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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9)

카지모도 2024. 1. 26.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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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해 가학한 일이 없었다. 네가 나를 믿을는지는 모르겠

다만. 허나 이상한 일이구나. 웬일로 아무 잘못 없는 너를 그리했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받아준 다 한사람은 바로 오유끼, 너 하

나뿐이었다. 주는 시늉 하면서 갈고리로 나를 찍으려는 사람뿐인데, 애오라지 너

하나가 엉뚱한 내 갈고리에 찍혀 주었다. 내 속을 풀어 내게 해 주었다. 너는 너

를 풀어 주리라. 나한테 맞은 매를 갚아 주리라. 결국,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

이 관리하고 있던 공금을 덜어 냈다. 그래서 모찌즈끼의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번질거리는 붉은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 하였다. 삼백 원.

그리고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다. 유곽근처에서 일감을 얻어 빨래하고 옷을 지

어 주던 삯바느질 여인들이 여자 저고리 하나에 삼십 전, 치마는 육십 전을 받

고, 두루마기 하나를 짓는 데는 양단이나 합비단일 경우 삼 원이나 사 원을 받

았으니, 매일 빨래하고 매일 푸새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 이십 원을 넘기 어려운 형편인 것을 생각하면, 삼백 원이란 하늘 같은

돈이어서 오유끼는 강모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모는 오유끼를

모찌즈끼의 대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날 그네는 몹시 두려운 듯한 몸짓으

로 주춤거리며 강모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대문을 경계선

으로 그네가 한 발을 길목으로 내디뎠을 때, 강모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올가미

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색정신지 관재구설

어머니 율촌댁이 강모의 손 안에 쥐어 주던 종이 조각에 조생원의 달필이 꿈틀

거리며 음험하게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대, 그 구절이 펀듯 떠

오른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그까짓 삼백 원. 물론 삼백 원이 어찌 적

은 돈이랴. 그러나 그로서는 얼마든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자기가 관리하

고 회계하는 금액의 일부를 우선 잠시 꺼내 쓰는 것에 불과하다. 공금을 사사로

이 쓴다는 불안이나 죄의식은 없었다. 바다처럼 질펀한 논과 밭이 등뒤에 드리

워져 있는 강모가 입을 벌리기만 하면, 돌아서지도 않아서 주머니 돈을 빌려 줄

전주만 해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자마저도 재촉하지 않는다. 장부에

적어 두는 것만으로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때문이었다. 누구의 손자

인데 오죽할까. 그 말 한마디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필요 없었다. 강모는 떠오

른 글귀를 머리에서 털어 버리고 공금을 꺼내 쓴 사실도 따라서 잊어 버렸다.

훔치는 것이 아닌데 무슨 죄가 되리. 곧 귀를 맞추어 챙겨 넣으리라. 그는 방심

하였다. 거기다가 그는 남의 것과 내 것을 칼로 자른 듯 반듯하게 셈하면서 살

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말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새로 시작된 생활에 골몰하여 옆을 돌아

볼 틈이 없었다고 할까. 그는 늘, 한 발은 오유끼 바깥에 내놓고 금방이라도 빠

져 나갈 궁리를 하면서 다른 쪽 발은 늪 속에 잠긴 것처럼 점점 더 깊숙이 묶여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몸은 기우뚱 가파른 경사를 이루어 위태로웠다. 여자

가 생겨서 쓰임새가 늘어나, 필요할 때마다 변통하여 빌어 쓰는 돈은 어느 틈에

지게 짐이 되어 더욱이나 그를 기울어지게 하였다. 혼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해가 바뀌면서 노곤한 봄이 이울고, 초하의 여울이 한여름 폭염으로 고꾸

라질 때, 강모는 느닷없는 감사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공금유용"

"공금횡령"

거기에는 변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야마시따

가 어느 술자리에서 큰 소리로 농담하던 끝에 발설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는 것

이었다. 강모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다음에도 무엇 때문에 혼이 나는지 얼른 실

감이 나지 않아 의아할 정도였다. 그는 구속되었다. 그리고 파면되었다. 접에는

절대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강모를 대신하여 결국, 강태가 나선 긴급한 연락

을 받고는, 그 길로 선걸음에 달려온 기표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그를

끄집어내 주었다.

"하필이면 천하에 어디 계집이 없어서 그런 요물한테 잡어먹힌단 말이냐. 남자

일신 망신하고 패가허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무엇이든 요령껏 다루고 거느리고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냐?"

쩟. 기표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얼굴에 모멸의 빛이 역력했다.

