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냐. 그래라. 저러신 중에도 정신이 잠깐 드시면 너를 찾으신다. 어디 있느냐고
방안을 둘러보고 자리에 없으니 몹시 서운해허시드라. 이제 어디 가지 말고 할
머님 곁에 있거라. 지금 숨만 붙어 있지 살아계신 분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율촌댁은 애간장이 녹으면서도, 일변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전신에 느껴졌다. 무
엇이라 할까. 청암부인으로부터도 이기채로부터도 버림받은 강모가, 가엾게 떨면
서 자기의 품으로 안겨들어온 것 같은 오랜만의 충만감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도 율촌댁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린 청암부인한테서 강모를 되찾은 듯한 심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늘 뒷전에서 눈치보며 멈칫거리던 어미 노릇을 이번
에야말로 당당히 해 주고 싶은 간절함을 지그시 눌렀다. 이렇게 참담하여진 아
들이 마치 비에 젖은 새 새끼처럼 애처로우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만의 것이 된 듯하였던 것이다.
"강모야. 조금도 걱정 말아라. 어떻게든 에미가 네 일을 잘되게 해주마. 무얼 해
주면 좋겠느냐?"
"괜찮습니다."
"에미가 어디 남이냐? 무슨 말이든 해 보아."
"아닙니다."
강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였다.
"할머님한테 갔다가는 이리로 나오너라. 에미랑 좀더 이야기를 허자. 그 동안에
밀리고 밀린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고."
강모는, 그러지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았
다. 이야기한들 무엇 하리... 부질없는 일. 내 한 몸의 인생에 왜 이다지도 여러
사람이 노심초사를 하는 것일까. 나로 인하여 집안에 소동이 멎을 날 없으니 어
찌하여 그런가. 나는, 내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도 못하고, 내 하고 싶은 일 하
지도 못했는데, 아무것도 되는 일 없이 시끄럽기만 하다.
"네가 어떤 자식이라고..."
율촌댁은 다시 강모의 손목을 잡는다. 강모는 손목이 끈끈하게 느껴진다. 그저
누구든지 나를 보면 입을 열어, 무슨 말이 되었든 자기 말을 하려 하고, 또 내
말을 기어이 들으려 한다. 그리고 곁에 두려 한다. 그럴수록 나의 머리 속은 실
꾸러미 얽힌 것처럼 어수선하고, 철사를 이빨로 물어 뜯으려는 사람처럼 괴롭다.
아아, 끊어 버리고 싶다. 이 질긴 줄, 철사의 올가미. 그러나 철사가 이빨로 끊어
지랴. 오히려 이빨의 사기질이 떨어져 나갔다. 치수의 신경이 철사의 금속성에
갈리면서, 온몸을 소스라치게 하던 그 감각이라니. 살 속으로 파고드는 가느다란
철사의 줄을 자기가 끊지 못하면, 그 줄이 자기를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속박감
에 그는 자다가도 일어나 소름이 끼치곤 했다. 강모는 큰방 앞세서 까닭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할머니, 저 강모예요."
하던 말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그네는 듣지 못하는 것이다. 재작년 여름에 창
씨개명을 해 버린 일로 크게 낙담하여 실심을 한 청암부인의 허깨비 같은 가슴
에, 더위가 컥, 숨이 막히게 얹히면서 그네는 끝내 식욕을 되찾지 못하고 말았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례없는 가뭄이 불볕을 쏟으며 이글이글 논밭을 태우
니. 누워서도 마음을 졸이던 청암부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수지, 어떠냐."
메마른 소리로 물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애써 평온한 낯빛을 지어 여쭙는 이기채의 안색을 청암부인은 미심쩍어 한참씩
바라보았다.
"나를 일으켜라."
뙤약볕이 정수리에 놋젓가락을 꽂는 오뉴월 염천의 한낮, 드디어 더는 참을 수
있었던 그네가 아들 이기채에게 한 마디로 명했다. 그네의 낯빛은 창호지 같았
다.
"어머니. 장정도 다니기 어려운 더위올시다. 궁금하신 일 있으면 저한테 물으시
지요. 무엇이 못 미더우십니까."
기겁을 한 이기채가 반몸을 일으키는 청암부인을 도로 눕혔다.
"내, 가서, 그 물이나 한번 시워언허게 보고 싶어 그런다. 실컷 바라보고 양껏 그
기운을 들이마시면, 내 속도 좀 뚫리고, 빼빼 마른 내 몸도 갈증이 풀릴 것 같어
서.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어."
