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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33)

카지모도 2024. 2. 1.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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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서방님."

전보지를 구겨쥔 채 깜박 잠든 강모는 꿈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새서방님."

그 소리는 좀더 가까이 귀밑에서 들린다. 안서방이다.

"?"

강모는 말없이 안서방을 돌아본다. 안서방은 조심스럽고 죄송한 몸짓으로 두 손

을 비비고 서서 강모의 기색을 살핀다.

"저... 큰마님께서 지달리시는다요."

"알았네."

"대청에 지시는구만요."

"응."

"아까막새부텀..."

강모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안서방은 말끝을 흐리면서 재촉을 덧붙인다.

강모는 마지못한 듯 몸을 돌려 안채 쪽으로 발을 옮긴다. 꿈속이라서 그랬을까.

할머니 청암부인은 평소의 정정한 근력으로 허리를 세운 모습이었다. 대청에서

는 무릎에 갓난아이를 안은 그네가 흰 모시옷을 입고 안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

은 채 강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모의 눈에 붉은 아이가 들어온다. 싯벌겋게 보

인다.

"어서 오너라, 애비야."

강모는 다시 한번 쇳덩어리를 삼킨 듯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청암부인의

얼굴을 피한다. 그것보다는 그네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모처럼 만난 강모에 대한 반가움과 대

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꼬막조개 같은 하얀 주먹으로 눈을 비비는

어린 증손 철재의 등을 다독거리던 그네는

"아가, 애비 왔다."

하고 정말 아이가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너 애비 보고 싶었지? 제가 이만큼 자랐습니다, 하고 뵈어 드리고 싶었지? 아

이구, 내 새끼, 오냐, 오냐, 이 할미가 너를 애비한테 문안드려 주마."

청암부인은 고개를 외로 돌리고 앉아 있는 강모를 향하여 웃어 보인다. 그러더

니 안고 있던 어린 것을 번쩍 들어올려 강모에게 안겨 준다. 물컹. 살덩어리가

강모의 무릎에 안겨오자 강모는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엉겁결에 어린

것의 몸뚱이를 받아 안은 강모의 두 손이 경직되며, 아이를 밀어낸다.

"좀 들여다봐라. 어찌 그리도 신통하게 보면 볼수록 애비를 닮았는지, 할미는 아

주 너를 새로 키우는 심정이란다. 생각사록 천지신명과 조상의 음덕에 감축 감

읍할 일이 아니냐? 너도 객지에서 공부하느라고 고생이 많었지. 네 안도 층층시

하에 시집 살고, 오뉴월 복더위에 애기 키우노라 고생이 많다. 이따가 네가 위로

도 좀 해 주고 그래라. 그저 여자란 남편 말 한 마디가 녹용 보약보단 낫느니

라."

강모는 대답이 없다. 눅눅한 더운 공기가 대청을 누른다. 무릎에 안긴 어린 것은

아무래도 품이 낯설고 불편한지 자꾸만 고무락거린다. 그 감촉이 살갗에 스멀거

린다. 그때 아기가 영문 모를 소리를 어, 어, 내면서 제 아비의 목에 팔을 휘감

는다. ... 아아, 올가미. 강모는 목에 찰싹 감긴 어린 팔을 풀어내려고 손을 올린

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구렁이같이 칭칭 감긴다. 숨이 막힌다. 헉. 그

꿈은 그러다가 깨어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꿈에서 깬 강모의 심정은 더욱

더 암담하게 어두워졌지만 그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생시처럼 아이를

둘러싸고 앉은 율촌댁, 이기채, 청암부인의 노안이 차례로 겹치면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효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별안간

강모는 가슴을 깨물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이빨 하나가 가슴에 박힌 것

같은 얼얼하고도 깊은 아픔이었다. 강모는 지금 모처럼만에 의식이 돌아온 청암

부인을 바라보면서, 그 때의 꿈과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청암부인의

병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던 것은 재작년 겨울이었다. 보통 노인들이 실섭을 하

면 호된 추위와 바람 때문에 겨울에 더욱 힘이 들어지는 법이언만, 그네의 겨우

에는 달랐다.