"여자한테 잘못 물리면 그 못된 아가리는 사람도 삼키고 집채도 삼키고, 남자의

한평생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둘러 삼키는 법이다. 계집을 다루는 데도 요령이

있어야지. 이번 일은 각골 명심해라."

아까 골목 어귀에서 기표는 다시 한번 오금을 박았다.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이고 서서 아직도 온 정신이 안 돌아와 하깨 비처럼 넋을 놓고 서 있는 강모에

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러고오, 할머님이 위독허시다. 오늘 내일을 기약 못허는 형편이야. 내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집에 가서 허기로 허고, 내일 새벽 첫차로 같이 가자. 이번 기회에

부청이고 뭐고 다 깨끗이 청산허고, 집에 가서 아버님 일이나 마음잡고 착실히

보아 드려라. 아버님도 경황 중에 득병을 하셔서, 이거 까딱하면 쌍초상 나게 생

겼다. 기왕지사 한번 지나간 일은 그렇다고 허고, 뒷수습을 잘해 놓았으니 마음

잡고 이제부텀이라도 착실허게 살면 되지. 내일 새벽에 내가 이리로 오겠다."

강모는 물끄러미 검은 냇물만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부연 먼지가 날아앉아 모

든 것은 그 형체가 분명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암담하였다.

"재가 정거장으로 나가지요. 여기까지 오실 거 없습니다."

그러나 기표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다. 내가 오겠다."

그리고 기표는 힐끗 강모가 살고 있는 골목 어귀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엉긴 그

어귀에는 아까부터 사람의 흰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오유

끼였다. 크으 어흐음. 마치 침을 뱉기라도 하는 것 같은 큰 기침 소리를 남기고

기표는 갔다. 기표가 사라져간 다음에도 한동안 오유끼와 강모는 각각 그 자리

에 붙박인 채 옴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강모는 유치장에서 열하루

만에 풀려 나왔던 것이다. 어둠은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침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각질로 굳어지는 침묵을 부수지 못하고, 강모는 방천에 쭈그리고 앉았

다. 그리고 여전히 냇물만을 내려다보았다. 오유끼는 강모가 돌아오지 않던 날로

부터 밤마다 골목 어귀에 나와서 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막상 돌아

온 그의 곁으로 오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그림자처럼 서 있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러나 강모는 오유끼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

고 여지껏 이렇게 밤 냇물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들어가자." 강모는 방

천에서 일어선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오유끼도 따라 일어서며 강모의 바지를

털어 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 구부린 오유끼의 등허리가 여위어 보인다. 어둠 속

에서는 그래도 잘 모르겠더니 방안의 불빛 아래 드러난 강모의 얼굴은 누렇고

초췌하다. 부스스 일어선 머리카락이 땀과 먼지에 엉켜 부옇게 보이고, 그의 뒤

통수에는 새집마저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불안하고 외롭다. 강모는 오유끼가

떠온 냉수를 벌컥벌컥, 소리가 나게 마신다. 오유끼는 조심스럽게 강모의 안색을

살핀다. 아까부터 감히 입을 못 여는 것이다. 그만큼 강모의 얼굴은 차갑고 초췌

하여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처럼 그네의 귀에는 추운 솜털이

허옇게 일어선다.

"수천 숙부님은 내려가셨어요?"

강모가 내미는 물대접을 받으며, 오유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듯 묻는다.

"아니, 내일 새벽에 이리로 오신댔다."

"저..."

오유끼가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며 강모 곁에 앉는다. 강

모는 오유끼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왜...라고 묻고 있었다. 순간 오유끼는 대접

을 내던지고 강모의 목을 휘감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몹시 북받치는 서러운 울

음이었다.

"왜 그래...? 왜 울어, 오유끼?"

그러나 오유끼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더욱 조이며 흐느낀다. 강모는 엉겁결에

오유끼의 팔목을 풀어 내려고 하였다. 그럴수록 그네의 팔은 동아줄처럼 질기게

또아리를 감는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순간, 강모의 몸에서는 공포에 가까운 소름이 일었다. 그는, 살갗을 찬 손으로

씻어내리는 소름을 털어 내지 못하였다. 오유끼의 땀에 젖은 손바닥이 강모의

입술을 더듬어 찾는다.

"그렇지요?"

마치 말이 없는 그의 입술에서 손끝으로 대답을 읽어 내리는 것 같았다. 강모의

입술은 나무조각처럼 단단하고 메말라 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언제고 당신이 나를 버릴 것이라고요... 나는 ... 아무것도

아닌 여자거든요... 당신을 만났을 때는 몸도 깨끗하지 못했어요... 나는 늘 그것

이 부끄러웠어요... 지울 수 없어서 더 그랬어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버리

실 거지요?"

