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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

카지모도 2024. 6. 30.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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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천리가 이럴진데, 한 나라의 운명이나 사람의 일생도 이에서 다를 것이

없을게다.

그래서 천자문 뒤풀이에도 자시생천 하늘 천, 축시생지 따 지, 인기인 사람

인, 하지 않으냐. 자시에는 태양이 땅밑에 드니 만물이 어두워 오직 하늘만이

운행하고, 축시에는 동쪽으로 당겨 가니 동방이 벌어져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인시에는 더 밝은 기운이 터올라 날이 새는지라, 날 새면 자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므로, 인시부터는 사람의 시간이라 하는

것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사람이 세상을 주재하는 그 인시에 이르도록까지는

여전히 어둠의 새상이라.

그러니 사람도 그 동안만은 세상을 어둠한테 내주고 죽은 둣이 자지 않느냐.

그것이 순리니라.

물론 이와는 반대로 하루에 태양이 가장 밝아 온 천지에 어두운 곳이 없이

쨍쨍한 오시가 있고, 한 달에는 보름이 있어 어디 하나 이지러진 데 없이

둥글게 큰 빛을 온전히 발하는 망월이 있고, 한해에는 일년 중에 낮이 제일 긴

하지가 있느니.

허나 이것들이 시간의 자리를 바꾸는 원리는 자시.초하루.동지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엄연한 질서 속에서, 안 보이는 천지의 내부 기운은 이미 동지에

한온.명암.신구를 서로 교처했지마는, 보이는 현실 생활 습속으로는 섣달

그믐날과 정원 초하루에 금년과 명년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지."

이제 막 자시가 지났으니 젓달 그믐 어제가 아니요 오늘이며, 작년이 아니라

새해, 갑신년 머리에 앉은 이기태는 전에 없이 큰사랑으로 부른 며느리

효원에게 무거운 입을 열어 한 마디씩 말하였다.

"그것이 어찌 천지 운행에만 한하는 말이겠느냐. 한 나라의 흥망과 성쇠도

이와 같고, 한 가문의 흥왕.쇠미도 이와 똑같은 것이며, 한 인간의 일생에도

이런 원리는 적용되는 것이다. 어두운 기운이든 밝은 기운이든 새 기운이

시작되리라, 하는 징조로 봐야 하느니."

만일 아들 강모가 집안에 있었더라면 그를 앉혀 놓고 해야 할 말들이었지만,

이미 그가 가 있는 곳을 알 수 없는 지금, 고적한 슬하에 대를 이을 손자

철재는 아직 무릎 아래 유아인지라, 그는 효원을 마주하고 이처럼 이르는

것이다.

청암부인 생존시에는, 해마다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온 식구가 모여서 부인에게 '묵은 새배'를 드렸었다.

"다들 무탈하니 다행이라." 하는 말씀으로 일년 지나온 굽이를 싸다듬어 주는

부인 앞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때마침 깎아 들여오는 흰 무를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와삭.

그 속이 시리게 무를 먹고 난 이기태는 크게 소리했다.

"무사 태펴엉."

그것은 습속이었다.

"옳지. 인제 새해에는 모든 일이 그저 순조롭고 무사 태평할 게다."

청암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다른 식구들도 따라서 속으로 '무사 태평'이라고 빌었다.

사람 사는 쌍의 하루하루는 좋은 일보다 궂은일이 더 많아, 그날위에 날이

쌓인 삼백예순다섯 날은, 켜켜이 근심으로 자욱하고 검댕이져서, 이제 돌아보면

마치 그을음 덩클덩클한 굴뚝 속 같은 한 해. 그러나 그만만 해도 견딜 만한

일이었다. 때로는 여름날에 우박 치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북풍 한설

허허벌판에 꾀벗을 일 생기는가 하면, 느닷없이 천길 낭떠러지에 까마득히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폭우 속에 악산을 헤매어 기어 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척

단신 인간이 겪는 수모와 오욕과 서러움, 억울함, 원통함, 그리고 가슴에

무겁게 얹힌 눈물과, 어디다 대고 말 한 마디 못한 채 저 혼자 시커멓게 썩은 속.

