종 임금대 융희 4년, 만 이

태에 걸쳐 공사가 끝난 저수지는, 설마 그렇게까지야 될까마는 둘레가 오 리는

된다고 소문이 났다.

"멩주실 한 꾸리 풀어 갖꼬는 밑바닥으 못 닿겄네잉?"

어느 날인가. 저수지를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평순네가 파란 물비늘을

일으키며 반짝이는 호면을 보고는 공연히 뿌듯하여 가슴을 뒤로 좌악 젖혔을

때.

"한 꾸리가 머이여? 서너 꾸리라도 들으가겄다. 인자느은 누구든 이물 속에 한

번 풍덩실 빠져 불먼 그것뿐이여. 옛날에맹이로 횃불 밝히고 장정들이 건져내고

그러든 못헐 거이네. 한 많은 시상 등지고 자픈 사람은 원도 없이 죽을 수 있겄

네에."

옹구네가 맞받아 말하였다. 평순네는 옹구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살을 찌푸

렸다. 그것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놀라운 일로, 인월댁은 젊은

날에 있었던 서러운 사건을 빗대어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저수지 공사가 끝나

던 날, 흥겨운 꽹매기와 천지를 울리는 장구 소리에 그대로 마을이 뒤집힐 것

같았었다. 엄청난 관수 공사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와 즐거움에 잔치가 벌어진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산자락의 흙더미에 깔려 있던 집채 같은 조개바위

의 출현으로 인하여, 마을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저수지

를 넓히느라고 깎아 내던 산자락 밑에는 뜻밖에도 영락없이 조갑지를 엎어 놓은

형국을 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가 묻혀 있었다. 조개 봉우리 높이가 일고여덟 자

남짓이나 되며, 동서로 열다섯 자 네치, 남북으로 열넉 자 두치가 넘어가는, 둥

그스름한 바위의 동산 날맹이 같은 등을 캐내고는, 탄성을 울리며 바라보던 사

람들은 너나없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온몸에 뜨겁게 돋는 소름을 후

루르, 부둥켜 안았다. 그것은 이상한 감격이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이 바위가

이씨 문중과 종가는 물론이거니와 온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저 조개라 하는 것은 물 속

에서 물을 먹고 사는 생물이 아니랴. 물 속에 있어야 목숨을 부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킬 조개가 엉뚱하게도 산기슭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부터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다 그것도 무거운 흙더미에 깔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니. 그 조개는 빈사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나마 눈앞에

바짝 방죽이 보이고 그곳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찰랑거리고 있다면 그 목마르고

애타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몇 백 년 동안. 자연 마음속에 앙심이 솟아 엉뚱한

이씨 문중 대종가의 부인들, 반남박씨, 청주한씨를 비명에 잡아가고, 남양 홍씨

부인을 달아나게 하였다고 수군댔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청암부인의 초립동

이 신랑 준의를 열여섯의 나이에 조세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개가 그렇게 캄

캄한 흙 속에 파묻혀 짓눌린 채 목이 말라 있으니 자손이 번성할 리가 없다고들

하였다. 산 속에 묻히는 것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무덤을 의미하지 않느냐는 것

이다. 그 조개는 용궁의 신령님이라고도 했다. 그 신령님을 이제 종손부 청암부

인이 구해 드렸다. 죽어가던 조개를 살려 내고, 그것도 세세생생 물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넓으나 넓고 깊고 깊은 집까지 마련해 드렸으니, 이보다 더한 공덕이

어디 있으랴. 해원을 해 드린 것이다. 말랐던 조개에 물이 오르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마을 안팎은 물론이요, 몇 십 리 바깥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

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러 조개바위를 찾아왔다. 그 치성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치성을 드리고 난 떡과 밥, 음식

들은 정갈하게 쪼개서 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신령님도 잡수시고 신령님의 신

하들인 물고기들이 먹으라는 정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렇게나 공을

들이고 정성을 바치던 물 속의 조개바위가 검은 등허리를 내밀어 버린 것이 한

달여 전의 일이다. 그때 인월댁은 안서방이 조심스럽게 전하여 주는 말을 듣고

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농사의 풍흉보다 훨씬 더 깊은 불길함을 그 속에서 느꼈

던 것이다. 하늘받이 매안리에서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으면 물이 마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수지의 물이 마르니 그 속에 숨었던 조개바위

등허리가 솟아나고, 드디어는 누가 잡지도 않고 몇 십 년씩 신성하게 여겨 온

물고기들도, 물바닥에 새까맣게 몰려 드글드글 뒤재비를 치며 흰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월댁에게는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 왜 그랬던고. 나는 마치 무슨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관수 공사를 서둘렀네. 내가 목이 타서, 꼭 무엇에 씌인 사람마냥 저수지를 팠던

게야. 숨이 넘어갔어... 헌데, 이듬해... 막바지로 공사가 치달아 마무리가 되려는

데, 꼭 기다렸다는 듯이, 나라가 망했다, 하지 않는가. 나는 믿을 수가 없었네.

하늘과 땅이 합벽을 하고 맷돌을 갈아, 천지가 캄캄한 일이었지. 그런데 묘한 것

은 그 와중에서도 남모르게 벅찬 희망이 샘솟았다는 것이야. 맷돌질 해 보면,

왜, 우아랫짝이 맞물려 돌면서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만, 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채 통째로 빠져 나오는 놈이 있지 않던가? 신기하지. 꼭 그 통밀이나 통팥,

녹두같이 또글또글 살아서 튀어나온 희망, 그것이 저수지였다. 그때 나는 믿었

네. 우리 조선이 망했다 하지만, 결코 망할 수 없는 기운을 갊아서 여기 우리 매

안이 저수지에다 숨겨 둔 것이라고. 남모르게 그득 채워 재워 놓고 우리를 살려

줄 것이라고. 예사로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다 뜻이 있지. 밖으로

난 숨통을 왜 놈이 막았다면, 한 가닥 소중한 정기는 땅밑으로 흘러서 예 와 고

인 것이라, 나는 확신했었네. 아무한테도 발설한 일은 없었지만, 나는 누구인가

내게 맡긴 이 물을 잘 간수하리라 다짐했어."

청암부인은 인월댁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2권 (6)  (0) 2024.01.02
혼불 2권 (5)  (0) 2023.12.31
혼불 2권 (3)  (0) 2023.12.28
혼불 2권 (2)  (0) 2023.12.27
혼불 2권 (1)  (0)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