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산의 생살이 무참히 벌어지고, 어둠은 그
틈바구니 속으로 소금같이 저며들었다.
어디에 원정을 하랴.
종횡으로 날리며 온몸에 먹금을 긋는 바람의 칼날 어디에도, 이른 봄 연하게
눈 뜨는 풀잎을 어루어 쓰다듬던 훈기는 묻어 있지 않았고, 산 또한, 하늘로
머리를 솟구쳐 검푸르게 두른 소나무 둥치 아래 자잘히 피었다 지던 풀꽃이나
산나리, 오보록한 송이버섯들을 다 벗어내 버린 맨살로, 속수무책 내리치는
난자의 칼날을 받으며 잠자코 캄캄하게 어두워질 뿐.
한여름 중천에 놋뙤약볕 풀무같이 이글거릴 때, 달구어진 땅 위로 솟아올라
한 모금 서늘한 약수를 마시게 해 주던 호성암의 작은 샘, 헉헉 지열을 토해 내는
더운 숨을 쾌연하게 씻어 내려 흐르던 계곡의 물살이며, 그 물살이 굽이를
틀다가 베폭같이 쏟아지던 폭포도 지금은 얼어붙어, 진군하는 이 어둠을
달래거나 쓸어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제 살속 깊이 동상으로 허옇게 박혀
버리니.
봄날의 새암과 여름날의 물살이 없었더라면 이 한겨울 삼동의 핏줄에 시린
얼음 박히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인가.
내리치는 칼날에 죽지를 맞은 노적봉은 상처로 먹물 드는 어둠을 피하지
못하고 차라리 웅크리어 보듬으면서 멍든 바람 소리로 울었다.
어우우우웅.
날선 어둠은 가차없이 그 울음을 잘라 버리고, 잘린 울음은 먹피로 무릎에
떨어져 흥건하니, 너적봉의 어둠은 그만큼 더 빨리 깊어졌다.
어둠의 서슬은 하늘도 잿빛으로 질리게 하는데, 발도 없는 노적봉 몸뚱이
하나로야 어찌 당해 낼 수 있으리, 그저 다만 더 이상 찌를 곳도, 자를 곳도,
베일 곳도 없을 만큼 온몸이 어듬에 난자되는 수밖에.
드디어 그는 먹장같이 무겁게 어두워졌다.
밤이 깊어진 것이다.
이제 노적봉은 어둠을 피하지도,울지도 않고,오직 묵적으로 캄캄하게 앉아,
밤에 이르러, 아직도 이 산을 겨누던 어둠은, 어느결에 저보다 더 어두워진
노적봉에 부딪쳐 그만 곤두박질의 허리, 밤의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밤 중의 밤, 자시치고, 산은 제품에 넘어진 어둠을 내치지않았다. 오히려
받아 안았다. 그리고 빙렬로 벌어진 칼자국마다 저미어 스며드는 어둠을 보다
더 깊은 몸속으로 빨아들여 그 살의 갈라진 상처를 메인다.
이제 어둠은 칼날이 아니라 검은 아교였다.
온 밤내 어둠에 베인 자리를 더 큰 어둠이 되어 어둠으로 아물리고 있는
노적봉은, 이윽고 어둠의 어미처럼, 저를 치던 어둠을 크게 품어안고 의연히
재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은, 처음에는 검푸르게 번뜩이는 날을 휘둘러 산을
베었지만, 제가 벤 그 자리로 소리 없이 흡입되어 안겨 버렸다. 그래서 어둠이
노적봉을 찌르고 벨수록 노적봉은 그 어둠보다 더 크고 깊어지니, 검은 파도
물마루 같은 이 산 앞에 어둠은 드디어 칼을 놓는다. 귀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령처럼 허공에 떠돌던 어둠조차 자력에 이끌린 듯 이 산으로 딸려들어
깃을 내린다.
이렇게 차 오르고 쌓인 어둠이 목까지 밀리어, 더는 어찌할 수 없는 허리를
캄캄하게 곧추세우고 있던 노적봉은 그만,
후우.
겨운 한숨에, 섣달 그믐밤의 한천을 낮게 가리운 구름이 옆으로 밀리면서,
어두운 막 뒤에 숨아 있던 별빛 몇 개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어두울 대로 어두워진 어둠이 절정에 이르러 허리가 휘이며 자시가 기울고,
천지는 시간의 자리를 바꾸려 하는 것이다.
"자시란, 날과 날의 경계에 선 어둠의 극이지만, 또 어젯날은 가고 새날은
아직 안 온 교차 영송의 시간이기도 한것이니라. 기운이 바뀌는 것이지. 그것이
어찌 하룻날의 시간에만 있는 일이겠느냐. 한 달에도 있고, 일년에도 있느니.
가령 한 달을 두고 본다면 초하루 그믐이 그 시간이고, 일년을 두고 본다면
동지가 바로 그 시간이다. 왜냐, 그믐밤과 초하루 사이의 자시에는 하늘의 달과
해가 서로 딱 합허게 되니, 합삭아니냐. 해는 위에 떠 있고 달은 밑에 떠, 그
태양 광선에 눌려 태음이 전혀 빛을 못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때다. 하여,
달빛이 없지. 빛을 가두어 버리니까. 그래서 한 달 중에 가장 큰 어둠이 천지를
지배하고 극성한 시간이 이때인 게다. 허나 이 시간을 고비로 정점에 오른
어둠은 기울기 시작하고 달빛은 싸래기만큼씩 길어 나게 된다.
이때로부터 어제의 달은 지나가고 새달이 되는 것이야.
이러한 이치를 일년 가운데 찾아본다면 동지 절서라. 동지라면 너도 아다시피
일년 중에 밤이, 어둠이 제일 긴 날 아니냐. 태양은 땅에서 가장 멀어져
냉천이고, 이 엄동설한 찬 기운에 삼라만상이 꽁꽁 얼어붙어 녹을 줄을
모르는데, 거기다 밤은 질기게 길어, 천지의 기운이 자시.합삭에 이른 것이
동지다. 허나, 이 동지에, 지나간 기운이 다하고 새 기운이 들어오는, 금년과
명년의 교차가 이루어지니, 동짓날을 지나면 새해로 보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게야. 묵은 어둠이 제 양을 다하고 조금씩 스러져 물러가기 시작하는 때인
때문이다. 바로 이 동지를 고비로 묵은 기운, 추운 기운, 어두운 기운이 쇠하기
시작하면서 대신 새 기운, 다순 기운, 밝은 기운이 싹을 틔우거든. 그래서
동짓달 지나 오는 섣달은 자월이라 하는 게다. 자.축.인.묘의 자. 십이지의 첫
글자를 일년의 끝달에 붙여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시가 지났다고 한순간에 해가 뜨지는 않으며, 그믐이 지났다고
초하루부터 달이 둥글어지는 것은 아니듯이, 동지가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오랫동안 밤은 낮보다 길지만, 이미 어둠의 기운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줄어가고, 새로 태동하는 광명의 기운은 아직 비록 발아에 불과할지라도 점점
자라나는 것이니.
얼마 가지 않아 수가 차면 이윽고 가장 길었던 어둠을 가장 짧게 만드는 날에
이르게 되리다.
그런 날을 보자면, 어둠을 지그시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다가오는 광명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기다릴 줄은 모르면서 오직 참기만 한다면 터지기
쉬운 것이요, 또 참기는 하지만 기다리는 것이 없다면 그 합벽을 하게 암담한
나날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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