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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32)

카지모도 2024. 1. 31.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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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번에는 이기채가 불렀다. 그네의 입모양이 둥그런 시늉을 했다.

"어머님이 강모 찾으시는 거 아닐까요?"

율촌댁이 이기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이, 강모 찾으십니까?"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끄덕이는 시늉이라고 해야 했다. 이기채는 잠시 망연하여 율촌댁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청암부인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그네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리고 만 뒤였다.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리오. 한낱 나무토막이나 검

불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청암부인은 이따금 몇 차례 아주 한순

간이나마 눈을 뜨기도 하고, 한번은 이기채와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

러나, 이윽고 곧 혼수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지금, 강모의 울음 소리 때문이었을

까. 청암부인의 눈꺼풀이 실처럼 열렸다. 그리고 한동안 혼곤하여 있었으나, 울

고 있는 것이 강모인 것도 힘겹게 알아보았다.

"...아가... 강모야."

몇 번인가 그네는 강모를 불렀지만 강모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청암부인

은 가까스로 손을 뻗쳐 강모의 무릎 위에 얹었다. 그제서야 강모는 놀랐다.

"할머니."

청암부인의 손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잡으며 강모는 그네의 얼굴 가까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저 알어보시겠어요...?"

청암부인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는 시늉을 하였는데, 그것은

우는 것처럼 찡그려져 보였다.

"할머니."

강모는 무슨 말이 나오지를 않아 청암부인의 손을 감싸 움켜쥐며, 목쉬어 갈라

진 소리로 할머니만을 부를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자기를 알아보는 할

머니의 흐린 눈빛 속에 자신의 어둠을 반이나 덜어 넣어 버린 것 같은 안도의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따스함이었다. 할머니와 손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 아가..."

"예, 할머니,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청암부인은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눈귀에 번지는 물기는 노안의 언저리를 적신

다.

"네 아들... 보았어?"

강모는 엉겁결에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사랑채에서 이기채가 벽력같

이 지르던 소리가 되살아나 들리는 것을 지우지 못한다.

"네 이 천하에 막된 놈, 네 놈이 대체 사람이냐? 사내놈이 제 몸뚱이 간수 하나

를 제대로 못하고, 집구석 하나도 평온허게 못 다스리고서는, 뭘 하겠다고 낯바

닥을 치켜들고 나서는 게야. 뭘 하겠다고."

강모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

른 뜨거운 기운을 삼킨다. ...너도 이놈 이제는 애비가 아니냐, 너를 보고 애비라

고... 애비... 라고 부르는 어린 것이... 이 집안에 기어다니고 있는데. 그 말을 들

으면서 강모는 어금니 사이에 수치심이 깨물리는 것을 느꼈었다. 그것을 참느라

고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니 턱이 실룩거려지고,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핏

발이 일어섰었다. ...애비? ... 허어... 애비라고. 자신이 한 어린 것의 애비라고 하

는 사실이 일깨워지자 덜커덕, 덜미가 잡히는 듯하던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 그

부담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강모는 이기채의 앞인데도 오르르 몸을 떨고 말

았다.

"오월 열이레 순산 득남."

그 전보를 받은 것은 작년, 신사년 초여름이었다. 때는 중하의 절기로 망종도 지

나고 하지를 바라보면서 더위가 땀을 흘리게 하는 반공일의 한나절이었다. 음력

으로는 아직 오월이었지만 양력은 이미 유월 중순을 넘어섰으니, 더위도 점차

약이 차 오르는 날씨였다. 이마 테를 조이면서 머리 속을 후끈후끈하게 하는 맥

고모자를 벗어 내던지며 막 땀을 닦으려는데 하숙의 부인이 강모를 불렀다. 강

모는 아직도, 입학할 때 짐을 풀었던 청수정의 하숙에 그대로 있었다. 졸업을 하

고 부청에 취직을 하였으나 굳이 그런 이유로 다른 곳에 방을 정할 필요가 없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숙의 부인은 이미 오랜 세월 강모와는 무관하여지고 익숙

해졌다. 뿐만 아니라 보호자처럼 강모를 돌보아 주었다. 어느 때는 보호가 지나

쳐서 성가시게 간섭을 하기까지도 했지만, 강모 역시 그런 것을 언짢게 생각하

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말끝에

"우리 강모."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들어왔소?"

하숙의 부인이, 막 윗도리를 벗고 있는 강모를 부르며 강모의 방문앞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아, 예."

강모가 벗기던 단추를 다시 주춤주춤 채우고는 부인을 돌아보자, 그네는 함빡

웃음을 띄우면서 전보 용지를 내밀었다.

"얼마나 좋겠소... 순산에다 득남이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수."

하숙의 부인이 전보 용지를 먼저 펴 본 모양이었다. 강모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

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그, 저 부끄워하는 것 좀 보시지. 턱밑에 수염이 검실거리는데 애기 아부지

된 게 무에 그리 부끄럽누? 더구나 종갓댁 종손에 이대독잔데, 거기다가 터억

아들을 낳아 놨으니, 동네방네 소문 내고 꽹과리를 칠 일이지. 안 그러우? 아들

은 무어 아무나 낳는 줄 알아?"

강모는 제발 부인이 방문을 닫아 주었으면 싶었으나, 하숙의 부인은 그네대로

신통하고 재미가 나서 자꾸만 킥킥, 웃으며 강모를 놀리는 것이었다.

"아이그으, 첨에 우리집 대문간에 책보따리 지고 들어올 때는 애기되렌님, 코밑

에 복숭아털이 보오얗드니만,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화살같이 지내가서 새서방

님 되시고, 인제는 애기 아부지가 되셨으니, 아 이게 어디 남 일 같어야지. 내가

다 신바람이 나고, 우리 손자 본 것 같드라고. 아까 전보를 척 받는데 이건 내

짐작이 틀림없드라니까. 그래서 내 오늘 저녁은 일부러 색다른 반찬을 좀 장만

했다우."

강모는 뒷목이 뜨끈해졌다. 그리고 온몸의 털이 거꾸로 거슬러 서는 심한 수치

심을 느꼈다. 그것은 자기의 성에 대한 미묘한 껄끄러움이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 소년기를 벗지 못한 채 청년기로 접어드는, 한 남자의 어중간한 수줍

음과 어색함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일종의 자기 혐오라고나 할까. 이

미 중년을 넘어선 여자가 무엇인가를 넘겨다보는 듯한 시선을 그 눈꼬리에 묻히

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이 아버지', '아들'과 같은 말들을

떠들고 있을 때, 강모는 구겨쥔 전보 용지를 그네의 면상에 내던지고 싶은 심정

마저도 치밀었다. 그네의 목소리는 끈적끈적하게 강모의 목에 감겼다. ...꼼짝없

이 올가미를 쓰고 말았구나. 그런데 왜 그 순간에 강실이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

이었다. 선연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금방 지워질 듯 그네는 돌아서고 있었다. 그

때, 어둠에 먹히어 그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본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에서는 아슴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지. 등롱을 든 강실이는 어둠

이었던가. 그 어둠이 홀로 밝혀 든 등롱의 그 아슴하던 불빛은 강모의 눈언저리

에 그대로 젖어들었다. 그는 불빛이 몸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혼곤한 잠

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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