그러나 강모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한참만에야 겨우

"어린애 같기는."

하고 간신히 밀어내어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유끼는 그렇게도 정신없이 가구를 사들였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다가정으로 함께 온 이후에 일어난 오유끼의 변신이었다. 처음의 그

녀는 의외에도 단순하고 검소하였다. 그래서

"우리, 날 풀리거든 다가봉 기슭에 움막이든지 초막이든지 하나 구해서 얻어 살

자."

하고 강모가 이야기했을 때, 오유끼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심정 같아서는 비록 겨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집을 구하고 싶었다. 오는 이, 가

는 이도 없는 산기슭에 풀잎으로 지붕을 엮은 한 칸 띠집을 짓고 아랫목이 따끈

하게 군불을 때면, 갈자리 방바닥에서 따뜻한 흙냄새가 피어오른다. 이따금 귀를

기울이면 골짝기를 피리 삼아 불고 가는 바람 소리. 얼어붙은 용소의 빙판에 미

끄러지는 눈보라의 경쾌한 몸짓은 또 얼마나 보기 좋은 것이다. 그리고 몸에서

갓 피어난 연기 냄새를 풍기며 안겨 오는, 아무 욕심없는 어린 여자와 어울려

꽃잎처럼 희롱하는 아늑한 평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을 보낸다

는 것. 강모는 오유끼에게서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즐거움을 얻고자 하였다. 또

한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얼음이 녹은 냇물에 발을 잠그고, 청류벽 저쪽 숲정

이에서 불어오는 꽃바람을 들이켜리라. 여름에는 캄캄한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

는 밤, 시원하고 감미로운 용소의 물살에 몸을 잠그고, 하늘의 달빛보다 요요한

인광을 번뜩이며 자멱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봄 가뭄

이 길어지면서 냇물이 마르기 시작하고 부연 황사가 하늘을 메웠다. 다가봉의

육도목은 나무의 크기와 굵기가 몇 십 년, 몇 백 년을 넘는 것이었건만, 벼랑에

선 채로 말라 죽어 갔다. 그 잎사귀나 가지 줄기들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감나무

로 속아 넘어가기 알맞았는데 그것은 입하 무렵이면 하얗게 피어났다. 벼랑으로

쏟아지는, 실로 낭자한 신록을 뒤덮는 육도화는 흡사 백설 같은데, 그 품의 높고

맑고 깨끗한 향기와 더불어 반공을 휘황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여름에는 이상

하게도 빛 바랜 누르께한 꽃잎을 날리다가 말았다. 어른들은 누런 다가봉을 바

라보며

"무슨 변이 나도 날 것이다."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메마른 암벽이 돌가루를 부스러뜨리고 육도목은

누렇게 시들어 병색이 짙은데다가 냇물마저 바닥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심지어는 용소의 물굽이조차도 기세가 잦아들어 물 밑바닥에 잠겨 있는 거북바

위의 검은 등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강모는 뙤약볕 아래 빠작빠작 말라드는 용

소의 물을 내려다보며 피할 길 없는 예감을 느꼈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오유끼는 강모의 목을 감은 채,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묻는다. 강

모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끈끈하게 땀이 배어난 그녀의 몸뚱이가 차갑

게 느껴진다. 섬찟, 손목에 와서 닿던 수갑의 금속성이, 그 감촉이 되살아나서

그는 소름을 털어내듯 오유끼의 팔을 풀었다. 오유끼는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몸

을 동그랗게 꼬부려 버린다. 사람의 손가락이 닿은 배추벌레처럼. 그리고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오유끼가 사들인 오동 기름을 먹인 화각장과 사방탁자, 의걸이

장 들이 불빛에 번들거린다. 강모의 눈에는 그것들도 금속성으로 보인다. 그는,

손목에 남아 있는 수갑의 차디찬 감촉을 거기서도 느낀다. 울고 있는 오유끼에

게서도, 쩟, 입맛을 다시던 기표에게서도 그것은 느껴진다. 여름밤의 무거운 더

위마저도 그는 시리기만 하다. 덜커덕, 철창을 잠그던 자물쇠 소리. 그 무거운

쇠통 소리. 써늘하게 가슴 살에 와서 닿던 그 소리. 그 소리를 속 시원하게 지워

줄 용소의 소용돌이는, 이미 물줄기가 잦아들어 바닥을 드러낸 메마른 입술로,

빠작빠작 타들어가는 제 가슴을 밤이 겹도록 깎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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