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의 넋이 너에게 묻어
이기채가 두드리는 놋재떨이 소리가 뙤약볕 아래 쨍쨍하게 울린다. 그것은 노
여움으로 소리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익어 터지는 햇빛 속에서 후욱 놋쇠 비
린내가 풍겨온다. 강모는 사랑채 마당에 서서 누런 얼굴로 하늘을 본다. 햇빛이
눈을 찌른다. 순간, 통증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우는 시늉이 되어 버린다.
저지난 해 여름, 강수의 넋을 혼인시키던 명혼이 있던 무렵에도 이렇게 석류껍
질 벌어지듯 쩌억 소리를 내며 햇빛이 갈라졌었지. 그 햇빛이 갈라진 자리에 캄
캄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아찔함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도 벌써 이 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다.
"아이고, 내 새끼야..."
강모가 안채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율촌댁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쏟았다. 예전의 그네 같으면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가 아직 혼인하기 전에는, 사랑채의 이기채와 큰 방의 청암부인께 문안이 끝나
야 건넌방으로 들어왔던 강모를, 조금이라도 미리 보고 싶어 장지문을 비긋이
열어 놓기도 할 정도였다.
"나는 할미고, 네 아버지는 너를 낳으신 어른이니, 인사는 언제나 사랑에 먼저
드리고 오너라."
청암부인은 강모에게 그렇게 일렀다. 그러나 율촌댁은 비록 어머니 일지라도 청
암부인 다음으로 문안을 받았다. 강모가 사랑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안
채로 건너와 큰방에 들어 있을 때가 율촌댁으로서는 가장 지루했다. 청암부인은,
강모가 아직 떡애기일 때부터 무릎에서 내려놓을 틈이 없을 만큼 가까이 두고
애중히 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어머니인 율촌댁보다 청암부인과 함께 있는 시간
이 더 많았다. 웬일인지 강모도 어머니보다 할머니와 더불어 있기를 좋아하였다.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청암부인의 앞에서 율촌댁이 강모를 귀여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만큼 그네의 마음에는 언제나 강모에 대한 아쉬움이 앙
금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잠깐씩 밖에 마주앉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율촌댁을 서
성거리게 하였다. 급하게 잠깐 본 아들의 모습이 마음의 갈피에 끼어, 몰래 꺼내
보는 옥가락지처럼 율촌댁을 설레게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치를 볼
겨를도 없었거니와 어려운 어른인 청암부인은 의식을 잃고 있으니, 좌우를 가리
지 않고 뛰어내려온 것이다.
"올라가자."
율촌댁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강모의 손을 잡아끈다. 강모는 대답이 없
다. 얼굴빛이 몰라볼 만큼 초췌하였다. 이끌리어 대청으로 올라선 강모는 율촌댁
에게 절을 한다. 둥그렇게 엎드린 뒷등이 앙상하다.
"많이 여위었구나."
절을 하고 다리를 개는 강모 옆에 바짝 다가앉아 그의 뺨을 쓸어 보는 율촌댁
은, 다시 가슴에서 치미는 울음을 못 참고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강모는 말이
없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에미한테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라."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얘기냐? 며칠 전에 수천 숙부께서 네 일로
돈 오백 원을 가지고 가셨다던네? 삼백 원은 부청에 변상허는 돈이고, 이백 원
은 무슨 교제비로 들어간다면서 가지고 가셨다. 에미가 애가 타서 입이 마르고,
잠이 안 와서, 질정을 못허고 너 오기만 기다렸단다."
반 울음 섞인 소리로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면서 더듬거리는 율촌댁은, 그런
중에도 강모의 손등을 쓸어 보며 한참씩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렇게 다 아시면서 무얼 더 알고 싶으세요?"
"그렇게만 알면 어떻게 해...? 무슨 영문인지를 알어야지."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그나마 강태가 와서 말을 해 줘서 알었지, 집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뭐
냐."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집에다 광고를 합니까."
"아, 나쁜 일일수록 집에서 먼저 알어야지 남이 먼저 알어 되겠느냐?"
강모의 일은 이미 거멍굴에까지 소문이 번져 있었다.
"네가 부청 공금을 유용했다고? 자알했다. 그래 무엇에 썼느냐? 무슨 좋은 일에
썼어? 조상의 선산 치레를 했느냐아, 집안에 논밭을 샀느냐, 입 두었다 왜 말을
못해? 아니며언, 아니며언, 무엇에다 썼느냐아."
아까, 호출을 받고 전주에서 오는 강모를 보자마자, 사랑의 이기채는 벼락같이
퇴침을 들어 내던졌다. 기표가 얼른 그의 팔목을 잡았다. 강모는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다행이었으나. 그 대신 퇴침이 위칸의 차탁자에 정통으로 맞아 와그르르
다기들이 쏟아지면서 박살이 났다. 그 소리가 안채에까지 들려, 율촌댁은 무망간
에 사랑채 마당까지 버선발로 뛰어내려갔었던 것이다.