"어서어서 봄이 와야지. 그래야 여름이 오느니."

그 봄과 여름이란, 이제 태어날 어린아이가 먹고 크는 세월이었다. 얼마나 대견

하고 거룩한 낮과 밤인가. 이 낮과 밤의 시간이 흐르고 해와 달이 바뀌는 순리

를 따르면 이 집안에 새 생명이 난다. 청암부인은 자신이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온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 손부 효원의 심정이 짓눌릴 것을 염려하였다. 청암부

인은 마치 효원의 태교를 대신하려는 것처럼, 스스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온몸의 힘을 있는 대로 모았다. 얼굴도 찌푸리지 않았으며, 병색으로 누렇게 바

랜 낯을 아침 저녁 깨끗이 소세하여, 머리 빗고,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어지

간만 하면 자리에 눕지 않고 꼿꼿이 앉아, 오로지 생남 순산을 빌었다. 그러다가

태어난 증손이었다. 작년 오월 십칠일, 오시. 한낮의 한가운데 하이얀 햇볕의 폭

을 가르며, 응아아아, 갓태어난 어린 것의 울음 소리가 터질 때, 청암부인은 소

리 없이 낙루하였다. 아, 저 소리. 내가 한세상을 기다려 온 소리. 이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가장 힘 있는 소리. 청암부인은 밤이 허옇게 새어 버릴 때까지 잠

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움직일 수가 없는 손부가 바람을 쐬면 안되는지라, 아

기를 보고 싶은 그네는 대청마루를 건너 건넌방으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열이

었다. 건넌방 안에서는 급히 일어서는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아

직 한여름은 아니라도 벌서 후텁지근한 여름 기운을 머금고 있는 날씨라 웬만하

면 장지문 정도는 열어 둘 만한데, 방안에는 더운 김이 차 있다. 이제 겨우 세이

레를 넘긴 어린아이 때문이었다. 아이의 희고 둥근 얼굴에 복숭아 꽃빛이 발그

레 물들어 있다. 새액색 숨소리가 고른데, 명주 이불 바깥으로 고사리 같은 주먹

을 앙징스럽게 쥔 손이 나와 있다. 청암부인의 얼굴에 일순 환한 웃음이 떠오르

며 한숨이 새어 나온다. 효원은 청암부인이 앉기를 기다려 웃목에 서서 아이를

내려다본다.

"앉아라."

부인은 효원에게 손짓을 하며 아이의 옆에 앉는다. 보면 볼수록 영락없는 고사

리 같기만 하고 앙징스럽다. 청암부인의 엄지손가락만큼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주먹은, 손가락들이 안으로 도르르 말려 있었다. 거기다 어쩌면 그렇게 눈

꼽만큼씩한 손톱은 또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생겨 나 있는지. 그 비늘같이 얇고

조그만 손톱에 분홍빛이 돌고 있다. 그것도 손가락이라고 마디가 다 있다. 마디

에는 자잘한 주름까지 잡혀 있다. 하나하나 세어 보고 싶을 지경으로 그 마디들

은 재미있고 귀엽다. 잠들어 있지만 않다면 단풍의 어린 잎사귀 같은 이 손바닥

의 손금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으련만, 청암부인은 바람이 일지 않게 가만히 이

불자락을 들어올려 조그만 발을 본다. 완두콩 같은 발가락들이 조르르 달려있는

것을 보던 청암부인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가, 신기하지 않으냐? 이 모습이 얼마나 어여쁘냐. 참으로 신비하지? 어디서

왔을꼬...?"

조금전 창씨 문제로 큰방에서 이기채 형제와 나누었던 무거운 이야기들이 순식

간에 잊혀지고 어린 증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청암부인은 속으로, 이 증손이

어떤 증손이냐, 싶은 생각이 사무쳐 왔다.