기어이 다시 일어나 앉는 청암부인의 늙은 눈매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기
채는 그 기색에 전율을 느꼈다. 어머니가 서른아홉 그 시절을 생각하고 계시는
구나. 사위는 몸에 스스로, 힘차게 저수지를 파던 그 기를 불러들이려 하시는구
나. 그것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기채와 율촌댁이 양쪽에서 부축을 하고, 안서
방네가 양산을 받쳐든 뒤에 안서방이며 하인들이 줄줄이 따라나선 행렬은, 한
걸음 가다쉬고, 한 걸음 가다 또 쉬면서 제방에 올랐다. 순간 청암부인은 악, 아
연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은 아미 말라 쩍쩍 갈라진 저수지의 물 밑바닥
이 싯누렇게 뒤집혀 웅덩이를 이루고, 조개바위 등허리는 거무튀튀 빛 바랜 회
색으로 민둥하니 드러나, 덩그런 몸채를 헐벗은 채, 내리쪼이는 햇볕을 피하지
못해 불돌처럼 달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청암부인은 질린 낯으로 망연히 서
있더니, 무엇인가 어루만지려는 것도 같고, 아니면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것도 같
은 손짓으로 휘엇하니 허공을 한 번 젓더니, 그만 누가 떠다민 듯 그대로 쓰러
지고 말았다.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네는 말을 잃어 버렸
다. 반타작도 못했으나 가까스로 거두어 들인 작물들 중에, 제일 좋은 상등급으
로만 골라서 무엇을 좀 잡숫게 해 드리려 해도 소용이 없고, 자르르 기름이 도
는 햅쌀밥이며 담백한 미역국도 마다하였다. 그네는 시름시름 앓는 기색이 짙어
졌다.
"이제는 노환이신데, 저러다가 끝내 자리 보전하시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근심도 깊어졌다. 누렇게 바랜 안색으로 청암부인 곁에서 탕제 수발을
드는 율촌댁한테 이기채는 채근하듯, 소홀히 말라, 당부했다. 그 와중에 효원이
회임하였다. 이를 안 부인의 기쁨이라니. 병색이 완연한 청암부인의 온몸에 홀연
생기가 돌고, 누워 있는 시간보다 일어앉은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다. 눈만 뜨면
효원을 찾았다. 오로지 그네는 생의 희망으로 효원의 출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해가 바뀌었다.
"노인의 병환은 해동할 때 위험하지 않소? 각별히 유념하시구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엄동설한 겨우네 추위 속에서
도 어찌어찌 버티던 노환자들은, 오히려 날이 풀리면서 힘없이 허물어져 맥을
놓아 버리곤 했다. 마치 얼어서 단단하던 흙의 뼈가 봄 기운에 해토되면서 비글
비글해지듯이. 이개채는 그것을 염려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조상이 도우시고 하늘
이 보살피어 효원이 아들을 낳아, 온 집안에 모처럼 화기만당 훈풍이 돌았으나,
그것이 청암부인이 이승에서 누린 잠깐의 마지막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른
다. 청천벽력, 뜻밖에도 강모의 '파면' 소식을 들은 청암부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낙망하여 툭, 줄이 끊기듯 아득한 혼수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었
다. 청암부인은 홑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강모는 가슴
복판에 화살이 박히는 것 같았다. 아아, 내가 할머님을 돌아가시게 하는구나. 강
모는 청암부인의 마른 손을 쥐었다. 뼈가 잡혔다. 가냘프고 연약한 잎사귀. 바짝
말라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얼굴은, 뼈 위에 그대로 살가죽을 씌워
놓은 것이나 한가지였다. 도도록이 나온 이마와 움푹 들어가 거멓게 죽은 눈자
위, 그리고 날카롭게 솟아오른 양쪽의 광대뼈, 주머니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푸
르고 초라한 입술, 펑하니 뚫려 구멍이 들여다보이는 코. 도대체 그 어디에 부인
의 서릿발과 기품이 남아 있단 말인가. 땀에 젖은 허연 머리칼은 이상하게 섬뜩
하기조차 하였다. (허망한 인생...... 인생 백년이 풀끝에 이슬이라 하더니, 할머니
같으신 어른이 이런 모습으로......) 강모의 가슴 밑창에서 우욱, 설움과 비애가 치
밀어 올라왔다.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꽃자줏빛 옷고름을 달아 입던 청
암부인의 모습이 눈에 비칠 듯 생생하여 더욱 서러웠다. 그보다는 이미 노인만
큼이나 쇠잔해 버린 자신의 젊음이 서러웠다.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가리운 사
람들의 무게가 겨웠다. 그리고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이 서러
웠다. 청암부인이 그렇게도 자신을 짓누르는 존재였던가. 가장 무거운 그 무게가
힘없이 가벼워져 버린 헐렁한 자리에 강모는 목이 메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버
티어 그것을 견디어 보려고 했던 자리의 껍질이 터지면서 눈물이 솟구쳐 올랐
다. 심약한 사람. 그는 소리를 안 내려고 어금니를 물었다. 터져라. 차라리 터져
버려라. 창자든지 심장이든지 핏줄이든지 힘대로 터져 나가 나를 파멸시켜라. 강
모는 어금니를 맞물고 울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소행으로 할머니의 수명
을 재촉하였다는 사실이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기웃거렸다. 무섭고 두려웠다. 사
실 이기채도 강모의 파면 사건을 겉으로 표내지 않고, 어쩌든지 큰 방에만큼은
안 들리게 하려고 애썼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그 사실을 알고 말았다. 기동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의식은 희미하게 남아 잇던 청암부인은, 그 말
을 듣고는 한동안 천장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직이라..."
그 눈빛에 깊은 절망이 어리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모았다. 마치 온 몸의 남은
기력을 기어이 눈으로 모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힘이 드
는 듯 미간을 풀어 버리면서 입시울을 몇 번 움직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
이 분명하였다. 숨소리로라도 대강 짐작하여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네의 말을
이번에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율촌댁이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듯이 물었다. 청암부인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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