"네 이노옴. 이노옴. 차라리 썩 나가서 죽어라. 너 같은 놈은 일찍 죽어야 다른
사람한테 덕이 된다. 내 눈앞에 보이지도 말어. 도대체 네가 이날 이때까지 똑바
르게 사람 노릇을 헌 게 무어냐, 으응? 참,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더니
이레 안에 배코를 쳐도 유분수지, 이제 귀때기 새파란 녀석이, 나이 주먹만한 것
이, 벌써부터 기생 첩질로 가산을 탕진허기 시작허네그려. 패가 망신이 다른 게
아니다. 어떤 소갈머리 없는 위인이 전답을 날리고 패가를 허는가, 내, 속으로
웃었더니 그게 바로 내 일이 되었구나. 허이구우."
"형님, 고정하십시오. 젊은 나이에 호기심도 있고 객기에 한 번."
기표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이기채는 벼락을 친다.
"뭐어? 호기시임? 무슨 호기심? 왜 여자가 어디 기방에만 있는가? 그럴작시면
장가는 왜 들어? 일구월심 저 하나를 기다리는 제 사람이 있는데, 필요허먼 집
으로 올 일이지 객기는 무슨 놈의 객기를, 부릴 데가 없어서 삼백 원씩 퍼다 바
치고 화류계 계집한테 부린단 말이야? 허허어 참, 너 객기 한 번 비싸게 부리는
구나? 으응?"
"저도 인제는 정신을 차릴 겝니다.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 테니 그만 허십시오."
"알어들어? 저놈이 알어들을 놈이야? 아니 삼백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하
는 소린가, 모르고 하는 소린가? 허나, 돈이 문제가 아니야. 기왕에 오입을 할
양이면 왜 조용히 못해? 그만한 처신도 못하는 놈이 무슨 행세를 하느냐고. 제
애비가 아들놈 오입 뒤치다꺼리를 하는 풍속이 대관절 어느 나라 풍속이란 말이
냐. 내 어쩌다가 이런 꼴을 보고 살고 있는가... 층층이 어른 모시고 사는 젊으나
젊은 놈이, 기생첩실. 맞이허느라고 공금을 삼백 원씩이나 횡령하여, 유치장에
들어가 앉어 용수를 뒤집어쓴다니, 이런 치욕이 가문의 어느 대 누구 이름에 선
례가 있단 말이야...?"
이기채는 분을 참지 못하여 얼굴빛이 노래지며 숨이 잦아든다.
"형님, 한 번 실수는 병가지 상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기왕 지나간 일이고 이
제 무마된 일입니다."
"무마? 파면이 무마야? 용수 쓰고 감옥소에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라
는 것인가?"
"그렇다는 게 아니올시다. 지나간 일보다 앞일이 걱정입니다. 강모야. 너는 어서
사죄 말씀 드리고, 안채에 가서 할머님 뵙고 어머니도 뵈어라. 그렇게 앉어만 있
지 말고."
그제서야 강모는 주춤주춤 일어섰다.
"젊은 놈 꼴 한 번 참으로 보잘 것 있게 되었구나. 아예 온 동네를 한 바퀴 휘이
돌아라. 가서 사당에 고유 참배까지 허든지. 선대에 없던 인물, 한량 종손 났다
고 고해야 헐 게 아니냐."
토방으로 내려서는 강모의 목덜미에 이기채의 조소가 꽂혔다. 목덜미의 살갗이
바늘처럼 일어섰다.
"어머니."
"오야."
"저 들어가서 할머니 뵈올랍니다."
율촌댁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지나갔다.
"물론 가서 뵈어야지. 허나 지금 네가 가도 알아보지도 못허신다. 의식이 없으신
지 여러 날째야. 저번에 강태 와서 네 소식 전허든 날 할머님이 네 말씀 들으시
고는, 그만 그 길로 혼수에 빠지셨다."
강모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니 에미랑 좀 이야기허자. 그래 그 일본 기생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이
냐?"
"어머니 아시는 대롭니다."
"에미가 무얼 알어? 에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더 아실 것 없습니다."
"에미가 모르고 누가 안단 말이냐?"
"청루의 여자는 아니예요."
"일본 사람이야?"
"조선 여자예요. 일본 요릿집에 몸을 부치고 있노라고 일본 이름을 부르고 있었
어요."
"이름이 무언데?"
"오유끼라고 합니다."
"오유끼? 무슨 뜻이냐?"
"그런 이름에 무슨 항령이 있고 뜻이 있겠어요? 그냥 부르는 거지요."
"그래, 심성은 무던허고?"
"그저 그렇지요 뭐."
율촌댁은 강모가 그렇게나마 대답을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어쩌든지 아들의
비위를 다치지 않고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그네는 더욱 더 목소리를 낮추어
온화하게 말한다.
"네 안에서 조금만 마음을 잡아 주었어도 오늘 이런 일이 생겼겠느냐? 에미는
네 심정 말 안해도 다 안다. 여자가 좀 드세야지. 단단하기 강철 같으니 어떤 남
정네가 마음을 붙이겄느냐. 그저 여자란 땅이라 하지 않드냐. 무슨 씨앗이든지
뿌리면 싹이 나고, 천지만물을 다 그 속에 품어 주는 다수운 것이 여자라야 헌
다. 네 안이 그리 못허는 것, 에미도 다 안다. 이건 여자가 도리어 남자 중에서
도 싸움터에 장수 같은 남자 성격이니..."
"저 할머니께 가 뵈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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