"이 귀한 내 손자한테 왜 이씨 성을 못 붙인단 말이냐. 이 할미가 꼭 그것만은

지켜줄 테다. 아무도 네 성은 못 뺏어간다."

청암부인은 잠든 아기의 작은 주먹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며, 주름진 늙은

뺨을 꽃잎같이 보드라운 어린 뺨에 가만히 대 보았다.

"네가 네 성은 꼭 다시 찾아 줄 것이다."

그러는 청암부인의 모습을 효원은 말없이 바라본다. 아들 철재가 잠들어 있을

때를 빼고는, 청암부인이 그 무릎에서 아기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효원으로서

는 감히 언제 아기와 방긋거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

히려 마음이 놓이고 청암부인과 자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맥이 서로 따뜻하게

흘러드는 것을 느낀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집안의 줄기를 잇는

한 마디라고 하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

이었다. 생각할수록 꿈 같은 아들 철재의 고물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을 통하여

얻는 뿌듯함과는 상관없이, 이 어린 것의 아비인 강모에 대해서는 차가운 치욕

의 감정을 지워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부부가 혼인하여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어버이로 변하는 것이언만,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철재의 탄생은 뜻밖이었다. 지

난 경진년 여름, 괭괭거리는 삼경의 징소리와 독경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밤,

남편 강모는 느닷없이 벌컥 장지문을 열어젖혔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무엇에

쫓기는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성난 짐승과도 같았었다. 때가 여름인지라 몹시

무더웠었다. 방안에 고인 등장 불빛마저도 더운 김이 더하여 살갗에 감겨드는

것이 끕끕하게 여겨졌었다. (무슨 풀지 못할 심정으로 사무쳤기에 젊은 나이에

사람이 상사로 죽어간단 말인가. 아무리 정애가 깊다기로 목숨이 빠질까. 한번

죽어버린 사람을 위해서 넋을 불러 굿을 하고 혼례를 시키는 것도 헛짓이려니

와, 되지도 않을 일에 뜻을 두고 괴로워하는 그 시초부터가 잘못이라. 사리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살 궁리를 해야지, 죽기로 작정을 하다니. 어리석은 일이다.) 효

원은, 자신이 시집도 오기 전에 세상을 버린 한 총각의 혼백을 두고 혀를 찼다.

(애초에 세상살이 견디기 쉬운 것이었다면, 부처님은 무엇 하러 왕궁을 버리고

얼음 골짜기에서 뼈를 깎었으리. 오죽하면 인생은 고해라 하지 않던가. 사람마다

남 보기는 호강스러워도 저 혼자 앉아 있을 때의 근심고초란 짐작도 못하는 법.

어떻게든지 그것을 이겨내고 버티면서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타고난 본능만은 아니지. 그것은 일이야. 일이고말고. 살아도 그만 안살아도 그

만일 수는 없지. 뜻한 것이 이루어지고 재미있고 좋아서만 사는 것이랴. 고비고

비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며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밤새도록

그칠 것 같지 않은 굿의 중허리가 휘어지는 소리에 심중이 어수선하여 일손도

더디었다. 본디 여름에는 손에 땀이 나서 침선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날마다 벗어

내놓는 삼베 모시의 푸새거리를 다듬고 밟고 다리는 것이 큰일이었다. 효원은

청암부인의 옷가지를 접어 개키는 중이라서 더욱 그렇게 산란하였는지도 모른

다. 날마다 흥건하게 젖어 나오는 적삼과 단속곳들이 부인의 허약해진 기력을

대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손을 베게 날이 선 치마 저고리를 날아가게 입고

앉아 있던 부인이, 더위와 식은땀에 후줄근히 녹아 내리는 모습을 그네는 의복

에서 느끼는 것이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셔야 할텐데.) 효원은 이미 불이 꺼

진 큰방 쪽에 마음을 기울이며 적삼의 솔기를 손톱으로 눌러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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