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머리를 빗을 때는 이 빗접을 넓게 펼치어 쓰고, 다 빗은 다음에는
다시 접어 간편하게 밀어 놓는 것인데, 혹 어디 출행할 일이 있을때는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다회를 친 매듭끈까지 달린 것이다.
빗접의 뚜껑에는 한복판에 색지를 접어 가위로 오린 녹색 꽃이 탐스럽고
정교하게 피어 있고, 둘레 네 귀퉁이에는 노랑.주황.보라.남색의 매미와
잠자리들이 솜씨 있게 오려 붙여져 있었다.
이기채는 결코 아무 데서나 머리를 빗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안의 누구보다 맨 먼저 일찍 일어나는
그가 온 집안이 카랑카랑 울리게 기침 소리를 내면, 아직도 머뭇머뭇 검푸름한
빛으로 뒤안이나 헛간 모퉁이에 고여 있던 어둠은 깜짝 놀라 무색해지고, 그
기침 소리를 들은 방방에서는 황급이 인기척이 부시럭부시럭 들렸다.
붙들이가 놋대야를 받쳐들고 큰사랑 마당으로 달음질치면, 이기채는 어느새
토방에 나와 대추 씨 같이 단단해 보이는 체수를 꼿꼿이 새우고 뒷짐을 진 채로
물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낯을 씻고는 방으로 들어와 이 빗접을 펼쳐 놓고 넓은 종이위에
올라앉었다. 그리고는 행여라도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마치 무슨 의례를 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투를 좆아 동곳을 꽂은 다음에는 한 올이라도 떨어진 머리털이
있으면 반드시 주워서, 그것만 모아 싸두는 종이에 담았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하여 비록 저절로 빠진 쓸모없는 터럭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지 않고, 정월 초하룻날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소중히 모아서
간수하였다가, 비로소 그믐밤에 태우는 것이었다.
이기채가 해마다 그 머리터럭 뭉치를 들고 사랑 마당으로 나가 공손히 태울
때, 그는 생가의 부모보다 청암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본디 그에게 몸을 주신 이는 낳은 부모이련만, 웬일로 머리터럭 태우는
노린내 자욱한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연기 속에 망연히 서서 그는 길러 주신
어머니, 종부, 청암부인을 더욱 절실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내 어쩌다가, 지차의 자손으로 생긴 사람이 한 가문의 종손으로 되었는가.
이 험난한 시절에. 나라는 망하고, 가문은 창씨를 하여 조상의 성을 무참히
빼앗긴 채 잃어버린 오늘. 나에게 신체발부를 주신 생부.생모가 누구이시든
그것은 한낱 사사로운 인연이요, 다만 마음에 둘 따름이지만, 강보에 싸인 내가
그 슬하를 떠나 이제 백발에 이르러, 나에게 터럭 주신 이가 누구인가
돌이켜보면, 그는 지금의 어머니이시라. 그이는 종가의 아들이 종손으로 이
몸을 키우셨으니, 나는 한부모의 자식이 아니라 매안 이문의 자식인즉.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 도리와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천행으로,
절손을 면하여 강모를 두었고, 그놈 또한 조상의 음덕으로 철재 하나 두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일을 다 했노라 할 수 있는가. 어쩌든지 그것들을, 이 집안의
종손으로서 가문의 지붕이 되고 중추가 되도록 실하게 길러야 할 터인데.강모란
놈, 저렇게 유약하니....."
뭉글뭉글 밀려오며 페 속으로 자욱이 끼쳐드는, 터럭 타는 누린 연기가
이기채의 가슴을 채우면서 미어지게 하는데, 그 연기 복판에 강모의 얼굴이
무겁게 얹혔다.
그런 강모는 어이없게도 이기채에게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이 홀연 집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비단 이기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할머니 청암부인,
어머니 율촌댁, 아내 효원에게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청암부인은 뒤미처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만주. 만주라니.
마적떼 출몰하는 허허벌판에 누구를 보고, 무엇을 하러 갔단 말이가.
이기채는 기색을 하였다.
동경의 음악학교를 가겠다 했던 그가 만주로 갔다는 것이 도무지 엉뚱하고
실감나지 않아, 처음에는 누구 남의 말을 잘못 듣고 전한 것이려니, 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제 사촌형인 강태와 함께 간 것이 분명해진 것은, 기표가 사방에
사람을 놓아 탐지해 온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도 아주 혼자 간 것보다는 종형제 나란히 갔으니 다행이라."고
문중에서는 더러 위로의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빈 소리였다.
그가 어떤 종손인가. 어떻게 이어진 종손이라고 이렇게 어이없이 무엇을
보자고,조상의 사당을 비우고 되놈의 벌판으로 가 버릴 수 잇을까.
그러다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믐날 밤에는 장등을 하지만, 꼭 그래서만이 아닌 등불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강모를 기다리듯이, 대문간과 중문간, 사랑 마당, 뒤안이며,
장독대와 행랑채, 외양간이며 헛간, 곳곳에서 붉은 주황으로 꽃불같이
흔들리었지만. 강모의 발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이맘 때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야광귀 이야기가 음식 장만하는
부엌에서 들린다.
"그렇게 그 귀신은 섣달 그믐날 밤에 낼온다요?"
콩심이가 턱을 추켜들고 불을 때는 안서방네한테 물으면
"하아.이러어케 하늘에서 낼와 갖꼬 살째기 사람 사는 집이로 들으가서,
토방에 널려 있는 이 신 저 신 신어보고, 저한테 맞는 놈을 돌라간다고 안
그리여? 옛날부텀. 너는 그런 이얘기 안 들어 봤냐?"
"근디. 신을 잊어 불면 어쩌간디요?"
"재수가 없지 어째. 일년 내내. 사램이 신을 신어야 어디를 댕기는 거인디.
일을 허든 마실을 가든, 근디 신이 없응게 어디 갈 수가 있겄냐? 꼼짝없이
감옥살이제, 까깝허게, 일년 동안 그로고 오그리고 앉엿으먼 머이 좋겄냐?
재수가."
"그러먼 어쩐대요?"
"그렁게 그날은 토방으다 신 벗어 두먼 안되제이. 딱 들고 들으가서 웃목으다
놓든지 어디 시렁에다 올려 놓든지. 조심해야지이."
"오오."
"콩심아, 너 그 야광귀가 신발 못 돌라가게 허는 꾀가 머인지 알겄냐? 한
가지 신통헌 거이 있기는 있는디."
"머잉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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