이 모든 것들이 가는 해와 더불어 무 먹은 뱃속같이 속 시원하게 소화되어

편안하게 내려가 버리라고, 사람들은 섣달 그믐난 저녁이면 둘러앉아 그렇게

무를 베어 먹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릇 모든 실과들이 울긋불긋 요사스럽게 눈을 현혹시키는 색이 있거나, 그

색을 모조리 깎아 낸다 해도 그 안에는 깡치가 뭉쳐 도사리고 있거나, 아니면

깡치보다 더 단단하여 잘못하면 이빨 부러지게 하는 씨가 있기 쉬웠다. 복숭아

씨나 대추 씨를 보라. 또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 무슨 형태로든지 열매

속애 씨는 박혀 있게 마련이어서 그냥 먹으면 목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무만은 껍질도 희고 속도 희어 안팎이 모두 티없이 끼끗한데다, 살이

연하고, 먹을 때 걸리거나 뱉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으니.

부디 새해의 나날이 그와 같이 밝고 환하여, 하는 일마다 순탄하게

되어지기를 비는 소박한 마음이 그런 시속으로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도, 고슴도치 가시 돋힌 밤송이를 손가락 찔리며 까서, 그 속의 알밤을

꺼내, 질긴 껍질을 칼로 벗겨 내고, 또 그 안에 떫디 떫게 뒤덮인 비늘을 다시

벗겨 내야 하는 밤을 먹으면서 "무사 태평." 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망치나 방망이로 그껍질을 두드려 깨야 하는 호두를 까먹으며 그런

기원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그것을 으깨지 않고 제대로 껍질을 까기도 어렵거니와 겨우 그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다음에 드러나는 호두 속은 구절양장, 올록볼록, 오밀조밀,

굽이굽이,복잡하기 이를 대 없는 그 속을 들여다보고는 차마'무사 태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 것에 비기면 무는 무미한 듯 늠연한 생김새가 군자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무 한 토막으로 그처럼 궂은 날은 씻어 버리거 밝은 날은 부를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리.

이기채가 아직 나이 어려 대여섯 살 먹었을 때는, 청암부인 혼자 덩그렇게

앉아 양자 기태의 묵은 세배를 받고, 두 모자 마주앉아 무를 깎아 먹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그가 성혼하였을 때는 새각시 율촌댁과 나란해 부인의

무릎 앞에 앉았고, 해가 지나 딸 강련이와 아들 강모가 자라면서부터는 설날이

참으로 꽃봉오리처럼 화사해졌다. 딸은 남의 식구라, 부실한 대로 나이 되어

시집으로 가고, 강모는 대실에 장가들어 효원을 아내로 데리고 왔다.

"내 이제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청암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

부인은 느꺼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소리 없이 낙루하였다.

"온 방안이 가득 다 내 식구로구나."

어디보자.

청암부인은 아들 내외, 손자 내외. 그리고 이제 곧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

태어날 어여쁜 증손자를, 마치 감고 싸서 장롱 속에 갚아 간수해둔 보물을

남모르게 꺼내 보듯이 하나하나 눈여기어 이윽히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 이기채는 사랑으로 나와 뚜껑이 단정하게 덮인 종이 상자 빗접을

꺼냈다. 그것은 활짝 펼치면 거의 장판지 한 장 정도의 넓이가 되지만, 접으면

가로 세로가 한 자씩이나 됨직한 상자 모양이 되는 것이었다.

종이를 여러 겹 덧발라 부해서 누렇게 기름을 먹인 이 빗접은, 중심부에

손가락 한 개를 세운 높이로 네무진 테투리를 두르고, 그 내모를 또 다른

칸으로 나누어, 작은 칸 속에는 각기 빗이며 동곳.살쩍밀이 같은 것을 담아

두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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